소설리스트

89화 (88/131)

“사월아, B 세트 먹을래?”

“네.”

“B 세트로 둘 주시고 하나는 생새우 빼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추천한 식당인데 한결이 메뉴판을 둘러보더니 종업원에게 익숙하게 주문했다. B 세트는 내가 좋아하는 붉은 살 생선이 많아서 유건과 올 때마다 시켜 먹던 메뉴였다.

“선배, 여기 와 봤어요?”

“어. 유건이랑 가끔.”

그러고 보니 이 식당은 나도 유건이 추천해서 처음 오게 된 곳이었다. 둘은 유건이 나와 페어 하기 전에 같이 식사를 곧잘 했으니 한결이 와 본 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생새우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미리 빼 달라고 한 것에서 그가 그간 나를 돌본 연륜이 묻어났다.

유건과 왔을 때는 굳이 말하기 귀찮아서 그냥 남기면 유건이 먹어 치우곤 했는데, 확실히 한결과 유건은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이건 데이트로 안 세는 거야. 알았지?”

“아… 네.”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혹시 숙소에서의 대화를 이어 나갈까 걱정됐는데 그는 아예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이 주제 또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범인을 쫓기에 정신이 없다 보니 그와 만남이 한 번 남았다는 걸 완전히 잊고 지냈다. 밥이 나오기도 전에 불편한 얘기를 하려니 목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앞에 놓인 따듯한 녹차로 입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선배 편할 때 봐요.”

“네가 그날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

“언제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는 마치 날짜를 이미 정해 놓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언제든 그의 시간에 맞출 생각이 있었다. 이번 주엔 흡혈하러 가지도 않고 주말에도 유건과 단둘이 숙소에 있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이번 주 토요일. 그날 시간 돼?”

“네. 근데 아마 센터 안에서 만나야 할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 기숙사 근처에 경비 에스퍼 여럿이 지키고 서 있거든요.”

“아, 그거.”

한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나는 뒤늦게 그 임무를 한결이 내린 것이고 그가 충분히 나를 밖에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밖에 나갈 수 있어요?”

“네가 원하면.”

역시나 한결과 함께라면 가능했다.

“저 안 그래도 센터 안이 답답했거든요. 바깥바람 좀 쐬고 싶어요.”

그는 느긋하게 웃었다. 그런데 평소에 다정해 보이는 것 말고 은근한 함의가 깃들어 있었다.

“왜요?”

나는 괜히 그가 뭔가 알아챘을까 봐 조심스레 물었다.

“그날 무슨 날인지 또 모르지.”

무슨 날 말하는 거지? 토요일이 무슨 기념일인가?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날도 아니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다는 듯이 입을 다물자 한결이 선뜻 답을 내어 줬다.

“네 생일이잖아.”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7월이었다. 7월 15일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을 잘 안 챙기다 보니 이렇듯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갈 뻔한 일이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한결은 나를 센터 외곽에 있는 한정식집에 데려갔다.

미역국은 물론이거니와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메뉴가 풍성하게 나와서 매번 반도 다 먹지 못하고 나오기 일쑤였다.

거기에 값비싼 선물은 덤이었다. 값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 취향은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항상 마음에 차는 선물을 가져왔다.

지금도 얇은 목티 안에는 한결이 사준, 다이아몬드가 박힌 물방울 모양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또 1년이 흐른 건가 싶어 시간의 흐름이 놀랍게 느껴졌다.

“진짜 기억 못 하고 있었나 보네.”

“네…. 그럼 그 한정식당으로 가요?”

“별로야? 다른 곳 가고 싶어?”

“아니요. 좋아요. 그럼 월요일에 경비 에스퍼한테 제가 말하면 되나요?”

“음….”

나갈 수 있는 구실이 생기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정식당은 A 지역이지만 센터와 먼 거리에 있었다.

지한이 도와야 가능한 일이지만 유건도 따돌리고 경비 에스퍼도 피해서 이안에게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뭐라고 할 건데?”

“네?”

“나랑 데이트하러 나간다고 할 거야?”

“어… 그러니까….”

희망에 찼던 것도 잠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센터에서 스캔들이 났지만, 내가 한번 팀원들에게 아니라고 못 박은 적이 있었다.

아쿠아리움에서 있었던 일도 그날 기사가 났다. 금방 내려가긴 했지만, 잠깐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고 들었다.

분명 한결과 별 이유 없이 외곽으로 나간다는 말이 퍼진다면 다시 잦아들었던 소문에 불을 지피는 일일 것이다.

“저 병원 갈 일도 있거든요. 그 핑계 대고 같이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왜? 어디 아파?”

나는 한 달 후에 내 계획이 실패할 상황을 고려해서 질병 퇴직 사유도 마련해야 했다. 5년 전 사고로 이어진 트라우마가 최근에 발생한 가이드 습격 사건으로 인해 극심해졌다고 할 생각이었다.

이 거짓 진단서는 에밀리의 친구가 마련해 주기로 했다. 센터 안에 정신과가 있긴 하지만 소문이 나는 걸 고려해 예전에도 외부에 있는 정신과를 다녔으니 한결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다.

나는 당장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한결에게는 불면증과 부분 기억 상실증처럼 평소와 다른 증상이 있되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말했다.

최근에 겪고 있는 금단 현상 덕분에 자세히 보면 실핏줄도 터져 있고 안색이 안 좋았던 것도 적절한 변명거리가 됐다.

“그럼 오늘이라도 가 보는 게 어때? 그런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서요. 제가 요새 피곤해서 생긴 걸 수도 있어요. 각성자들이 원래 잔병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잖아요.”

“걱정되는데….”

지금 당장은 모두를 속일 방법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한결이 데이트를 할 때마다 기숙사 앞으로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왔으니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번 한결의 숙소에 갔을 때 그가 차 키를 발레파킹 요원에게 맡기는 걸 본 적 있다. 센터 기숙사의 발레파킹 요원은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이다.

지한이 며칠만 공들이면 세뇌를 통해 그의 차를 빼내 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차는 선팅이 짙게 돼 있어서 어차피 운전석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한결의 차는 국내에 한 대밖에 없는 모델로 센터 각성자들은 대부분 차만 보면 한결의 차인 걸 알아보곤 했으니, 따로 한결이 운전석에서 나오지 않아도 차만 보고 경비 에스퍼가 나를 내보내 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꺼내 주면 나는 유건이 알려 준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지한은 다시 한결의 차를 발레파킹 요원에게 맡기면 된다.

이안의 거처는 아마도 차를 타고 가야 할 테니 지한의 차를 타고 가서 접선하면 되겠지.

그렇게 이안에게 피를 주고 오후에는 센터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이안은 습격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쫓기는 입장이니, 저번처럼 무리하게 나를 붙잡아 두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건도 한결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말리지 않을 테니까.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게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지만, 이 방법이라면 유건에게도, 경비 에스퍼에게도, 한결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안을 만나고 올 수 있다.

“경비 에스퍼들이 병원은 왜 백유건이랑 안가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뭐, 그건 감안해야죠.”

어차피 소문은 날 대로 났고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별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한결이 옅게 미소 지었다.

“S급 가이드 한번 데리고 나가서 밥 먹이기 힘들다, 그렇지?”

“왜 그래요 또. 선배가 알파 팀 캡틴이라서 힘든 거거든요?”

가끔 그가 등급을 운운하며 놀려 먹기에 나도 맞받아쳤다. 우리는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센터 각성자의 주의를 한 몸에 받았다.

지금도 구석 자리에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오다가다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B 세트입니다.”

“새우 뺀 건 여기 놔주세요.”

“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종업원이 초밥을 가져왔다. 초밥은 나무 판 위에 일률적으로 예쁘게 세팅돼 있었다.

한결은 종업원이 가기도 전에 자기 몫의 붉은 생선을 집어 내 나무 판에 올려놓았다.

“많이 먹어, 사월아.”

한결의 목소리는 제삼자가 듣기에 연인에게 건넬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종업원이 우물쭈물하는 것이 우리를 알아본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이런 행동을 해도 나를 당연히 아는 동생으로 봤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캡틴.”

한결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왠지 일부러 장난을 친 것 같았다.

***

늦어도 30분이면 된다던 유건은 결국 우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 있나?’

연락을 해 볼까 하다가 한결이 커피를 마시자는 말에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유건이 있었다.

센터 제복을 입지 않은 낯선 여자 둘과 함께.

“왜 그래?”

내가 들어서다 말고 멈칫거리자 한결 또한 내 시선을 따라 유건을 발견했다. 유건은 그 여자 중 한 사람에게 팔을 내어 주며 주사기로 피를 뽑고 있었다.

그 옆에 기다란 튜브가 손바닥 크기의 팩과 연결되어 있어, 마치 헌혈하는 것처럼 보였다. 팩에는 유건의 새빨간 혈액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

나는 눈으로 보고도 유건이 뭘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카페에서 정말 헌혈하는 것은 아닐 테고.

피를 뽑고 있는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의료진 같았지만, 센터 마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 사람이라는 얘긴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크 재질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유건에게 뭔가 길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그쪽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갔다. 유건은 우리를 등지고 있어서 내 모습을 보지 못했고, 여자들도 자기들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에스퍼 피는 조합해 본 적이 없어서 시일이 더 걸리고 있습니다. 다시 찾아오는 일 없도록 이번엔 충분히 채혈해 가려고 합니다.”

“괜찮아요. 기간 내에는 완성되는 거죠?”

“예. 이미 거의 완성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되니 조만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 캡슐에서 했던 유건의 말이 떠올랐다.

“퇴근하고 네가 먹을 만한 거 시켜 놨어. 조금만 참아 봐.”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나? 설마 자기 피로 내가 먹을 대체 식품을 만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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