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5/131)

“사월이한테는 말하지 마. 사월이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도 알고 있어야 사월이가 편할 것 같아서.”

사월이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다 보니, 이런 식의 서론은 유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 에밀리 집에 왔을 때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날 에밀리는 센터에서는 자신이 챙겨 줄 수 없으니, 사월이 좀 잘 봐 달라고 말했다.

큰 상처가 생기면 크리처화가 강제되기에 조심해야 하며, 센터에서 크리먼과 관련된 대화를 할 때는 최대한 밀폐된 공간에서만 하라고 했다.

그 밖에 사월이 갈증을 참지 못하고 인간을 습격하는 크리먼들을 끔찍하게 싫어한다고도 말했고, 그래서 처음 유건을 맞닥뜨렸을 때 갈증을 참기 힘들어서 피한 것이었단 얘기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유건은 그동안 자신이 사월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으며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자기도 모르게 사월에게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 뭔데? 진짜 뭐가 있는 거야?”

에밀리는 사월과 유건의 각인에 대해 말했다. 유건은 처음엔 못 믿겠다는 반응이더니,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럼 이거 각성자 각인처럼 못 끊는 거야?”

“아니. 크리먼의 각인은 중독 현상이랑 비슷해서 3주 정도 지나면 끊어 낼 수 있어.”

“아…. 그래?”

유건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 에밀리가 순간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사월이도 같은 질문 했는데 반응이 좀 달라서.”

“어땠는데?”

에밀리가 말하길, 사월은 크게 절망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끊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고….

‘너무하네. 그렇게 싫어할 건 뭐람….’

사월이 유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이렇게 잠들어 있을 땐 천사 같은 얼굴인데 눈을 뜨면 미운 말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요즘 그들은 만난 날 이래로 가장 사이가 좋았다. 여전히 아웅다웅 말다툼은 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월이 까칠하게 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못마땅하게 찡그린 미간이 자꾸 귀엽게 보여서 마음이 심란했다.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시선 끝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서늘해 보이는 삼백안이 살짝 무섭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감정에 따라 다양한 색이 공존하는 눈동자가 너무 신비로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신기해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고 있는데, 사월이 눈가를 찡그리면서 깰 것처럼 인상을 썼다.

“큰일 났다. 구사월 깰 것 같아.”

“잘됐네. 바닥 딱딱하니까 들어가서 자라고 하면 되겠다.”

에밀리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한 모금 먹고 취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술을 섞어 주기는 했지만 독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건은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며 사월의 표정을 살피는데, 이내 사월이 눈꺼풀을 가물가물 들어 올렸다.

“잘 잤어?”

참으로 어색한 인사였다. 사월은 그런 유건을 멀뚱히 쳐다봤다.

“너 한 모금 먹고 잠들었어. 술 별로 안 약하다며. 너 거짓말했지.”

유건은 사월이 바로 쏘아 대는 말을 할까 싶어 그녀를 탓하며 나무랐다. 이쯤 되면 한마디 해야 하는데 사월은 여전히 유건을 주시하기만 했다.

“물….”

“응, 물.”

유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이 든 컵을 건넸다. 사월은 몸을 일으키더니 꿀떡꿀떡 잘도 삼킨 후 다시 유건의 무릎에 드러누웠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눈도 풀려 있고,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뺨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얇은 면바지 위로 느껴지는 사월의 숨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그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고 사월이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사월아. 아직 취했어?”

“이거도 먹을래?”

에밀리와 유건은 그런 사월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유건은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입을 틀어막으며 웃고 있었고, 에밀리는 딸기를 포크로 찍어 사월의 입에 가져다 댔다.

사월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벌떡 일으킨 후 입을 벌려 딸기를 베어 먹었다. 오물오물 씹는 것이 꼭 토끼 같았다.

유건이 용기를 내어 먹여 주는 걸 시도할까 고민하고 있을 무렵, 사월이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피…. 피 마시고 싶어.”

취한 와중에도 생존 본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유건은 사월이 그동안 왜 술을 안 먹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과할 정도로 경계심 어려 있던 모습이 모두 허물어졌다. 에밀리가 사월에게 크리처 피가 담긴 잔을 쥐여 줬다.

사월은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돌연 시선이 유건을 향했다.

“어, 왜. 왜 그래?”

무릎걸음으로 걸어 유건에게 다가왔다. 목에 가까이 코를 대고 짐승처럼 냄새를 맡았다. 턱끝 아래까지 파고든 그녀의 날카로운 콧날에 소름이 돋았다.

“에밀리. 나 어떡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뻣뻣하게 굳은 유건이 에밀리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에밀리는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사월이 이를 내어 유건의 목을 물었다.

“읏…!”

그러나 크리처화가 개방되지 않은 뭉툭한 이는 살을 파고들지 못했다. 아무리 사월이 잘근잘근 씹어도 잇자국만 날 뿐이지, 피를 빨 수는 없었다.

그러나 꼼짝하지 말라는 듯 양어깨를 그러쥐고 오물거리는 것이 너무 간지러웠다.

“자, 잠깐만!”

유건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밀어내자 사월이 부루퉁한 얼굴로 항의하는 것처럼 노려봤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자못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피 금지야.”

“왜 금지야. 네 피 내 건데.”

그러나 뻔뻔하게 자기 것임을 주장하는 모습에 유건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어리광이 묻어난 목소리에 왠지 사월이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본래의 성격은 변하지 않은 건지 새침한 표정이었다.

“안 돼. 안 돼, 사월아.”

사월이 다시 유건의 목을 덮치려는 모습에 에밀리가 뒤늦게 다가와 사월을 말렸다.

“자러 갈까? 오늘 나랑 같이 자자. 응?”

“싫어. 얘랑 잘 거야.”

에밀리가 유건의 팔에 매달린 사월을 떼어놓으려고 실랑이했다. 유건도 다시 무너진 표정을 수습하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 돼. 나 무서운 사람이야.”

“…그래도 피는 주면 안 돼요?”

“미치겠다.”

하지만 3초를 유지하지 못하고 광대가 솟구쳤다. 그 후에는 대환장 파티였다. 사월은 유건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계속 칭얼거렸다.

그런 사월을 유건은 단호하게 떨어뜨리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녔다. 에밀리는 처음에는 말렸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했다.

결국 거실에 3명이 잘 수 있도록 이불을 깔아 놓고 불을 끄고 누웠다. 에밀리는 내심 사월과 유건, 둘만 자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피곤했는지 금세 코를 골며 잠들었다. 사방이 깜깜한 밤이었다. 그런데도 사월의 잿빛 눈동자만은 유독 빛나는 듯한 기이한 감상이 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사월의 인영을 점점 선명하게 그려 냈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유건은 마침 평소와 달리 솔직해진 사월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눈을 마주치며 소곤소곤 물었다.

“사월아.”

“응?”

사월은 졸리지도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생일 때 뭐 가지고 싶어?”

유건의 요즘 최대 고민거리였다. 얼마 후 사월의 생일이었다.

매해 유건의 어머니인 수련의 선물을 사기에 여자의 선물을 처음 사는 건 아니었다. 보통 곁에서 지켜보며 필요한 걸 사주는데 사월은 옆에서 봐도 도통 뭘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값비싼 가방이나 장신구를 사자니, 사월의 집에 잠깐 갔을 때 보았던 드레스 룸이 떠올라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데도 취향이 확고한 건지, 항상 끼는 것만 끼고 입는 것만 입었다.

“응? 얘기해 봐. 말만 하면 다 사줄게.”

술기운이 오른 사월은 평소보다 솔직했다. 괜히 이상한 걸 사 가서 하찮은 눈빛을 받느니, 이런 기회에 당사자에게 묻는 게 나았다. 사월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돈.”

“…돈?”

유건은 순간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이걸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돈 말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거.”

생일 선물을 돈으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만약 정말 돈이 좋다고 하더라도, 유건은 그런 선물은 하기 싫었다. 일단 성의가 없어 보였다.

“피.”

사월은 그 말을 하면서 유건을 팔을 앙 깨물었다. 턱을 엇갈리며 집요하게 무는 감촉이 말랑하고 뜨끈했다.

사월이 피를 원하는 건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그건 유건이 현재 유일하게 주면 안 되는 거였다.

“그것도 말고. 다른 거 없어?”

사월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쏘아봤다. 뭐든 사줄 것처럼 말했으면서 다 안 된다고 하니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핵.”

“음… 그것도 안 되는데.”

“됐어, 꺼져.”

“…….”

솔직해진 사월은 평소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유건은 오랜만에 사월에게 꺼지란 말을 듣고 나니 가슴 아픈 향수가 느껴졌다. 유건이 사월을 한창 쫓아다닐 때 시도 때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말이 심하네. 상처받았어.”

근래에 좀 사이가 좋았다고 그새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심장이 아릿했다. 마치 가슴에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장난스레 가슴을 움켜쥐자 사월이 유건의 손을 가운데에서 왼쪽 가슴으로 얹어 줬다.

“심장 거기 아니고 여기.”

그 와중에 이건 못 넘어간다는 듯이 새초롬하게 말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똑바로 알아들으라는 듯이 두어 번 두드리는 것이 자못 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 귀여워.”

“으윽, 윽.”

갑자기 확 끌어안자, 사월이 숨이 막힌다는 듯이 낑낑거렸다.

‘형은 이 귀여운 걸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네.’

요즘 사월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유건과 만났다면 그때도 사월을 따라다녔을 거라고.

사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눈길이 가고,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차갑다 못해 싸늘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걸 넘어설 정도로 신비로운 매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눈길을 끄는 건 그녀의 향기 또한 한몫했다. 은은하고 좋은 냄새가 나서 뒤돌아보면 사월이 지나간 후였다.

유건이 얼굴을 마주 대고 볼을 비비적거리자, 사월은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이 심드렁한 표정조차 이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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