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6/131)

“사월아.”

“응?”

“왜 이제야 나타났어?”

사월이 이상하단 눈으로 삐딱하게 쳐다봤다.

“네가 늦게 나타난 건데. 난 원래 이 자리에 있었어.”

순간 사월이 술에서 깬 줄 알았다. 묘하게 침착한 어조였다. 사월 입장에선 원래 센터에 있었으니, 유건이 늦게 나타난 게 맞았다.

유건은 어릴 적에도 한결이 가끔 사월 이야기를 해서 사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되려 한결이 사월 때문에 종종 늦게 퇴근해서 질투가 났었다.

“그러네. 내가 늦었네. 내가 한발 늦은 것 같아.”

그때 한결에게 사월이를 보고 싶다고 졸랐다면 만날 수 있었을까. 한결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다면. 우린 현재 다른 관계를 맺었을까?

“왜 각인된 거 말 안 했어?”

사월이 현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묻는 건 비겁하게 느껴져 직접 대놓고 묻지는 못하고, 왜 각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쳤는지만 슬쩍 물었다.

“네가 놀릴 것 같아서.”

“그게 왜 놀림거리야. 알려 주면 같이 조심할 것 아니야.”

“조심하는 거 싫어서. 민폐 끼치는 거 싫어….”

사월이 유건의 품에 이마를 묻으며 얼굴을 숨겼다. 사월은 유건과 각인된 것이 민폐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월이 페어를 그만두려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를 기반으로 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니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게 누구보다 싫었겠지.

사월은 유건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전한 것조차 부담스러웠는지, 피를 주려고 찾아왔을 때도 자기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저 좋을 대로 이용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유건의 피를 마시는 대신 파장을 안정기까지 끌어다 놨다. 사월은 아직도 일방적인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여의찮아 유건에게 범인을 같이 쫓자고 부탁했다. 유건은 사월 입장에서 얼마나 용기를 낸 것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다시 가이딩을 제게 받으라고 했을 때 수락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 사실을 방증하듯, 사월은 유건이 동료라기엔 과한 행동을 할 때면 뻣뻣하게 굳곤 했는데, 그 모든 것이 가이딩 때문이라고 하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건은 현재 자신의 위치가 값지고 소중했다. 이유가 뭐든 사월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렇게 여기까지만 다가가면 좋을 것을. 이렇게 사월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단지 피해를 주기 싫어서라든지 유건이 걱정되어 거리를 두는 것이란 걸 깨달을 때마다 애써 눌러 왔던 가슴 한구석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그래서 초콜릿 사 먹으려고 했는데….”

“그게 뭔데?”

유건은 그날 밤, 그들 사이에서 감춰져 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만 알고 자신은 몰랐던 일들.

그녀가 유건을 피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었는지. 그리고 유건에 피에 얼마나 끌리는지. 어떤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상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걸 넘어서, 강렬하게 욕망하는 것은 꽤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사월이라서 더 그랬다.

어쩌면 사월이 이럴까 봐 유건에게 각인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점점 경계심을 허물고 자리를 내주는 것이 기꺼웠다.

앙칼진 길고양이가 주인만 따르는 집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유건이 얼마나 벅차오르는지 사월은 모를 것이다.

간혹 손이 물려 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쓰다듬는 손길을 곧잘 받아들였다.

어느새 사월은 두 눈을 감고 고요한 숨소리를 냈다. 그녀를 위협하는 존재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게 등을 토닥이는 이 순간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내가 지켜 줄게. 걱정 마.”

유건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사월에게 편안한 보금자리가 돼 주자고. 그녀의 불안감을 자신이 메워 주자고.

자신까지 짐을 만들어 주지 말자고.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자고.

“그래….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기만 하면 돼.”

이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제가 바보 같았다. 신중을 기하자며 거리를 갖자는 태도는 그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피어오르는 온기로 그녀를 감싸고 싶었다. 단순히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느끼는 보호 본능이 아니었다. 그게 이렇게 애틋할 리 없다. 자신은 정말 사월을….

제 감정을 깨닫자마자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동시에 이 애틋한 감정을 꺼내 보이지 않으면 그녀 옆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구사월의 옆을 지킬 수 있는 것.

함께 범인을 잡고 그녀가 인간이 되고… 어쩌면 그 후에 먼 미래의 날들까지.

***

이곳은 현재 게이트가 생성된 구역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한 차례 지나간 구역인 것 같았다. 파장 폭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인간이 더 이상 찾지 않는 고요한 폐허만 자리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대화할 생각이면 성규현 에스퍼는 보내.”

나는 이안이 크리먼에 대한 말을 꺼낼까 두려워 대뜸 말했다.

“성규현 에스퍼는 지한 씨가 몇 번이나 기회를 줬는데, 굳이 따라왔다던데요?”

나는 지한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 상황에 맞닥뜨리니 그동안 의문이었던 퍼즐이 서서히 맞춰졌다. 지능계와 정신계의 환상적인 컬래버였다.

내 무릎에 올려 놨던 지한의 제복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견장에는 마땅히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국현이 줬던 파란 단추는 지한의 것이었고, 이 수많은 크리먼들을 세뇌해서 조종하고 있는 게 바로 지한이었다.

그가 가이드를 물거나 납치해서 이안에게 데려간 것이다.

“저도 성규현 에스퍼가 오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저 사람이 오면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라서.”

이안은 규현을 귀찮다는 듯이 바라봤다. 규현의 등급은 B등급이었다. 상등급에 속하기 때문에 크리먼이 물어도 독에 감염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한의 즉시 세뇌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에겐 정체를 드러내도 나 또한 크리먼이라 이를 숨겨야 하니 입막음이 될 테지만, 규현은 아니었다.

규현에게 들키는 건 센터에 복무 중인 이안과 지한의 입지가 불안정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따지기엔 저도 여유가 없더라고요. 구사월 가이드가 너무 흥미로워서 따라다니다 보니 덜미가 잡혔지 뭐예요?”

이안의 말에 척추를 타고 싸늘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안은 한결이 아쿠아리움에서 목격자를 발견했고, 국현에게 넘긴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투시해도 핵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구사월 가이드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규현이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며 혼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크리먼의 핵을 확인하는 법은 x-ray가 아니라면, 크리먼이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투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보아하니 저 안경이 이안의 문신과 머리색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고, 핵까지도 감추게 만든 모양인데. 머리가 몹시 좋고 연구를 좋아하는 지능계는 특수한 장비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이안 또한 자신이 개발한 장비를 범행에 이용한 것 같았다.

지능계 에스퍼의 능력은 범인이 정신계라고 특정되고 난 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정보를 모으면서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탓이었다. 진실을 알고 나니 이 가능성을 배제한 자신에게 한숨이 나왔다.

그때, 이안이 제 손목에 걸린 워치를 조작했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워치를 들여다보자, 유건이 폭주했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알 수 없는 특수 문자로 변형됐다.

수많은 점이 찍히다가 이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더불어 완전히 먹통이 된 워치의 전원이 꺼져 버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이안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가 지능계이기에 어떤 술수를 써서 센터에 잠입했을 거란 가능성은 염두에 뒀지만, 이런 잡스러운 짓거리까지 할 줄은 몰랐다.

센터에서 사용하는 워치를 해킹까지 해가며 유건을 미끼로 끌어들이다니.

우리가 속아 넘어간 데에는 지한의 공이 컸다. 그는 유건이 폭주한 것이 정말 사실인 것처럼 놀라워하고, 내가 S급 가이드이니 가면 안 된다고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했다.

그는 내가 말린대도 갈 거라는 걸 안 것이다. 가까웠던 사이인 만큼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럼 백유건은 폭주한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똑바로 말해. 네가 백유건 폭주한 것처럼 조작한 거잖아.”

이안이 조작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만, 그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유건이 폭주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적에게 둘러 쌓인 상황에서도 유건의 생각이 먼저 났다.

“지금 백유건 에스퍼가 걱정됩니까?”

그러나 이안은 쉽게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돼요?”

이안이 지한에게 눈짓하자, 차에 붙어 있던 크리먼과 이안의 양옆에 있던 크리먼들이 우리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뭐든 정확한 게 좋지만… 심증은 있으니 천천히 알아봅시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입니까?”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규현이 이안을 향해 물었다.

“뭐겠어요?”

이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크륵, 거리며 목을 긁듯 우는 크리먼들의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침을 뚝뚝 흘리며 당장이라도 집어삼키고 싶다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A지부의 여왕님이라고 불리는 S급 가이드 구사월이 과연 평범한 가이드가 맞는지. 아니면…,”

이안의 수정체가 검게 물들었다. 레몬색 눈동자 안의 동공이 날카롭게 좁혀졌고, 내 몸을 투시하는 눈길에는 그동안 숨겨 왔던 야만적인 욕망이 흘러넘쳤다.

“핵이 없어서 죽지 못하는 크리먼인지.”

이안은 내 비밀을 지켜 줄 생각이 없었다. 이안은 규현이 있든 말든, 오늘 내가 크리먼인 걸 어떻게든 확인할 생각이었다.

“구사월 가이드. 제 뒤로 숨으십시오!”

규현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듯했지만 일단 상황이 급박하니 나를 뒤로 숨겼다. 규현의 어깨 너머로 이 상황이 너무 재밌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는 이안이 보였다.

규현은 B급 육체계 에스퍼이고, 세뇌당한 크리먼들은 C급 이하일 테니 등급으로는 우세했다. 하지만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여기서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 규현을 방패막이로 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성규현 에스퍼. 대부분 심장이고 명치입니다. 두 마리는 머리에 있지만 제가 그건 알아서 처리할게요.”

“예? 무슨 말이십….”

“크리먼의 핵 위치 말한 겁니다.”

규현이 뒤를 돌아보자 두 눈이 마주쳤다. 그가 크리처화를 개방한 내 얼굴을 발견했다.

커다랗게 뜬 눈과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을 보아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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