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8/131)

“끄아악!”

규현을 붙잡고 있던 크리먼이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규현을 도와주러 방향을 틀자, 다른 크리먼들이 길목을 막았다.

“크윽!”

내가 다른 크리먼들과 싸우고, 행동이 격해질수록 규현을 향한 공격 또한 그 세기가 강해졌다. 나는 점점 행동이 굼떠지다가 결국엔 멈춰 섰다.

“그래요.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돼요?”

이안이 바짝 얼어붙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느긋하게 웃었다.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대하는 것처럼 해사한 미소였다. 당장 저 녀석의 재수 없는 입꼬리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규현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분노로 이를 갈고 있는데 다른 크리먼들이 규현을 잡은 것처럼 내 사지를 결박했다.

“……!”

이안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서늘한 손마디가 내 턱을 톡 건드렸다. 그의 눈동자에 섬뜩한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자기 손에 떨어졌다는 듯이 징그러울 정도로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금방 끝날 겁니다.”

그의 가는 손가락이 실험체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에서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크리먼이라 싸우느라 긁힌 상처를 건드려 내가 움찔 떨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안 죽잖아요.”

허탈한 웃음이 샜다. 얼마 전 꿨던 꿈은 그저 악몽이 아니었다. 그를 피하라는 무의식의 마지막 경고였다. 크리먼으로서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

유건은 게이트를 마치고 현장에서 소독과 샤워를 마쳤다. 원래 현장 소독실과 샤워실은 환경이 열악해 사용하지 않지만, 오늘은 할 일이 많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떤 거 찾으세요?”

“아… 저, 그러니까…. 성인 여자가 쓸 만한 액세서리요.”

“나이대가 어떻게 되세요?”

“제 또래요. 스물세 살.”

“혹시 선물 받는 분이 가이드이신가요?”

주얼리 숍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유건에게 다가왔다. 그 뒤로 다른 직원들이 유건을 보고 수군거렸다.

“저 사람 각성자 아니야?”

“최근에 각성한 S급 에스퍼잖아. 백유건.”

“너무 잘생겼다. 무슨 연예인 같네.”

“여자 친구 거 사러 왔나? 아니면 가이드 선물?”

그들은 먼발치에서 보며 이런저런 추측을 했다. 유건 나름대로 전투의 흔적은 모두 지운다고 했지만, 전투복을 입고 있었기에 그가 각성자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군거리는 것은 서로 응대하겠다며 다투다가 결국 매니저에게 순서를 빼앗긴 탓이다. 그중 한 직원이 매니저의 신호에 창고로 들어가 자그마한 액세서리 함을 가져왔다.

“매니저님. 여기요.”

직원은 매니저에게 벨벳 재질로 된 액세서리 함을 건네며 가까이에서 유건을 훔쳐보곤 자리로 돌아갔다. 매니저는 상자를 열어 유건에게 보여 줬다.

“등급 높은 크리처 피와 특수 물질을 결합해 만든 보석입니다. 독성을 전부 추출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고, 빛깔 또한 아름답죠. 최근에 가이드 고객님들께서 가장 많이 찾으시는 제품입니다.”

그 안에는 석류알처럼 투명하고 붉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리처 피를 마시면 가이딩 효율이 높아진다는 가이드 사이의 소문이 여기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각성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 빠르게 새로운 보석을 개발한 것이다. 게이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다른 보석들보다 높은 가격대를 자랑했다.

그런데 2차 가공까지 진행하니 웬만한 차 한 대값은 하는 것 같았다.

‘근데 그 소문은 뜬 소문인 것 같던데. 구사월이 가이딩 효율까지 생각하며 액세서리를 할 것 같지도 않고….’

유건은 가격은 차치하더라도 사월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돌연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거 다른 사람 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네?”

“에스퍼 피도 돼요?”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유건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매니저는 유건의 안 되도 된다고 말하라는 듯한 맹렬한 기세에 잘 알아보지 않고 홀린 듯이 답했다.

“어… 아마 될 겁니다. 혹시 본인 피로 만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매니저는 처음 겪는 상황에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보석을 다각도에서 살펴보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유독 붉은색을 띠는 사월의 입술과 잘 어울렸다. 다른 보석과 다르게 투박한 컷팅은 사월이 그토록 원하던 크리처의 핵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이거로 주문할게요. 목걸이로요.”

“근데 주문 제작을 하면 가격대가 더 올라가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책정해서 알려 주세요.”

사월이 잠결에 유건의 살을 씹을 때마다 오른쪽 가슴이었다. 아마 심장이 피의 흐름이 가장 빠른 탓일 터였다. 그래서 심장과 가장 가까운 목걸이로 정했다. 정하고 나니 가격도 낮은 편이 아니고 의미도 있어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았다.

“채혈해야 하죠?”

유건은 당장 피를 뽑아 달라는 듯 팔을 걷어붙였다. 매니저는 그제야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오랜 통화 끝에 유건에게 3일 후에 다시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가 없다 보니 절차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사월의 생일까지는 시일이 많이 남았다. 미리 와서 살펴본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유건은 들어올 때의 근심 가득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방글방글 웃으며 주얼리 숍을 떠났다. 그가 완전히 빠져나가자, 매니저에게 다른 직원들이 몰려왔다.

“매니저님. 왜 그래요? 별로래요?”

“아니….”

“왜요? 무슨 얘기 했는데요? 어디에 전화 건 거예요?”

“본사에… 자기 피로 해 달래.”

“네?”

“자기 피로 보석 만들어 달래.”

그 말을 들은 직원들 또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표정이었다. 매니저는 일단 대어를 낚은 기분에 허겁지겁 본사에 연락해서 허락을 얻어 냈지만, 이 상황이 얼떨떨했다.

“에스퍼들이 가이드들한테 집착이 심해지면 자기 피를 소유하게 하고 싶어지기도 하나?”

“음. 글쎄요.”

소비자가 말하지 않아도 니즈를 알아채는 건 쥬얼리 샵 매니저에게 바라는 덕목 중 하나였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라면 받는 사람의 니즈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에도 사러 올 것이고 환불이라는 최악의 경우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에 누구보다 자부심이 있는 매니저는 뭔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소름 끼칠 것 같은데.”

“일반인들이 뭘 알겠어요.”

“맞아요. 매니저님,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하여튼 각성자들 참 별나.”

“그러게.”

매니저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의문점에 유건이 가고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본사에 주문 제작 요청을 넣으며 에스퍼들에게 이런 수요가 있으니 다음 달 신상 라인은 주문 제작으로 가도 될 것 같다며 덧붙였다.

정말 특이했다. 멀쩡하게 생겨서 왜 저런 짓을…. 더불어 유건에게 받은 연락처로 주문 제작은 환불이 어렵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에게선 흔쾌히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

***

유건은 주얼리 숍에 들렀다가 바로 센터로 향했다. 어차피 각인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으니, 이제부터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다.

여러 지부를 오간 한솔이 말하길, C지부 근처에 A지부 앞에 있는 초콜릿 가게 2호점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는 초콜릿이 아니라 갖가지 빵 종류를 판매한다고 했다. 초콜릿만 먹으면 물릴 수도 있으니까 다른 식품도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2층은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도 마련돼 있다고 했다. 그녀를 직접 데리고 가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와도 되리라.

피를 흡혈하러 가는 것과 용의자를 쫓는 것 말고 다른 용건으로 사월과 외곽으로 나간 경험은 없었다.

사월과 적당한 거리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는 것이 기뻤다. 유건은 오늘따라 들뜬 기분으로 속도를 높였다. 앞으로는 왠지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끝났어? C급 게이트 안 갔나 보네?”

“구사월은?”

알파 팀 사무실 입구 쪽에 앉은 지수가 가장 먼저 유건을 맞았다. 유건도 한결처럼 C급 게이트에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가 봐야 거의 끝마무리였고, 딱히 급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센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게이트와 구사월에 대한 관심이 5:5로 균등하게 나뉘었었지만, 한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금 유건은 게이트보다 사월과 C지부 베이커리에 가는 것이 중요했다. 분명 가자고 하면 처음에는 놀리는 거냐며 눈을 흘기겠지만, 이윽고 못 이기는 척 가방을 챙겨서 나올 것이다.

유건의 피와 비슷한 맛의 디저트를 먹으며 피를 못 마시는 건 아쉽지만 꾸역꾸역 참아 내는 사월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나가서 쉬고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광장에 없었어?”

“어.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사실 유건은 게이트에 출전하기 전, 사월의 목덜미에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도청기를 붙여 놨다. 어젯밤 용의자에게 붙인 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사월이 알아채면 진저리를 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혼자 있다면 그렇게 걱정되지 않았을 텐데, 하필 경호로 붙은 에스퍼 둘 다 미심쩍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B 지역 방출 게이트 당시 알파 팀 소속 에스퍼였기 때문에 사라진 연구원일 리 없어 용의자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그는 C급 정신계였다.

용의자가 정신계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규현은 한결과는 꽤 오래 합을 맞춘 걸 알아도, 다른 팀원들과는 소통하고 지내지 않기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얼굴은 순해 보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기에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이트를 파훼하고 오는 길에 도청기를 들었을 때는 그들은 한가롭게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괜한 우려를 한 것 같아 안심하고 다른 용무도 보고 돌아왔는데 사월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화를 걸자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지한과 규현 차례로 전화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유건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쪽 귀에 꽂힌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도청기를 연결했다. 얼마간 정적 후 사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 윽…. 흣.

그런데 이상하다. 얕은 흐느낌만 있을 뿐 아무런 대화도 하고 있지 않았다. 숨도 거칠고 주변이 묘하게 고요했다.

- 크르릉, 키엑!

그러다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리처 혹은 크리먼의 목을 긁으며 내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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