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3/131)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것도 깨달았고, 선을 넘은 적 없다고 여겼는데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사이 한참 전에 넘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너와 내 관계가 이상하단 걸 알았으면 바로잡아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유건은 픽 웃어넘겼다.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려해 볼 생각도 들지 않는 듯이.

“하나만 약속해.”

나는 포기하고 자못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네 인생 버리지 마.”

“무슨 인생까지 논해.”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너 먼저 챙기라고. 나 때문에 네가 가진 것들 저버리는 거 싫어.”

전이라면 내가 오버를 했나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테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제는 유건이 나를 위하는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매번 가볍게 행동하지만 그저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알았다.

내가 말한 유건이 가진 것들은 물질적인 게 아니다. 동료, 친구, 가족, 그의 사회적 입지, 그 밖에 그가 살아오면서 쌓아 온 모든 것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크리먼이란 것이 밝혀졌을 때 나를 외면하라는 말이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쉽게 대답해 주지 않을 줄 알았건만, 유건은 곧바로 수긍했다. 순간 못 알아들은 줄 알고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유건이 바로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너도 하나만 약속해.”

“뭐?”

“내가 선택해야 할 상황 안 만들겠다고.”

“…….”

“대답 안 하지.”

어떻게 대답하는가. 그렇다면 내 질문은 말짱 도루묵인데.

그는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도 약속을 안 지켰으니, 자신도 지키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의 속내가 너무 뻔했다.

“알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잘못으로 비밀이 밝혀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만약 밝혀진다면 타인에 의한 것일 것 같았다.

유건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 종일 껍데기처럼 느껴지던 애매한 미소가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을 때 짓는 미소였다.

그 얼굴을 보니 나까지 마음에 온기가 퍼졌다.

그 후에 유건은 한결이 전화로 전한 정보를 빠짐없이 내게 전했다. 아쿠아리움에서 크리먼의 목격자를 찾았고 세뇌해서 범인이 이안인 걸 알았다는 것. 그리고 원래 이안은 은발에 문신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모두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놀랍진 않았다. 다만 공범이 지한이라는 사실이나, 규현이 내 비밀을 알게 된 것 등. 한결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실수로 말하지 않도록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리고 센터 내부에서 범인이 나왔으니까 경호 단계가 더 올라갈 거야. 센터에서는 내가 계속 옆에 있을 테지만, 기숙사에도 경호 에스퍼가 상주하게 될 거래.”

“그거 선배가 지시한 거야?”

“어. 정확한 건 출근하고 회의하면서 결정하자고 했어.”

“갈수록 태산이네….”

이렇게 되면 흡혈하러 나갈 때도 절차가 까다로운 터였다. 아마 외출이 아예 금지될 수도 있겠지. 외출을 고사하고 출근 외에 기숙사 밖으로 나갈 수 있기나 할까.

한결을 만나면 경호는 최대한 유건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조율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각인 끊는 건 조금 미뤄 두고 당분간 내 피 마시던가.”

“중간에 다시 마시면 더 힘들 거랬어.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참아 보는 게 나아. 오늘 에밀리 집에서 크리처 피 마셨으니까 괜찮겠지.”

“그래, 그럼.”

유건은 약간 아쉬운 것처럼 보였지만 알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기숙사에 도착하고 한결이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잘 다녀와.”

유건이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 주며 말했다. 이건 매번 적응이 안 됐다. 유건이 따뜻한 눈으로 미련 없이 나를 보내주는 게.

“연락할게.”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움직였다. 차 문을 닫고 한결의 앞에 설 때까지 일정하게 이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신경 쓰였다. 유건이 아직 출발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 같았다.

“사월아, 괜찮아?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한결은 나를 보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랐을 텐데도, 꼭 그러쥔 손에서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곤란한 눈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그제야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월아.”

“네, 네.”

자연스레 유건이 타고 간 차의 뒷모습에 시선이 빼앗겼다가 한결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바로 잡았다. 한결은 심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다가 멀어지는 유건의 차를 무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내 다시 태연하게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갈까.”

“네….”

그의 손을 잡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은밀한 얘기를 할 것 같아 카페가 아니라 내 숙소로 이동했다.

한결 앞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분명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있었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번잡함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

숙소를 비운 건 단 며칠뿐인데도 왠지 휑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유독 건조하고 삭막한 분위기였다.

“깨끗하네.”

“차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줄까요?”

“물 줘. 다른 건 됐어. 그리고 이거.”

한결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내 가방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건이 폭주한 줄 알고 급하게 나간 탓에 사무실에 가방을 두고 나갔었다.

“…고마워요. 잠깐 기다려요, 선배.”

나는 고개만 꾸벅이고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가방과 옷가지를 정리하고 거울 앞에 섰다. 제복은 피로 흥건해져 에밀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내 옷으로 갈아입을까 고민하다가 한결이 친구 옷이라는 것을 알아챌 것 같지 않아 머리만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곧바로 주방으로 향해 한결의 물을 챙겨 주고 내 몫의 커피를 내렸다.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가 졸졸 소리를 내며 느리게 떨어졌다. 기다란 컵에 정수기로 얼음을 받고 물과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오늘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일부러 손이 더 가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한결과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이안이 범인이었어.”

한결은 기다리기 힘든 건지 대뜸 말했다.

“백유건한테 대강 얘기 들었어요.”

“이안이랑 특별할 일 없었어?”

“어떤 일요?”

“이안이 A지부 오고 나서 너한테 접근했잖아. 그동안 의심스럽게 행동한 거 없었어?”

“그 사람은 항상 의심스러웠어서….”

나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서서 한결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애매하게 답하자, 한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경호는 더 강화하는 게 좋겠어.”

“그거 말인데요. 이안이 제게 가까이 접근했어도 공격하지 못한 것도 그렇고… 백유건을 의식하는 것 같던데, 걔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아요?”

“이안에게 공범이 있을 수 있어. 이안도 센터 각성자였던 만큼 공범이 아직 센터에 있을지도 모르지. 이중으로 경호하는 게 여러모로 안전해.”

“정신계니까 세뇌시킨 크리먼이겠죠. 세뇌시킨 크리먼은 어떻게든 티가 나요.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어요.”

한결은 내가 범인을 쫓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국현에게 목격자의 세뇌를 부탁했다면 국현을 찾아간 것도 들었을 수도 있겠지. 아니, 그는 팀장이니 내가 국현에게 면담 요청을 보낸 걸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더 이상 범인에 대해서 모른 척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내가 범인이 정신계인 걸 알아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너 그날 무슨 일 있었지.”

한결은 잠시 말이 없다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무척 놀랐지만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친구 아버지 부고가….”

“그거 말고.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며칠째 연락도 두절이고 안색도 창백하고. 그리고 왜 이렇게 침착해?”

“…….”

“이안이 너 공격한 크리먼이었다고. 네 가까이에서 너를 노렸단 말이야. 그 공범이 지금 센터 안에 있을지도 몰라.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그제야 너무 차분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일로 한결이 경호를 강화할까 봐 보인 행동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 듯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습격한 범인과 말을 섞었단 사실만으로 소름이 돋아야 마땅했다.

“아니요, 무섭죠. 하지만 선배가 지켜 줄 거잖아요. 이렇게 찾아왔고. 앞으로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정말 나를 믿어서 이런다고?”

한결의 눈동자가 나를 강렬하게 주시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한동안 눈싸움하듯 서로를 바라봤다. 긴장감에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 때문인지 그가 금방이라도 사납게 다그칠 것 같았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른 이유가 있지 않냐고. 크리먼이 무섭지 않은 게 아니냐고.

“제가 지금 잠을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래요. 저 아무 일 없었어요. 선배가 알아냈으니 이안이 도망간 거잖아요. 무슨 일 나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인 거죠.”

나는 그가 뭔가 알아챈 건지도 모를 거란 불안감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결의 일자로 다물린 입매에 목구멍이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오늘 왜 이러지? 원래 이렇게 추궁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내가 철두철미하게 숨기려고 해도 곁에서 오래 지켜본 한결에게는 어설픈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는 그동안 어물쩍 넘어가려는 나를 모른 척해 줬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심장 박동이 점차 속도를 가하며 싸늘한 예감이 들어찼다. 목에 아무것도 걸고 있지 않은데도 숨통이 조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더 이상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한결이 그런 내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네.”

너무 무서웠다. 그가 나를 쏠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허리춤의 총기에 눈이 갔다. 크리처와 크리먼은 센터에서 개발한, 에스퍼의 파장이 깃든 탄환이 박히면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된다. 그리고 핵에 탄환이 박히면 등급과 관계없이 곧바로 핵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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