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조금의 여지도 보이지 말자. 완전 범죄로 만들자. 그러면 녀석이 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 일도 없을 것이라고.
“기분 조절 좀 해.”
파장이 너무 짙게 느껴져서 유건의 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에스퍼의 파장은 가이드처럼 조절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나마 기분에 영향을 받으니 저마다 평화로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조절하곤 했다. 감정이 격해지면 그마저도 효용이 없을 테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이윽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유건의 파장이 금세 부들부들하게 바뀌었다. 예전엔 조절하라 해도 잘 못 하더니 이것도 이제 숙련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 했어?”
“안 알려 줘.”
불현듯 그가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지 궁금해서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굳이 캐묻고 싶은 건 아니라서 단념하며 다시 가이딩을 진행했다.
가이딩을 마치고 캡슐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길,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따라 키가 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눈빛도 묘하게 그윽했다.
아이홀이 깊은 탓에 원래도 웃지 않으면 진한 인상이긴 했다. 그동안은 앞머리를 내려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어제 이마를 깐 모습을 봐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왜?”
유건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바라봤다.
“좀 변한 것 같아.”
“뭐가?”
그가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건 좋은데 자꾸 숨기는 게 많아져서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고 언제나 해맑은 것이 유건의 매력 아니었나.
언제든 주인이 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 같은 매력 말이다.
“아니야.”
나는 시선을 거두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유건도 김샌 표정을 하더니 곧바로 따라 올랐다.
유건이 이렇게 변한 건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조금은 의젓해진 녀석이 마음이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장난을 치더라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깊게 생각해 보면 머리가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으니 언젠가는 이렇게 변할 것 같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눈치는 자연히 빨라지고 가면을 써야 하는 일도 수두룩했다. 그 변화의 시발점이 나라는 점이 찝찝할 뿐이었다.
내가 계속 그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 또한 예전의 나라면 그가 자초한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이 쓰였다. 내 옆에 있는 유건이 자꾸 불쌍해 보여서 큰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라서 유건과 밥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오늘도 다른 식당 가?”
“어.”
“귀찮다고 매일 구내식당가더니 별일이네.”
센터 구내식당은 한식, 중식, 양식별로 다섯 가지 메뉴가 매일 바뀌었다. 그밖에 간단한 샐러드나 샌드위치가 상비돼 있어 다양하고 퀄리티가 좋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그저 구내식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식당을 찾아가곤 했다. 나는 밥 먹는 것이 가장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서 매번 가장 가까운 구내식당을 찾았다.
“쉬는 시간에도 캡슐에 있는 것도 그렇고. 너 요새 뭔가 이상해.”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식당도 사무실도 피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이러한 행동을 하는 건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 형이다.”
백유건의 형 백한결. 그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한결이 그동안의 내 수고가 우습다는 듯 저 멀리 구내식당 쪽으로 걷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나 봐.”
한결은 같은 타이밍에 유건을 발견했다.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가 순간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숙소에서 대화한 이후로 그를 며칠간 피해 다녔기에 자연스레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거리가 있는 탓에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움츠러들었다.
내가 황급히 시선을 틀며 못 본 척하자, 유건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못 봤나?”
다시 고개를 들자 한결 또한 우리를 보지 못했다는 듯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렇다고 유건이나 나는 한결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
유건은 어느 순간 한결과 관계가 소원했고, 나는 지금 한결이 불편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그런가 보네. 우리 후문 쪽 일식집 가자.”
“그래.”
나는 가끔 찾는, 구내식당과 반대편에 있는 일식집으로 유건을 이끌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며 마음을 다잡는 사이 4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계속 피하면 한결이 더 의심스러워할 수도 있단 걸 아는데도 그를 마주하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게 만났으니, 내일은 꼭 먼저 찾아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Rrr.
그 순간 유건의 벨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모르는 번호인지 “누구지?”하며 갸웃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곧바로 대답하는 것이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점점 걸음까지 멈추며 뒤돌아섰다.
“지금요? 어디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수신인을 근처에서 찾는 것처럼.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이내 전화를 끊고 나를 불러세웠다.
“사월아.”
“왜.”
“나 잠깐 아는 사람 만나야 하는데 같이 갈래? 아니다, 네가 같이 가면 안 되지. 한결 형이랑 잠깐만 있어.”
“뭐?”
“캡틴!”
유건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멀어지고 있던 한결을 불러 세웠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까지 갔는데도 한결은 바로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보았다.
“야. 잠깐 갔다 오는 거면 혼자 있어도 돼. 선배 부르지 마.”
“어떻게 혼자 놔둬. 금방 갔다 올 테니까 형이랑 기다리고 있어.”
“무슨 일인데? 급한 거야?”
유건은 나흘 동안 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을 갈 때도 여자 화장실 앞에서 보초를 섰고, 물 뜨러 갈 때, 손을 씻을 때도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 유건이 갑자기 볼일이 생겨 가는 것이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생겼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응. 급한 거야. 얼마 안 남았잖아.”
“뭐가 얼마 안 남아?”
“그런 게 있어.”
유건은 은근한 미소를 지을 뿐 알려 주지 않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걸 보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누구 만나는 건데.”
“매니저님.”
“매니저?”
“무슨 일이야?”
유건을 추궁하는 사이 한결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얼굴이 맞닥뜨리니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심장이 불안하게 속도를 높였다.
유건에게는 한결과 나눴던 대화를 말하지 않았으니 왜 내가 한결을 피해 다니는지 몰랐다. 뒤늦게 그에게 말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캡틴. 저 잠시 용건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구사월 가이드 경호 맡아 주실 수 있습니까?”
유건은 한결에게 알파 팀 팀원으로서 정중하게 부탁했다. 한결은 그런 유건이 귀엽다는 듯 웃다가 엄한 체하며 말했다.
“게이트 임무도 전부 제외해 줬는데 경호 임무 하나 제대로 못 합니까?”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건은 당연히 한결이 요청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가 거절당하자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제 할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꾸중에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장난이야. 다녀와. 갔다가 언제 올 건데.”
“…길어 봤자 30분이면 돼. 밥 먹으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둘이 식사라도 하든지.”
한결은 편안히 웃으며 그를 대했다. 유건도 딱딱한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틱틱거리며 말했다.
왠지 이렇게 둘을 한 시야에 두는 것이 오랜만인 것 같단 감상이 들었다.
아무리 유건이 한결에게 못마땅한 기색을 보여도 한결이 유건을 예뻐하는 것이 보여서 유건의 적대적인 분위기가 상쇄되는 것 같았다.
유건이 한결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건 아니라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둘은 우애가 좋은 형제다.
한결이 나를 미워하지 않을 신뢰가 있듯이 그건 유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결과 같이 식사하라고? 백유건 제정신인가?’
나는 둘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게 닥친 현실을 직시했다.
“되도록 빨리 올게. 구사월, 형 옆에 딱 붙어있어. 아니 한 뼘만 떨어져서 있어. 나 간다.”
“야, 잠깐…!”
내가 나지막하게 붙잡아 봤지만, 유건은 정말 바쁜 건지 휴대폰을 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를 잡으려 어중간하게 올라간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굳었다.
센터 안에 그나마 한결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판단해서 굳이 한결을 부른 것 같았다. 이걸 어쩌나 좌절하는 사이 내 뒤로 한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월아. 나랑 식사하기 싫어?”
“아니요!”
순간 당황해서 뒤돌아서며 큰소리를 냈다. 얼굴을 바라보기 힘들어서 시선을 피하자, 한결이 내 얼굴을 더욱 유심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같이 다니더니 닮아가는 건가….”
“네?”
한결의 혼잣말 같은 말에 의문이 서려 되묻자 그가 내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둘 다 귀엽게 굴어서.”
자연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차갑지 않았다. 긴장을 점점 풀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안전하게 감싸는 울창한 숲 같았다. 역시 그가 나를 미워할 리 없다.
그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겁을 냈을까.
“저 따라오면 돼요.”
나는 다시 앞서 걸었다. 금방 내 옆으로 따라붙을 줄 알았더니 한결은 계속 내 뒤에 한 걸음쯤 떨어져서 걸었다.
혹시 유건이 갈 때 한 뼘쯤 떨어져 있으란 말을 신경 쓰는 건가 싶어 내가 발걸음을 늦췄다. 그로서 나란히 걷게 되자 한결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일식집은 테이블마다 사이가 넓었다. 단층으로 되어 있어 통유리로 된 창 너머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가장 안쪽 자리를 골랐다. 코너로 꺾어서 들어가는 곳이라 같은 식당에 있어도 다른 손님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