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4/131)

“지금 내가 예민한 거야?”

“…저 진짜 괜찮아요.”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범인 찾기에 진전이 없을 때는 망망대해를 헤매는 느낌이라 답답했다.

언제 위험이 다가올지 모르니 불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범인을 안 지금은 어디로 가야 할지 뚜렷한 이정표가 보였다.

한결이 체념하듯 눈을 내리까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크리먼인 건 알아채기보다는 위기에 빠졌다는 정도만 예상한 모양이다.

“사월아. 이리 와봐.”

“…….”

“얼른.”

그가 돌연 멀찍이 서 있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손에 쥐고 있는 유리컵에 어느새 물방울이 서렸다.

물방울이 내 손바닥 안으로 타고 들어와 땀에 흥건하게 젖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한결의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은 해.”

한결이 내 두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걱정했잖아. 이번이 몇 번째야.”

“…죄송해요.”

한결의 손바닥이 내 손등을 여리게 감쌌다. 그는 역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모른 척하고 한결이 져 주듯 넘어가 주는 게 우리 관계였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예전엔 따뜻하다고 느꼈던 그의 손이, 유독 높던 유건의 체온과 비교하니 미지근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불쾌한 건 절대 아니지만 비밀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심장 소리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날 사고 때문에 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쭈뼛대며 어색해하고 있는데, 한결이 시선이 손에서 얼굴로 이동했다.

“요즘은 나 때문인가 생각이 들어. 내가 그동안 네가 괜찮다고 하는 말만 믿고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이런 주제가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내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범인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한결과 나 사이의 문제였다.

“네가 언제쯤 말해 줄까 매일 기다리는데. 너는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네.”

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한결이 유건과는 공유하고 있는 비밀을 자신에게도 말해 주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에게만은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고. 유건과의 관계도 한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가 희미해졌다. 여전히 한결에게 내가 크리먼인 걸 들키고 싶지 않지만, 무언가 알맹이가 뒤바뀌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달라진 것이. 내가 가이드로 각성했을 때? 내가 크리먼이 되었을 때? 한결이 내게 마음이 있다고 말했을 때?

아니, 전부 아니다. 우리의 변화는 유건이 우리 사이에 끼어든 후부터 시작됐다. 그 변화의 방향은 처음엔 분명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나는 어릴 적 첫사랑의 향수를 되새기며 기대감이 들었고, 이상과 다른 한결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설레었다.

내가 크리먼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귀었을지도 몰랐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한결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제법 성격도 잘 맞고 그와 있으면 편안했으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했었다.

“내 인내심이 어디까지 닿을까, 사월아.”

이제 나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한결과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이토록 한결에게 내 비밀을 숨기고 싶은 건지. 지금 이 절실한 마음은 뭔지.

“이만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한결은 대답 없는 상대를 두고 이내 체념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의 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들릴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나는 이제 네 일이면 뭐든 해.”

그 말은 내 심장이 바닥에 추락하기에 충분했다.

“그게 세상을 등지는 일이라도.”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과거의 한결이 아니라 현재의 한결이 내게 보인 다짐이었다.

그에게 가장 듣고 싶던 말이지만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내가 지켜온 세상에 선명한 금이 갔다.

***

한결이 가고 나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유건이 찾아왔다. 로비에서 한결이 나가는 걸 보고 왔다며 무슨 대화를 했냐고 물었다.

“그냥… 이안 얘기.”

“그러니까 이안 얘기 뭐?”

“다음에 얘기하자. 나 조금 피곤해.”

유건에게는 게스트 룸에서 자면 된다고 말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한결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혀 떠나지 않았다.

“그게 세상을 등지는 일이라도.”

세상을 등지는 일이라니. 한결이 설마 내가 크리먼인 걸 알게 된 걸까?

그 말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 봐도 뭔가 아는 듯한 말이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내가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크리먼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명확하게 크리먼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게이트가 출현한 세상에서 세상을 등지는 일이 뭐 얼마나 있냔 말이다.

밤새 끙끙 앓다가 내가 지금 예민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르니, 유건에게 의견을 구할까도 싶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만두었다.

한결이 내가 크리먼인 걸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모른 척하는 것. 그러나 그에게 무슨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알고 있다고 해도 밀려오는 압박감은 이겨 낼 수 없었다.

결국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유건과 출근길에 나섰다. 다크서클이 턱 밑을 찍을 듯 내려왔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뇌가 둔해진 느낌이었다.

“구사월. 성규현 에스퍼 바로 만날 거지?”

“어….”

“나도 같이 있어도 돼?”

“아니….”

“왜. 지켜만 볼게.”

“안 돼.”

“너 왜 이렇게 눈이 흐리멍덩해. 잠 잘 못 잤어? 어디 아파?”

“응….”

“어디? 어디 아픈데.”

푸른 잎사귀 사이로 밝은 빛이 내리쬈다. 유건이 발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멍하니 쳐다보자 뺨에 뜨끈한 손이 닿았다. 싱그러운 바람이 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무서워.”

그래. 나는 지금 무서웠다. 유건에게 크리먼인 걸 들키고 잠수를 타다 센터에 갈 때보다 무서웠다.

한결의 눈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어제는 그가 뒤돌아선 채 말해서 어떤 얼굴인지 보지 못했다.

오늘 센터에 가면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그리고 나 또한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유건은 왜 내가 무서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심장 소리가 닿았다. 두근두근 뛰는 그 자그마한 움직임에 깊은 안정감이 들었다.

“넌 어차피 나만 있으면 되잖아.”

“…진짜 아무 말 한다. 너 위로에 소질이 없구나.”

“진심인데.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나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의 헛소리에 웃음이 샜다. 그 말이 아예 말이 안 되는 말이 아니라서 더 어이가 없었다. 유건의 피만 있다면 나는 크리먼이니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에 대한 논점은 한참 벗어났지만,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조금 가셨다. 때때로 유건이 이렇게 가볍게 장난을 걸어 주면 우울함이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좋았다.

“아직도 무서워? 기분 별로야?”

“아니. 좀 괜찮아졌어.”

“내 가슴 물래? 너 심장이랑 가장 가까워서 여기 좋아하잖아.”

“…입 다물어, 제발.”

“쑥스러움 타는 거야?”

“아니야.”

“나 좀 물어 줘.”

“그만해라. 이게 왜 이렇게 점점 능글맞아지지?”

다만 정도를 모르고 방방 뛰니 문제였다. 맨 처음 물렸을 땐 무섭다고 경계하더니, 요새는 못 물려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익숙해진다는 건 유건을 보면 참 무서운 일이었다.

“네가 요새 안 물려서 살 만한가 보다.”

“무슨 소리야. 너 최근에도 나 물었어.”

“언제.”

“너 술 먹고 잠들었을 때. 뭉툭한 이로 얼마나 열심히 깨물던지.”

“…….”

또 그때의 흑역사였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말문이 막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건이 킥킥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사월아. 앞으로는 내 앞에서만 술 마셔.”

“이제 안 마셔.”

귓가에 소곤대는 말이 간지러웠다. 참으려고 하다 보니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사람 물면 이제 질투 날 것 같아.”

날이 어느덧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그의 숨소리가 너무 가까워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런데도 치대는 몸을 밀어내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초여름에 단단히 더위를 먹은 모양이었다.

***

“저 새끼가 여기 어디라고 출근을 해.”

알파 팀 사무실 문을 열자, 놀라운 인물이 있었다. 지한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머리통을 보자마자 유건이 거칠게 말했다. 나는 들어가기 전, 유건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강지한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성규현 에스퍼가 먼저야.”

안 그래도 이안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곤란하던 참이었다. 지한을 통해서 이안과 접선하면 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오늘도 같이 오네.”

우리는 알파 팀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였으면 가장 먼저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을 지한이지만, 그는 무언가 바쁜 일을 하는 것처럼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는 체를 할 정도로 뻔뻔한 건 아닌 모양이지.’

그가 만약 아침 인사를 해 왔다면 나 또한 표정 관리를 못 했을 것 같았다. 다행이라 여기며 오전에 해야 할 업무를 미뤄 두고 회의실을 예약했다. 건너편에 자리한 규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AGS구사월 : A031 회의실이요.」

구구절절한 사설은 하지 않았다. 규현에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나도 가.”

내가 뒤따라가려고 일어나자 유건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소란을 일으켰다간 이목이 쏠릴 것 같고, 유건이 듣는다고 해서 대화 내용이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다 같이 한 공간에 들어왔다.

“역시 백유건 에스퍼도 다 알고 있었나 보네요.”

규현은 따라 들어온 유건을 보고 왠지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캡틴의 가족이면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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