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1/131)

유건은 내 얘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을 감기 전, 그가 울먹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이틀이 지났다던데, 조금 전까지도 눈물을 쏟아 낸 사람처럼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그런데 이안이 항생제를 가지고 있었어. 현장에 있던 크리먼 입에 들이부으니까 곧바로 사람이 됐어.”

“뭐라고?”

“정말? 확실해?”

에밀리와 유건이 나란히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어.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어. 그래서 자기를 다시 만나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는데…. 내 휴대폰 어딨어?”

이안이 이전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했지만, 그건 단지 변명이었을 것이다. 이안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 그것밖에 없으니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화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휴대폰 줘. 이안한테 연락해야 할 것 아니야.”

“미쳤어?”

유건이 심각한 표정을 하며 다그쳤다. 걱정을 넘어서 화가 나 보였다. 내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에밀리가 우리 사이를 중재했다.

“일단 사월아. 피곤하니까 쉬어. 지금은 몸이 더 중요하니까.”

“야, 구사월. 너 그런 짓을 당했으면서 이안한테 다시 가겠단 말이 나와?”

“유건아. 나가자, 나가. 사월아. 아직 몸 불편할 테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배고플 테니까 밥 차려 줄게. 부르면 나와.”

에밀리가 유건을 질질 끌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문 너머로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쟤 지금 이안한테 간다는 거지?”

“사월이 아프잖아. 조금만 참아.”

내가 그렇게 못 할 말을 한 건가. 그는 항생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가 원하는 건 내 피를 마셔서 불사가 되는 것일 테니, 이까짓 피 좀 줘 버리면 어떠냔 말이다.

어차피 나는 죽지 않는 몸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는 것, 혹은 인간이 되는 것. 그게 내가 지금까지 간절히 바라온 일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피도 주지 않고, 가이드 습격 사건의 벌을 받게 하며 항생제만 얻어내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크리먼인 걸 숨겨야 하기에 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유건을 데려가서 녀석을 잡으려 한다면, 이안이 영영 자취를 감출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이안은 유건이 오자마자 물러났다.

그는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은 피했다. 이안은 수많은 크리먼이 있더라도, 유건의 염력이면 상대가 안 되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경계심이 많은 녀석은 차라리 나 혼자 접선해서 피를 주다가 항생제의 위치를 알아내 훔치는 게 나았다.

이안이 내 피를 조건으로 항생제를 준다고 약속해도 그 능구렁이 같은 녀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유건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저렇게 화내는 것은 알지만, 나로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고려해 봄 직한 일이다.

이안이 규현을 인질로 삼아 나를 고문한 것은 나 혼자 있으면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크리먼이 있다고 해도 나보다는 등급이 낮을 것이고 내 몸은 독도 약물도 통하지 않을 테니.

충분히 대비해 놓고 만난다면 피만 내주고 항생제를 얻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에밀리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닭가슴살이 들어간 미역국을 했다고 말했다.

부엌으로 가서 사각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건너편에 앉은 유건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어쩌라는 식으로 같이 노려봤다.

밥을 먹는 내내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에밀리는 눈치를 보다가 그릇에 바닥이 보일 때쯤 우리 사이를 끼어들었다.

“사월아. 내일 일요일이니까 하루 더 쉬다가 가. 혹시 몸이 아플지도 모르잖아. 방금 왔다 간 친구 집이 이 근처거든.”

“아니야. 더 이상 폐 끼치기도 싫어. 밥 먹고 돌아갈래.”

“폐 아닌데…. 그러지 말고 하루 더 있다가 가.”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재차 권유했다. 이틀이 지났다면 오늘이 바로 국현이 목격자의 세뇌를 마치는 날이었다. 아직 낮이어서 이를지도 모르지만,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범인이 이안인 걸 한결이 알았다면, 바로 내게 연락을 해 올 테니.

“나 이제 휴대폰 줘.”

에밀리는 곤란하단 눈으로 유건을 힐끗 바라봤다. 아무래도 유건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유건. 내놔.”

유건이 대답 대신 숟가락을 소리 나게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곤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어 먹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야. 선배한테 연락 올….”

“한결 형한테 내 휴대폰으로 연락 받았어. 이안이 범인인 거 알아냈다고. 숙소도, 따로 사는 집도 감쪽같이 사라졌대. 내가 너랑 있다고 말했고 적당히 둘러댔으니까 내일까지 여기 있어.”

내가 연락이 안 되니 유건에게 연락을 취한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초조해졌다.

이안과 있었던 일과 규현을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한결이 내 비밀이 알아챌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니까 내가 전화해서….”

“제발 오늘 하루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있자고!”

유건이 살짝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에는 흥분이 묻어났지만, 왠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말문이 막혀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내 유건이 얕게 한숨을 쉬더니 체념하듯 말했다.

“화내서 미안해. 내일은 휴대폰 줄게. 오늘만 쉬다가 가자.”

유건이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공간을 메웠다. 나는 아직 밥이 남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 잘 먹었어.”

그대로 게스트 룸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왜 유건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

밥을 먹고 방에 들어가 차분히 기억을 되새겨 봤다. 이안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내가 크리먼인 걸 안 규현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그리고… 희미한 기억 틈에서 지한의 눈이 깊게 침잠한 채,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한 것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분명 폭주한 크리먼을 조종한 건 지한이 맞는데. 기억이 잘못됐나?

오랫동안 고민에 빠지는데 어쩐지 무기력감이 밀려오며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에밀리 친구가 신경 안정제를 주사했다고 한 게 생각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생각에 잠기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새벽 달빛이 어스름하게 창을 비추고 들어왔다. 동시에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달콤한 향을 맡자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며 갈증을 부추겼다. 유건이 양팔로 내 몸을 가두고선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뭐야….”

“각인된 대상이랑 붙어 있으면 안정에 도움 된다고 그래서.”

뒤척이며 뒤돌아보자 유건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에밀리 친구가 가기 전에 유건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내게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갈증이 심해질 거라고만 했지.’

“사실 내가 불안해서….”

유건은 내 몸을 더욱 깊게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고요한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울림뿐인데도 젖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주의를 기울이는데 유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이 축축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구사월…. 이안한테 안 가면 안 돼?”

“…….”

유건은 내내 화난 것처럼 굴더니, 어느새 많이 누그러들어 있었다. 밤중에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원하는 건 뻔하잖아. 네 피를 달라고 할 거야. 그 과정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가이드 수십 명을 살해한 녀석이야. 이번 일까지 연관 지어서 센터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유건은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냈다. 내가 자는 동안 나를 설득할 말을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안쓰럽다고 그의 말을 들어줄 순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이안이 센터에 잡히면 내가 크리먼인 걸 함구할 것 같아?”

“너는 이안이 가지고 있는 항생제로 치료하면….”

“그동안 크리먼인 걸 숨기고 센터에 복무한 건 안 변해. 내 죄를 감해 줄지 장담 못 한다고. 그리고 센터에서 이안을 잡으면 내가 인간이 되더라도 크리먼이었단 사실이 다 퍼질 텐데. 내가 지금처럼 가이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모든 국민이 크리처와 크리먼을 적대하고 악이라고 생각하지만, 특히 센터 각성자들은 더 심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게이트에 들어가고, 크리처와 싸우는 것이 업인 사람들이니까.

내가 인간이 되더라도, 그들은 나를 은근히 깔보고 무시할 것이다. 불길한 것을 대하듯 바라보고, 괴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이것도 센터에서 내게 죄를 묻지 않을 때, 즉 희망적인 경우였다. 원래라면 크리먼인 걸 숨겼단 사실만으로 처형이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세우며 대화를 끊어 내듯 말했다.

“충분히 대비하고 만나면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나 유건은 내가 돌아서게 두지 않았다. 정면으로 마주 본 얼굴에서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인간이 돼야 하니까.”

“그 변태 자식 손에 넘겨 주기 싫다고. 내가 그날 얼마나….”

유건은 그날 일이 떠오르는지 숨을 삼키듯 말을 줄였다. 한순간에 불안정해진 파장에서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느껴졌다.

그의 감정을 일부만 느끼는 것일 텐데도 내 숨이 막힐 정도였다. 유건이 감정을 누르듯 깊게 심호흡했다.

눈을 감기 전, 유건의 얼룩진 얼굴이 뇌리에 박혀 선명하게 그려졌다. 울음을 삼키려 하지만 터져 버린 감정의 홍수는 보는 사람까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애잔했다.

매일같이 웃음기를 달고 살던 녀석인데 내가 울려 버린 것 같아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미처 빠트린 것이 떠올랐다.

“성규현 에스퍼한테 내가 크리먼인 거 원래 알았다고 말한 건 아니지?”

그에게 몸을 떨어뜨리고 두 눈을 바라봤다. 유건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규현에게 다음에 얘기하자고 말했다고 했다.

오자마자 실시간으로 상처가 아물고 있는 나를 끌어안고 울먹였으니, 내가 크리먼인 걸 처음 안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유건이 나와 페어를 했었고, 쭉 경호 임무를 맡으며 곁에 있었기에 내 정체를 숨겨 줬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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