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79/131)

“윽… 흐으.”

연이어 사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고통을 참는 듯한 신음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흐느낌에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들떴던 마음이 다른 이유로 심장 박동을 높이며 시야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제길!”

“백유건! 어디 가!”

유건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곧바로 위치 추적을 켜 위치를 확인했다.

사월의 위치를 나타내는 빨간 점이 보였다.

게이트가 이미 파훼된 곳으로, 게이트가 생성될 때 퍼지는 불균형 파장 때문에 침식이 일어나 제한 구역이 된 곳이었다. 억눌린 신음이 귀에 들릴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이 고막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상처 입은 부위가 계속해서 할퀴어지는 것처럼 혹독한 열기가 정신을 잠식했다.

***

양팔에 수십 마리의 크리먼이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옷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거리고, 크리먼의 체액인지 내 피인지 모를 액체들이 끈적하게 뒤엉켰다.

“소리 좀 내 봐요. 예쁜 목소리 좀 들어 보게.”

“…….”

이안은 크리먼 사체 무더기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이 나른하다.

처음엔 내내 흥미로운 눈길이더니, 이내 반복되는 상황에 지루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독할 줄은 알았지만 약간 미련해 보일 정도네.”

“…….”

“안 아파요?”

“…….”

“혹시 알아요? 제가 고통에 절규하는 구사월 가이드의 목소리를 듣고 연민이 생겨서 봐줄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크흑.”

크리먼의 꼬리가 채찍처럼 등허리를 내려치고 지나갔다. 피가 터지는 감각과 다시 살이 이어 붙는 느낌이 선명하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악다문 이 사이로 짭짤한 맛이 났다. 입 안까지 핏물이 흥건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할 만큼 했으면 끝내.”

“뭘 끝내. 이제 시작인데.”

“컥…!”

심장에 송곳 같은 손톱이 박혀 들었다. 연속해서 찔러오는 공격에 목구멍으로 토악질이 나왔다.

아무리 참으려 해 봐도 생리적인 기침은 참을 수 없었다. 터질 듯 차오르는 안압에 눈알이 뽑힐 것 같았다. 집중적으로 이가 박혀 들어오는 혈관이 부르트다 못해 짓이겨졌다.

이런 고통 속에도 계속해서 재생시키는 몸뚱어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주인은 진즉 포기했는데 왜 제멋대로 살려내는지.

인생에 종료 버튼이 있다면 수백 번이고 눌렀을 것이다. 계속되는 통각에 정신이 조각나는 것 같다 느낄 때쯤이었다.

“진짜 핵이 생기지 않네요. 이 정도 상처 입으면 다른 가이드들은 핵이 조금씩 커지기도 하던데. 여전히 몸 안이 깨끗해.”

섬뜩한 금안이 세밀하게 내 몸을 스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몸 안까지 투영 당하는 느낌은 유쾌하지 않았다.

“혹시 투시로만 안 보이는 거 아닐까?”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자, 이안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느릿하게 다가왔다.

“손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하나….”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안은 허리를 숙여 조금 전 공격으로 뚫려 재생되고 있는 뱃가죽을 잠잠한 눈길로 바라봤다.

서늘한 온도의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갔다. 연약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섬세한 손길이었다.

상처의 가장자리를 더듬는 엄지손가락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가락이 사정없이 파고들 것 같아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내려다보는데, 이안의 눈과 마주쳤다. 내 긴장감을 알아챈 것처럼 얄궂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이에요. 제 손이 더러워지는 건 싫거든요.”

이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백하게 손길을 뗐다.

“여기는 장비도 없고.”

덧붙인 말은 장비가 갖춰지면 못 할 짓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매번 가이드를 납치하고 크리먼을 만들어서 피를 흡혈했을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나는 끊임없이 몸에 상처를 입고 재생되기를 반복하며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만약 이안의 ‘검증’이 끝난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

다른 가이드처럼 납치당해서 진짜 실험대에 올라가게 될까? 아니면, 검증은 끝났으니 강제적으로 흡혈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규현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 어울려 주는 것뿐이지, 혼자라면 잡혀도 탈출을 계획할 수 있었다.

나는 A급 크리먼이자, S급 가이드이다. B급 지능계 크리먼인 이안이 쉽게 당해 낼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도 굳이 규현을 현장에 오게 내버려 둔 것이겠지.

이안은 처음에 규현이 오는 것이 자신도 마땅찮은 듯이 말했지만, 정말 거슬렸다면 그를 어떻게든 못 오게 했을 것이다.

센터 워치의 메시지까지 조작하는 녀석이 그것 하나 생각하지 못할까.

“이런 능력이 있으면서 왜 그렇게 살아요? 그냥 크리먼으로 살면 편하잖아요.”

이안은 돌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같은 괴물이랑 똑같은 취급하지 마.”

내 몸을 훑어보던 이안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언제봐도 기분 나쁜 미소였다.

“진짜 재밌는 거 있죠. 이렇게 완벽한 크리먼인 주제에 아직도 고고한 S급 가이드인 척하는 게.”

대놓고 빈정대는 말은 그동안 이안이 나를 보며 느낀 감상평이었다.

“그 간극이 나는 재밌더라. 신도 참 무심하시지. 어쩌다 크리먼이 됐어요?”

“너… 연구소 사람이 아니야?”

범인은 사라진 연구원이자, 정신계라고 했다. 사라진 연구원은 당연히 이안이고, 정신계 크리먼은 지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마치 내가 어떻게 크리먼이 됐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사라진 연구원이라면 지하 연구소에서 내게 공격당해서 크리먼이 됐을지도 모를 일인데.

“글쎄요.”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애매하게 여지를 남겨 두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구사월 가이드는 항생제 찾죠? 그래서 나를 쫓았을 테고. 제게 없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이안이 지한에게 손짓하자, 크리먼들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있어야 할 거야…. 네가 나를 오늘만 보고 말 게 아니라면.”

내심 이안이 우리에게 정체를 밝혀서 이대로 사라지면 어쩌나 노파심이 들었다. 그는 어쨌든 이제 센터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

내가 온갖 고문을 당하며 피를 뺏기는 것보다, 간신히 찾은 항생제의 실마리를 잃는 것이 더 두려웠다.

만약 이안에게 항생제가 없다면, 이후에 그를 만날 이유도, 쫓을 이유도 없었다.

“그거참 설레는 말이네요. 있으면 만나 준다는 말이잖아요.”

혹시 그가 항생제를 완성하지 않았을까 봐 불안감이 들고 있는데, 그가 확답에 가까운 말을 했다.

“봐요, 당신이 원하는 거.”

이안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원형 플라스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노란색 형광 액체가 잘게 흔들렸다.

“케렉, 켁!”

이안이 내 팔을 붙잡고 있는 크리먼의 입에 그 액체를 흘려보냈다. 크리먼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으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릎을 꿇었다.

크리먼의 입에서 위액인지 모를 끈적한 액체가 줄줄 흘렀다. 몸이 형광빛으로 발광하더니 핏줄이 눈에 보일 정도로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푸는 움직임에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

크리먼의 꼬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발톱이 뭉툭하게 변하고, 갑각류의 등딱지처럼 단단해 보이던 등이 말랑한 살결로 변했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들어가며 얇은 입술로 변했다.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한 폭주한 크리먼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먼지와 체액에 얼굴이 거뭇했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딱딱한 핵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심장이 있는 사람.

“어때요. 저랑 만나실래요?”

이안이 자못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처럼 상냥하게 물었다. 그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에 액체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목울대를 꿀꺽이며 그 플라스크에 눈을 떼지 못하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바닥에 쏟아부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항생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구사월!”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안개 너머로 오토바이 모터 소리와 흐릿한 인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구사월 가이드의 멍멍이가 적당한 타이밍에 왔네요. 저도 이 정도면 됐거든요.”

이안은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다시 안경을 쓰고, 이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는 듯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그는 안개 너머로 멀어져 갔다. 지한 또한 사라졌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이 사라지자 내 사지를 결박하고 있던 크리먼들의 힘이 풀렸다. 그들은 주인을 따라가는 동물처럼 허겁지겁 장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구사월!”

“너 여기 어떻게….”

유건이 오토바이에서 몸을 던지듯이 내리고선, 바닥에 쓰러진 나를 품에 안았다. 크리먼의 서릿발처럼 낮은 온도가 아니라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너 이게 대체…. 어떡… 어떡해….”

유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피에 물든 내 몸을 더듬자 그의 손이 나와 같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눈 안 가득 고인 액체가 금세 그의 속눈썹을 흠뻑 적셨다.

유건이 폭주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고통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 안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없었다.

그의 덜덜 떨리는 입술이 안타까워 시선이 멍울졌다. 손을 뻗어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팔에 물이 찬 것처럼 무거웠다.

“나 너무 졸려.”

“안 돼. 죽지 마!”

“안 죽어….”

이 녀석은 아직도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조금 전까지는 죽을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죽고 싶었는데, 그 한마디에 살아 있어서 다행인가 허탈한 웃음이 샜다.

“잘래.”

결국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흐느낌 소리는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안 울면 좋겠는데. 그렇게 울 일 아닌데. 나 안 죽는데…. 근데 얘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끝내 그를 다독이지도 못하고 소리가 멀어져 갔다. 뺨에 떨어진 뜨거운 방울이 살갗에 깊이 스며들었다.

***

기억이란 것은 참 신기했다. 그 당시엔 주변에 뭐가 있었는지, 무슨 향기가 났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그날의 배경과 분위기만 떠올랐다.

사방이 온통 하얗고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형광등과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나는 곳. 연구소는 내게는 일상적이다 못해 지루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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