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은 귀엽고 말이라도 잘 듣지. 너는 아니잖아.”
“누가 그래. 반려동물이 말 잘 듣는다고.”
유건은 반려동물을 안 키워 본 게 분명하다. 어릴 적 고양이를 키웠었는데, 집에 오면 항상 난리 통이었다.
유건은 미소 지으며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닭 표면에 얕게 칼집을 내고 부재료를 일정한 크기로 썰었다.
칼이 도마에 부딪치는 소리가 정겨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유건은 양파를 뿌리 부분으로 종단하는 게 아니라 횡단하고는 멈칫거렸다.
“…칼질 위험하니까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 방금 잘못 썰었지.”
최근에 배운 게 사실인지 간혹 잔 실수를 할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해도 돼.”
“아닌데. 방금 멈칫거렸는데.”
“봐. 말 안 듣잖아.”
“넌 내가 말 안 들어도 예뻐하잖아.”
나는 유건의 팔에 볼을 기대며 더욱 가깝게 다가갔다.
“진짜 반려동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이번엔 눈에 띄게 그의 손놀림이 굼떠졌다. 포근한 파장이 퍼졌다.
“…이게 다 알고 말 안 듣는 거였네.”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원래도 눈빛이 따듯한 녀석이긴 했지만, 요즘엔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했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봐 가며 발을 뻗는다는 말이 있다. 그 부드러운 햇살 같은 미소와 마주할 때마다 내가 누울 자리가 이 녀석 옆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 후엔 유건이 차려 준 밥을 먹고, 유건이 내려 준 차를 마시고, 한가롭게 티비를 보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중간에 잠이 깨서 뒤척이다가 물이라도 한 컵 마시려고 나가 보니, 유건은 거실 소파에서 쪼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어제도 여기서 자던데 뭔가 내 방과 먼 거리인 게스트 룸에서 자는 게 불안한 건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와서 살금살금 걸어가 유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주황 불빛의 무드 등이 따뜻하게 내부를 밝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옆으로 쏠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옅은 색소의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내려앉았다.
자는 와중인데도 피부가 생기가 돋았고,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이렇게 조화롭게 들어가 있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가깝고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새롭게 느껴졌다. 이렇게 곱게 자란 것 같은 녀석이 어쩌다 나랑 엮였나 싶기도 하고.
그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가도 불쑥불쑥 죄책감이 밀려왔다. 항상 최악을 생각하던 머리가 곧 그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했다.
규현과 유건 말대로 센터를 떠나 버리면 편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내가 크리먼인 게 밝혀졌을 때 잠시 몸을 숨겼다가 센터에서 내 죄를 묻어 주겠다고 결정하면, 주위의 시선은 불편하겠지만 가이드 일을 계속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센터가 용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였다.
유건은 크리먼을 숨겨 준 공범으로 낙인찍히고, 한결도 내가 크리먼인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며, 내가 센터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유건도 가지 않겠다고 하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내 옆에 있을 유건이 너무 불쌍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S급 에스퍼라는 훈장을 달고 앞길이 창창한 녀석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기분이었다.
한결 또한 그렇다. 그가 한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선 세상을 등지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리고 쏟아지는 온기에 기대 살고 싶게 만든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기간은 한 달. 그 안에 노력해도 안 된다면 정말 끝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했다. 메시지를 보내자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AEC강지한 : 기다렸어.」
호랑이 굴에 들어가더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곳이 지옥불인 걸 아는데도 나는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살고 아니면 말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느낀 것은 내가 머리를 굴려 봐야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단 거였다.
그러나 어차피 정해져 있으니 흘러가는 대로 살기엔 나중에 찾아올 ‘후회’라는 미련이 싫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미래의 내가 나 때문에 눈물짓는 사람들을 보고 덜 창피할 수 있기를. 찾아오는 죄책감에 내가 삼켜지지 않기를.
***
나는 지한에게 이안과 거래할 생각이 있으니 위치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지한은 위치는 알려 줄 수 없으며, 자신과 동행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안은 이제 센터에서 쫓기는 입장이고, 본거지가 들통나면 위험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이번에도 허튼수작할 생각 마라, 어차피 크리먼인 게 밝혀질 입장이니 고발하겠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한은 이안도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 피만 준다면 내가 원하는 항생제를 주겠다고 말했다.
아직 말뿐이지만 그들의 말대로라면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안과 접선하고 싶어도 지한과 단둘이 나갈 수 있도록 유건이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이 사안을 미뤄 두고, 유건과 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 기회를 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이마저도 내 뜻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후….”
“왜? 뭐가 잘 안돼?”
“아니. 조금 답답해서.”
진단원에서 매칭해 준 에스퍼와 캡슐에서 가이딩을 마친 후 곧바로 유건과 가이딩 중이었다. 유건이 예상했던 대로 나는 외부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기숙사 근처에도 경호 에스퍼들이 상주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퇴근이 늦어지면 곧바로 연락해 오고, 잠깐 앞에 편의점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제야 하루라도 빨리 유건을 꼬드겨서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나는 가이딩 지금 당장 안 받아도 되니까.”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 갈증도 참기 힘들고 센터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해.”
벌써 금단 현상이 가장 심해지는 2주 차였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눈이 뻑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안을 만나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흡혈이 시급했다. 유건은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나갈 수 있는 방법 없어?”
그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넌지시 물었다. 유건은 평소에 정석적인 방법 외에 잔머리를 잘 굴리기도 했으니까.
“찾으면 있기야 하겠지만… 나도 솔직히 밖은 불안해서 너 내보내기 싫어.”
“너랑 같이 나가는 거잖아.”
“그래도 네 숙소에서 같이 있는 게 가장 안전하지.”
이제 보니 유건은 애초에 내가 나가는 걸 도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뾰로통해지자 그는 생각에 잠기다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하고 네가 먹을 만한 거 시켜 놨어. 조금만 참아 봐.”
“뭐? 다른 피라도 공수했어? 센터 출입 안 될 텐데.”
“피 아니야. 대체 식품?”
“초콜릿?”
“그거 말고.”
그는 기대하라는 듯 배시시 웃었다. 안 그래도 초콜릿을 매일 까먹었더니 이제 질리기 시작했다.
다른 대체 식품이라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할 테지만…
‘피도 아니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짜증 나.”
내가 결국 못마땅한 표정으로 짜증을 부리자, 유건은 진정하라는 듯 내 손을 쓰다듬었다.
“못 참겠으면 내 피 마시든지.”
“싫어. 저번부터 왜 이렇게 네 피를 마시래?”
에밀리가 금단 증세가 나타나는 중에 마시다 말다를 반복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 거라고 말했다. 이제껏 힘들게 참았는데 지금 마신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나는 솔직히 너랑 각인 계속 유지하고 싶어.”
유건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라도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쉽게 끊어 내고 가진 않을 거 아니야. 너 머리 굴리는 거 보일 때마다 불안해.”
“…….”
내가 센터를 자꾸 나가고 싶어 하니까 유건이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갈증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그럴듯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색한 구석이 있었나….
하지만 정말로 갈증이 나는 것도 맞아서 나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말했잖아. 이안한테 안 간다니까? 그냥 너 말고 다른 피 마시고 싶어서 그래.”
“맞아. 그랬지.”
유건은 아예 안 믿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확답을 듣고도 불안한 건지 다시 한번 단속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한 번만 더 혼자 위험한 짓 하려고 했단 봐.”
“뭐, 네가 어쩔 건데.”
나는 괜한 반항심이 들어 삐딱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이러다간 기다리다 지친 이안이 그가 건넨 제안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숨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전에 사라진 연구원을 에밀리와 쫓을 때도 그는 거처를 많이 옮겨 다녔다. 지금은 센터에 쫓기고 있으니 더욱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확률이 높았다. 지금은 지한이 매개체가 되어 주고 있지만 언제 끊길지 모를 일이었다.
“울고불고 떼써도 안 되면 뭐겠어.”
유건은 내 앞에서 운 것이 창피하지도 않은지 자기 입으로 그날의 기억을 꺼냈다.
“나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
그러나 그날의 처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농도 짙은 파장으로 내 몸을 에워쌌다.
어디 네가 자신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 보라는 듯이. 자신의 파장을 거부할 수 있냐는 듯이.
그의 파장은 본래 몽글거리고 포근한 느낌이지만, 조금이라도 흥분하면 이렇듯 숨이 막힐 정도로 집요한 분위기를 냈다.
파장이 성격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는 건 이런 걸 보면 꽤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는 본성이 부드럽고 유해도 자신이 몰두하는 것에는 꽤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일할 때는 그런 성격이 성실하다고 여겨지지만, 사람에게 향할 때는 과한 관심이고 집착이었다.
예전엔 요령이 없어 이러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밀어붙였다면, 요즘엔 겉치레 같은 가면을 쓰며 웃음 뒤로 속내를 숨겼다.
그건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내 곁에서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변한 점이었다. 그가 대놓고 감정적으로 밀어붙일 때면 항상 나와 트러블이 났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숙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그늘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이전에 유건은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고난과 역경이 없었을 거라 여겼으니까.
“위험한 짓 안 한다니까…. 진짜 안 해.”
유건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는 정말 유건이 내 말을 믿는 건지, 그저 믿는 척하는지 나도 헷갈렸다.
안타깝게도 내가 이안을 만나러 가기 위해선 이런 유건을 가장 먼저 따돌려야 했다.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올라서 대놓고 설득해 볼까 싶었지만, 오늘 태도를 보니 솔직하게 말했다간 영영 숙소 밖도 나오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