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7/131)

“…….”

“그리고… 미안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

규현의 시선이 못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규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라 신호를 주었다. 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다시 원위치를 찾아갔다.

손을 거두면서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목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잠깐의 접촉으로도 붉은 생채기를 남겼다.

“지금은 좀 바빠서 놀랄 시간이 없거든요. 일단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나는 죽지 않겠지만. 내가 중얼거리며 말을 덧붙인 말에 규현이 침을 잘못 삼켰는지 몸을 들썩이며 크게 기침했다.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더 놀랄 것 같아서 애잔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켈록, 켁록. 켁. 구… 사월 가이드….”

“어느 정도 해치우면 도망가세요. 육체계니 달리기 빠르시죠?”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구사월 가이드를 두고 도망갈 순 없습니다. 저는 구사월 가이드의 경호 에스퍼입니다.”

“제가 아직도 그냥 가이드처럼 보이세요?”

“…….”

우리 앞의 크리먼은 수십 마리였다. B급 육체계 에스퍼와 A급 육체계 크리먼인 내가 있지만, 어디까지 버텨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어차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인 데다가 저들에게 쓸모가 있었지만 규현까지 살려 둘 가능성은 희박했다.

‘규현은 세뇌도 통하지 않으니, 이안과 지한의 정체를 숨기려면 없애겠지.’

아무리 에스퍼라도 재생될 틈도 없이 급소를 계속해서 공격당하면 죽는다. 이렇게 많은 수의 크리먼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지키겠습니다. 구사월 가이드가 가이드이든… 크리먼이든.”

어딘지 결연한 목소리 끝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떨림이 묻어났다. 규현은 주머니에서 장갑과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진 너클을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본격적으로 싸움에 돌입할 생각 같았다.

“캡틴과 약속했으니까요.”

이유 또한 확고했다. 어렴풋이 한결이 왜 내게 규현을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규현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경호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의 우직함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알아서 하세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폭주한 크리먼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형태는 다양했다.

상체만 인간화된 것도 있고, 손이 발인 양 물구나무를 서며 거꾸로 다가오는 것들. 머리가 두 개인 것도 있었다.

일반 크리처도 동물과 곤충, 갖가지 생물체가 뒤섞여 불쾌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폭주한 크리먼은 더했다.

우리 눈에 익숙한 인간의 형태가 뒤틀리니 훨씬 보기 역겨웠다. 나는 눈매를 좁히며 손가락 끝에 힘을 줬다.

원래도 날카롭던 손톱이 더욱 길게 모습을 드러내며, 첨예하게 갈아 둔 단도처럼 서슬 퍼런 빛을 띠었다.

흑백으로 변한 세상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단 하나의 목표물. 그를 찾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 안에 유일한 색채를 가진 새빨간 핵이 저 좀 잡아 보라는 듯 이리저리 춤을 췄다.

이를 과녁 삼아 집중하자 목 안쪽이 뻐근해지며 혈류의 속도가 빨라졌다. 크리먼들 사이로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두려움을 느껴야 하건만, 내심 드디어 찾았다는 희열감이 찾아왔다.

‘저 녀석만 잡으면 된다.’

나도 그를 찾고 있었다. 범인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제삼자가 말려든 건 최악이지만, 이안은 내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를 잡아서 항생제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 생각까지 다다르자, 몸 안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캬아악!”

크리먼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할퀴고 들었으며, 강한 산성 성분을 가진 크리먼들은 거침없이 체액을 뿜어냈다.

피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산성 때문에 살갗이 부식됐다.

“읏….”

“구사월 가이드. 괜찮으십니까?”

내 뒤에서 싸우던 규현이 소리쳤다. 그의 손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괜찮았다. 규현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내 손을 바라보더니 레그 홀스터에서 무언가 꺼내 내게 던졌다.

“받으십시오.”

팽글팽글 돌아 손에 안착한 것은 단도였다. 손에 쥐자 무기를 사용해서 싸운 적이 없어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맨손으로 싸운다면 계속해서 부식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크리먼들 사이를 누비며 핵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크리먼의 살들이 뭉텅뭉텅 썰려 나갔다. 한 크리먼의 심장을 단도로 찌르자, 반대쪽 손이 붙잡혔다. 그때 다른 크리먼이 달려왔다.

원래는 폭주한 크리먼이나 크리처는 이성이 없어 공격이 1차원적이고 단순하다. 그러나 지한의 세뇌 덕분인지 그들이 연계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크리먼이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틀어 상대의 목을 강하게 물어뜯었다.

“키엑!”

크리먼이 고통 속에 절규했다. 그러나 홀린 것처럼 다시 다가와 나를 따라 하듯 내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크윽.”

심장에 꽂혀 있던 단도를 빼내 크리먼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온몸에 질척하고 역겨운 비린내가 진동했다.

두개골에 칼이 깊게 박혀 좀처럼 빼내지 못하고 있는데, 크리먼 하나가 내게 입을 벌리며 돌진했다. 성인 남성도 거뜬히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치가 턱과 이빨에 집중됐는지, 다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어설프게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꿰뚫어 버릴 듯한 송곳 같은 이빨은 실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몸을 낮추며 정면으로 돌격했다. 크리먼의 입이 내 머리를 삼킬 것처럼 다가왔지만, 스스로 먹히길 바라는 사람처럼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키익, 켁….”

크리먼의 식도 안으로 팔을 집어넣어 단번에 붉은 핵을 쥐었다. 크리먼의 목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하더니, 일순 잔뜩 쪼그라들며 내 팔을 근육으로 압박했다.

“끄윽.”

마지막으로 살기 위한 본능적인 발악이었다. 나는 그대로 암석을 깨뜨리지 않고 뽑아냈다.

암석에 붙어 있던 핏줄이 얼기설기 엮여 나왔다. 마치 제 심장을 빼앗긴 것처럼 크리먼이 애절하게 손을 뻗었다.

“돌려줘?”

크리먼의 턱이 잘게 경련했다. 다른 크리먼들이 나를 덮친 크리먼을 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들의 핵을 확인하는 것처럼 몸을 더듬었다.

나는 그들을 주시하며 보란 듯이 암석을 깨부쉈다. 반짝이는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생명을 쥐어뜯긴 크리먼은 이내 눈알을 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쿵….

매캐한 안개와 먼지 때문에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자, 쓰러진 크리먼의 피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손가락 사이를 핥아 냈다.

진득한 액체는 덜 익은 과일처럼 텁텁하고 떫은맛이 났다. 여전히 심심한 맛이었다.

입 안을 오물거리다가 퉤, 하고 바닥에 뱉어 버리니, 옆에서 지켜보던 규현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구, 구사월 가이드…? 그걸 왜….”

내가 힐끗 쳐다보자 아, 하며 작게 탄식했다. 규현은 내가 크리먼인 걸 인지했는데도, 이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정체가 밝혀졌대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군 것 같아 나 역시 뒤늦게 겸연쩍어졌다.

“놀랍네요. 등급이 어떻게 돼요?”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안이 한가로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주시했다.

크리먼들끼리 등급을 확인해 보는 키트가 있긴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사용해 본 적 없었다.

B 지역 방출 게이트가 A급 게이트이니, 가장 높아도 A급일 거라고 추측할 뿐. 만약 등급을 안다고 해도 적에게 알려 줄 리는 없었다.

“B 지역 방출 게이트가 A였죠? A급 크리먼이라도 핵이 없을 수 있나? 크리먼 등급보다 가이드 등급이 한 단계 높아야 핵이 없어지는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S급 가이드는 다른 등급보다 백 배 이상 차이가 나서 사라진 걸까요?”

그는 이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흥미로운 문제를 푸는 것처럼 천진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은 멀쩡한 사람이 보기에 짙은 위화감이 들었다.

“A급 크리먼이자 S급 가이드라니. 제가 B급이니까 구사월 가이드의 피를 마시면 핵이 없어지고도 남겠어요.”

이안은 센터에서 자신을 C급 지능계 에스퍼라고 소개했다. 그 등급은 진단원에서 검사한 등급일 것이다.

다른 술수를 썼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크리먼에게 물렸을 때 등급이 상승한 것 같았다. 크리먼에게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할 순 없지만, 등급이 상승하는 건 가능하니까.

이안은 B급 지능계 크리먼에게 물린 것이다.

“내 피를 원하면 그냥 나만 데려가면 되잖아.”

동족이 잔인하게 살해된 걸 보고 멈칫거리던 크리먼들이 다시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크리먼은 등급에 따른 힘의 우위를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래서 보여 주기식으로 잔인하게 처치한 것이다.

그러나 세뇌당해서인지 오로지 목표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예전에 구사월 가이드에게 했던 말이 있죠. 실험을 통해 논리적 귀결이 객관적 현실과 일치하는지 검증이 필요하겠다는 말이요.”

처음 이안과 회의실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의 말이었다. 크리먼들은 규현과 나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섰다. 조금의 틈도 없이 견고했다.

“핵이 없는 크리먼인 걸 확인했으니, 당신이 어디까지 재생할 수 있는지, 불사가 맞는지 이제부터 검증하는 시간을 갖도록 할 거예요.”

이곳은 이안의 실험대였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특별한 실험체로 그동안의 궁금증을 파헤치는 시간.

“누가 어울려 준대?”

그의 실험용 쥐가 돼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으니 계속해서 발악하며 싸울 것이다.

누가 이기나 보자. 생명이 무한대인 나로서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이안의 입꼬리 한쪽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비열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주시하는데 크리먼들이 내가 아니라 규현을 향해 돌진했다.

“뭐, 뭐야!”

주먹을 휘두르며 저항하던 규현도 수적 우세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도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크리먼들이 규현을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지를 결박해 내게 보이게 전시하고 있다는 거다.

“어울려 주셔야 할 텐데. 당신은 죽지 않지만, 이 에스퍼는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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