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2/131)

“그런 말 안 했어. 아니라고도 안 했지만….”

나는 유건의 말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제 범인도 찾았고, 항생제가 완성됐다는 것도 알아냈어. 내일 센터 가면 성규현 에스퍼한테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너는 내 비밀 몰랐던 걸로 하고 이제 빠져.”

그가 나를 돕는 걸 멈춰야 할 선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 내가 크리먼인 걸 알았을 때.

지금이라면 그는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이 떨어졌다. 창백한 달빛이 유건의 얼굴을 비스듬히 비췄다. 장막처럼 드리운 긴 속눈썹 사이로 선명한 빛을 띤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 그럼 공범으로….”

“상관없어.”

“…….”

“그런 거 신경 안 쓴 지 오래야. 고작 그런 이유로 나 밀어내지 마.”

그게 어떻게 고작일까. 그가 공범임이 밝혀지면 나와 같이 온몸에 탄환이 박히는 처지가 될 텐데.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가 쌓아 왔던 모든 인간관계가 어그러지는 일인데.

크리먼을 숨겨 준다는 건 사상을 의심받다가 끝내 크리먼처럼 외면받는 일이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답답함을 느끼며 말했다.

“백유건. 우리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아?”

유건은 미동 없이 바라봤다.

“네 입으로 말한 거야. 우리 동료라고.”

그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어느새 동료라기엔 한참 벗어나 있었다. 어느 누가 사회에서 만난 동료 때문에 범죄에 가담하는가.

자신을 마음껏 이용하라고 하고, 공격받은 당사자보다 더욱 아픈 얼굴을 하고, 밀어내는 말에 이리도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냔 말이다.

“…넌 내가 이제 진짜 필요 없나 보네.”

유건이 힘없이 읊조리며 내 얼굴에 손을 뻗었다. 얼굴선을 따라 그리다듯 손을 움직이다 뺨을 문지르고, 귀와 턱, 입술까지 차례로 훑어 내렸다.

그 손길에 어쩐지 숨이 막히는 듯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다시 다가오진 않았다.

“우리 이상한 거 처음 느낀 거 아니잖아. 내가 선 넘는 거 그동안 모른 척했잖아. 왜 이제 와서 그 얘길 꺼내?”

그것보다 더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내가 유건을 끊어 내는 것이 그에게는 단물을 쏙 빨아먹고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닌데. 그를 더 이상 내 일에 엮이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우리 관계의 모순에 나 또한 가담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질책하듯 말하는 어조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너도 나 폭주했단 말에 센터 규율이고 뭐고 찾아온 거잖아. 왜 나를 이해 못 해? 네가 나 없는 곳에서 또 그런 꼴로 있을까 봐… 나 진짜 미치겠다고.”

유건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나를 품에 안았다. 옷을 쥔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안고 있어도 사라질 것 같아. 나 너무 무서워, 사월아.”

그의 불안감이 전해져 그를 밀어내야 한다던 다짐이 흔들렸다. 눅눅한 목소리가 안타까워 그의 등을 다독이고 싶었다.

“…폭주하러 가는 거 아니잖아.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도 않아.”

“네가 피 칠갑 한 채로 눈 감고 있는데… 죽을 수 없는 거 아는데도 꼭 죽은 사람 같았단 말이야.”

이렇게 커다란 녀석이 잔뜩 겁에 질린 소동물처럼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내가 네 옆에 없어서… 나는 네가 그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게 왜 네 탓이야.”

“가지 마. 제발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그때 생각하면 지옥 같아.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나는 하루 동안 잠들어 있었다. 내가 쓰러지고 난 후의 유건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불안했는지, 자신의 하나뿐인 가이드를 잃을까 무서웠는지.

“이제 나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하지 마. 항생제 찾았지만 너 아직 인간 된 거 아니고. 이안이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모르고. 너 아직 나 필요해.”

“…….”

“구사월, 대답해. 내가 필요하다고.”

“…….”

“날 이용하겠다고 말해. 제발…. 내가 잘못했어. 제발 나 버리지 마.”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유건은 처절하게 용서를 구했다. 이용해 달라는 말이 이렇게 애절한 말이었던가.

네가 나한테 뭘 잘못해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처럼 구는 걸까.

나는 이 순간 그를 만난 걸 후회했다. 내가 그의 향에 홀리고, 그의 피를 욕망하고, 못내 의지했기 때문에 내 불행이 결국 그에게까지 전염되어 버렸다.

분명 충분히 끊어 낼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히 퍼지는 온기, 만면에 퍼진 미소, 활기를 띤 눈동자가 너무 눈이 부셔서… 모르는 척 미뤄 뒀다. 아직은 괜찮다고 합리화했다.

조금 더 그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 모른 척했다. 내 안일함이 이 녀석을 나와 같은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언제라도 끊어 낼 수 있다고 믿은 건 내 자만이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어.”

촛불처럼 흔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나는 이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 유건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안 버려.”

유건은 그 한마디에 소리 없이 울었다. 목을 꼭 끌어안자 뜨거운 입김과 눈물로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한텐, 네가 필요해.”

이 애를 끌어안고 아득히 깊은 어둠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조차 바닥을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유건의 눈물은 한참을 멎지 못했다.

***

우리는 다음 날 오후에 에밀리 집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약속대로 유건은 내게 휴대폰을 줬고, 이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유건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택시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AES백한결 : 사월아.」

「AES백한결 : 유건이가 너랑 연락 안 된다면서 갑자기 찾으러 갔다던데.」

「AES백한결 : 워치 왜 꺼 놨어.」

「AES백한결 : 사월아.」

「AES백한결 : 구사월.」

「AES백한결 : 제발 연락 좀 해. 무슨 일 있어?」

「AES백한결 : 유건이한테 들었어. 친구 아버님 돌아가셔서 B 지역에 있다며. 친구 잘 다독여주고 너도 마음 잘 추슬러. 센터 오면 바로 연락해.」

「AES백한결 : 몸조심해.」

예상대로 한결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유건이 한결에게 적당히 둘러댔다더니 친구의 아버지 부고 소식 때문에 연락이 안 됐다고 한 것 같았다.

시간 순서대로 도착한 메시지들이 한결이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한결에게 전화해서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너는 근데 어떻게 나 찾았어?”

지금 센터로 돌아간다고 한결에게 답장을 보내며 유건에게 물었다.

유건은 나를 어떻게 찾았을까. 워치 전원이 꺼져서 위치 추적을 할 수 없었을 텐데. 내내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어? …신호가 중간에 잡혔어. 한참 뒤에. 다행이었지.”

“그래? 이안이 그것도 조작한 거라 생각했는데. 일부러 끌어들인 건가.”

이안은 유건이 왔을 때 적당한 타이밍에 왔다고 말했다. 규현 앞에서 유건이 나와 연관돼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미친놈은 남의 불행을 흥밋거리로 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한편으로는 굳이 그런 짓을 할까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안에게는 유건이 위협적일테니.

그러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목 뒤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혹시 나한테 위치 추적 심은 거 아니지?”

이전에 유건이 용의자의 목덜미에 붙여 놓은 위치 추적 기능을 탑재한 도청기가 떠오른 탓이다.

그러나 얇은 솜털만 느껴질 뿐, 도청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건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근하게 귀에 속삭였다.

“심고 싶긴 해. 네가 허락해 준다면.”

“절대 안 돼. 그딴 짓 했단 봐.”

“억울하게 느껴지면 나한테도 심어.”

“싫어. 네 일상생활 하나도 안 궁금해. 근데 ‘나한테도’라니? 진짜 나한테 심었어?”

“나 잘 때도 얌전하게 잔단 말이야.”

“네가 얌전하게 자는지 아닌지 안 궁금하다고.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너 나한테 도청기 심은 적 있지?”

“안 궁금해도 이제 다 알면서. 너랑 잔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쉿. 누가 들으면 오해해.”

아니나 다를까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우리를 힐끔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거뒀지만,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무슨 오해. 사실인데.”

유건 말대로 같이 잔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하다만, 그건 정말 오로지 잠만 잔 것뿐이었다. 유건은 오묘한 미소를 매달고 계속 딴소리를 했다.

확실히 어제보다 많이 밝아진 모습이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건지 뭔지는 모르지만, 평소대로 잘 웃고 잘 떠들었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사이 생각보다 빠르게 A지부에 가까워졌다. 정문 안으로는 택시가 들어올 수 없어서 내린 다음 군용 차량에 갈아탔다. 기숙사까지는 꽤 먼 거리를 들어가야 했다.

한결에게 거의 다 도착했다고 말하니, 기숙사 앞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유건이 잘 둘러댔다고 해도 어차피 얼굴을 한번 보고 대화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잠깐 기다리라고 답장했다.

“바로 형 만나러 갈 거야?”

“어.”

내가 휴대폰을 내내 주시하자 유건이 운전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끝나고 연락해.”

“왜?”

“같이 잘 거니까.”

왜 이렇게 아까부터 낯 뜨겁게 말하는 건지. 나는 결국 눈을 흘기며 유건의 팔을 찰싹 때렸다.

“작작 해라.”

“당분간만. 당분간만 같이 지내자는 거야. 센터 안이 안전하지 않다는 거 알았잖아.”

진짜 같이 지내자는 거였다니….

사실 유건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범인 둘이 센터 각성자였다. 처음 범인을 쫓을 땐, 센터 사람일 확률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유건과 같이 지내는 건 껄끄럽게 느껴졌다. 딱히 내외하는 건 아니지만, 유건의 향은 너무 달콤하고…. 나는 참기 힘들고… 그리고….

“나도 너한테 그 이상으로 부담 주는 짓 안 해. 불편한 짓 안 할게.”

내가 고민이 길어지자 유건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근데 이제 가이딩 때문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러게 왜 그 말을 꺼냈어.”

어젯밤 우리 둘 다 얄팍한 연극을 하고 있단 걸 인정했다. 유건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어딘지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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