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5/131)

그는 유건이 내 비밀을 숨겨 줬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지만 그래선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말을 잘라 내며 말했다.

“성규현 에스퍼. 백유건은 제 일에 휘말린 거예요.”

유건이 바로 움찔거리기에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을 잡으며 제지했다. 여기서 끼어들면 유건은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유건은 나와 했던 약속 때문인지 불편한 기색만 보일 뿐 정말 끼어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제 비밀을 알게 됐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에스퍼니까 아시잖아요. 매칭률 높은 가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쟤는 50% 넘는 가이드가 저밖에 없잖아요.”

규현은 그런 유건을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유건은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잠잠한 태도였다.

“구사월 가이드에게도 실망입니다. 크리먼이면서 어떻게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캡틴 옆에 있을 수 있습니까?”

유건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 내 말이 진실인지 파악할 순 없었는지, 이번엔 내게 화살이 향했다.

“캡틴은 그것도 모르고 구사월 가이드가 습격당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하셨는데요.”

“당사자인 저보다 불안했을까요? 제가 크리먼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아십니까?”

내게 규현은 평소엔 유해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고집이 세고 자신의 신념이 뚜렷한 사람으로 비쳤다.

그런 규현이 내 비밀을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충분히 예상했다. 그는 내가 그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도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덮지 않을 것이다.

“듣기 싫습니다. 센터를 나가세요.”

아니, 칼같이 끊어 낼 것이다. 그의 신념은 연민보다 훨씬 강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결과 센터, 그 두 가지를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 녀석은 저를 도와줬는데 그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끼어들지 않기로 했던 유건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들썩였다.

“그래요. 제가 인질로 잡혀서 구사월 가이드가 대신 공격받았죠.”

규현은 유건의 행동에도 기죽지 않고 유건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도 이 정도로 해 드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총으로 쐈을 겁니다.”

“이 새끼가 진짜…!”

“그만해.”

당장이라도 난장판이 될 기세에 그들 사이를 중재했다. 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화라기보다는 착잡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규현을 구한 게 아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규현은 그런 상황을 겪을 일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내 업보를 조금이나마 상쇄한 것뿐이다. 그러나 당장 총으로 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충분히 예상한 전개인데도 씁쓸했다.

“정리할 시간은 한 달 드리겠습니다.”

규현은 어느 때보다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안 에스퍼는 가이드 습격 사건 범인이자, 항생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범죄자에 속하며, 센터에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사월 가이드가 나가면 그들은 센터에서 처리할 겁니다.”

센터에서 처리라…. 이전에 유건이 내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유건은 내게 이안에게 항생제를 얻어 사람이 된 다음 지금처럼 지내자고 했고, 규현은 센터를 나가라고 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이안의 처벌.

“그리고 이안 에스퍼가 구사월 가이드에게 연락하라는 말을 하던데. 연락처를 아십니까?”

“아는데 어제 전화를 걸어 보니 받지 않았습니다. 강지한 에스퍼를 남겨 둔 것 보면 그 사람을 통해서 연락하라는 말 같습니다.”

“아닐 거란 생각은 들지만… 정말 만나실 건 아니시죠?”

나는 규현의 눈을 마주한 채 두 눈만 깜빡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데도 유건의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아닙니다.”

나는 일단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관심을 끌어 봐야 규현에게도 유건에게도 좋을 게 없다. 일단 얌전한 척 구는 게 최선이었다.

“허튼 생각을 할까 염려되어 미리 말합니다.”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규현은 조금의 가능성도 가지지 말라는 듯 단속하며 말했다.

“구사월 가이드가 나가기 전에 인간이 되더라도 저번 주에 있었던 사건은 센터에 알릴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 먼저 인간이 되든, 아니든 센터는 나가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규현의 의도가 내가 인간이 된 후 지금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꿈과 희망을 박살 내고 싶었던 것이라면 아주 효과적이었다.

내가 뭘 하든 세상 사람들은 결국 내가 크리먼인 걸 알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닌 만큼 신속히 판단하고 행동해 주십시오. 더 이상 괜한 고집으로 주변에 피해 끼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쉽고 간결하게 마무리됐다. 규현이 바라는 건 내가 센터에서 나가는 것.

“되도록 캡틴에겐 나갈 때까지 들키지 마세요. 이건 부탁입니다.”

그리고 한결에게 비밀을 들키지 말 것. 단 두 가지였다.

***

“어떻게 할 거야?”

“어쩌겠어. 정리해야지.”

“진짜?”

“어.”

유건과 나는 규현이 나가고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다 같이 들어가면 팀원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왜 생각에 잠긴 얼굴이야?”

유건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방법 없나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는 가끔 쓸데없이 감이 좋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런 유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옛날 생각나서. 근데 성규현 에스퍼는 내 목 조르진 않네.”

유건은 그게 무슨 말인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 하며 짧게 탄식했다.

“뭐, 그런 걸 기억해….”

유건이 내가 크리먼인 걸 알았을 때 지금처럼 회의실에서 대화한 적 있었다. 죽여 보라는 말에 자신이 못 죽일 것 같냐고 목을 쥐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는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유건은 금세 과거의 일이 미안하단 표정으로 제 손끝을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규현 또한 목만 안 쥐었다 뿐이지 유건과 대응이 비슷했다. 자기가 인질로 잡혀 내가 공격받았던 게 아니었으면 당장 총으로 쐈을 거라는 거나, 센터를 나가라고 하는 것이.

“죽는 거 아니면 떠나는 거. 나한테 선택지는 둘밖에 없나 봐.”

“구사월….”

“아니, 죽을 수 없으니 다들 떠나라고 하는 건가.”

유건은 안쓰럽단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내 손을 감싸고 쓸어내렸다.

“네가 센터에 있을 때 크리먼인 게 밝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나도 당분간은 멀리 나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안의 항생제로 인간이 되고 조금 잠잠해지면 돌아오면 돼.”

“됐어. 이까짓 센터.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도 벌 만큼 벌었고 굳이 일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어.”

“그러네.”

유건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 말했지만, 오랫동안 몸담은 곳을 떠나면 분명 허전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이드 일은 내게 단순 직업이 아니라 정체성에 가까웠다. 가이드가 아니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것에 집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짙은 무력감이 찾아왔다. 돈이 있다고 한들 그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유건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이 눈동자가 빛냈다.

“너 센터 나가면 나도 같이 따라 나갈래.”

“뭐?”

“이안이 다시 접근할지도 모르고 위험하잖아.”

그 결심은 또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는 일이었다.

“백유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나도 안 이상해. 네가 말했잖아. 에스퍼한테 매칭률 높은 가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네가 질병 퇴직하면 센터도 아쉬우니까 내가 경호 겸 같이 나가는 거 허락할 거야.”

“S급 에스퍼도 나가는 걸 허락할 거라고?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아?”

“안 되면 내가 되게 해.”

유건이 이럴 때면 떼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왠지 굳건해 보였다. 왜 오늘은 다르게 보이는지 그 차이를 알 수 없어서, 그의 얼굴만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되면 다시 너랑 돌아올 거야. A지부 알파 팀으로.”

그것이 당연한 귀결인 양,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당연하게 말했다.

“너는 가이드가 어울려. 내 옆에서 평생 내 가이드 해.”

강압처럼 느껴질 법한데 그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내 자리는 여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내가 크리먼이기 전에 가이드라고 알아주는 것 같아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아 줘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던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오랫동안 퇴적되어 단단히 쌓인 지층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든다.

그의 다정함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북받쳐 오르는 느낌에 나는 애써 목울대를 움직이며 삼켜 냈다.

“지독한 소리 하지 마. 누가 평생 네 가이드 같은 걸 한다고….”

유건이 상관없다는 듯 끌어안았다. 역시 이 녀석 품은 따듯하다.

같이 있으면 내가 그렇게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만 나를 괴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봐 준다면…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

한결은 바쁜 임무가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를 피해 다닐 생각에 내내 긴장 상태였는데 다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보냈다. 지한을 따로 만나지 않았고, 국현의 크리스탈을 충전하고, 가이딩을 하고, 유건과 퇴근을 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이거 뭐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문 앞에 박스가 쌓여 있었다. 유건은 그 박스의 정체를 안다는 듯 익숙하게 들어 올렸다.

“문 열어 줘.”

“이게 뭔데.”

“저번에 보니까 냉장고에 먹을 거 없길래 장 봤어.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

오늘 아침도 시리얼과 요거트를 먹고 출근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역시 유건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당분간 같이 지내기로 했으니 에스퍼의 하루 활동 대사량이나 근육에 따른 기초 대사량을 고려해야 했다. 몸을 쓰는 직군이니 잘 먹고 에너지를 보충하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유건은 어느새 샤워를 다 하고 박스에 있던 식재료 정리까지 마친 상태였다.

숙소에 원래 마련돼 있던 조리 도구로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생닭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

“뭐 할 건데.”

“닭볶음탕.”

“너희 집 사람들은 다 요리를 잘하나 보네.”

한결도 굉장히 요리에 능숙했다. 유건은 잠시 칼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형은 아마 너 때문에 배웠을걸. 나도 최근에 너 때문에 몇 가지 배워 온 거고.”

“…….”

“형이 이해되긴 해. 너 보고 있으면 맛있는 거 먹이고 싶거든.”

“…무슨 펫이냐?”

유건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연하게 웃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따뜻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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