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1/131)

현재 규현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라면 유건밖에 없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결과의 유대, 등급, 성과 등에서 규현과 비교해 빠지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나마 유건보다 규현이 앞선 것이라면 한결에 대한 충성심 정도? 그러나 한결은 그런 면모만 보고 사람을 곁에 둘 타입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말은 이제 4년 차니 한결이 말한 것만 수행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한결 또한 그 이상의 성과를 원할 거라고.

규현도 한결의 곁에 오래 있었다면, 한결이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능력을 중시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유건이 알파 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리고 유건이 한결과의 임무뿐만 아니라 개인 임무도 두루두루 수행하고 있기에 규현이 견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팀 내 가이드 교육을 맡은 만큼, 나는 한결과 인사 관리에 관해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그런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면 규현은 다른 생각이 들겠지.

“저 좌천되나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어떡합니까. 제가 뭔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규현이 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머리를 양손으로 쥐며 절규했다. 조금 경각심만 주려고 자극한 건데 규현은 꽤 극단적인 상황까지 생각했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나는 규현이 더욱 다른 길로 샐까,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캡틴이 요즘 가이드 습격 사건에 몰두하고 있으니, 성규현 에스퍼가 범인을 잡아내면 좋아하실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마침 저도 캡틴이 모르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많이 알고 있거든요.”

규현이 고개를 들며 나를 들여다봤다. 자리를 뺏길까 불안과 초조함이 드러났던 얼굴에는 어느새 희망과 기대가 깃들었다.

“어떠세요? 알고 있는 정보를 저와 공유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규현은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 건지 우물쭈물했다. 워치를 확인해 보니 지한이 간 지 5분이 지나고 있었다. 곧 올 것 같은데….

“지금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고려하고 답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만 해 두어도 규현은 아마도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한결의 옆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했다.

만약 다른 해답을 가져온다고 해도, 다른 식으로 꾀어내면 그만이다. 한결의 어릴 때 사진이라거나 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들과 교환해도 상관없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한결과 관련된 것이라면 규현은 그때마다 고민에 빠질 것이다. 상대가 가장 중요시하는 걸 알아채면 그를 다루는 것은 퍽 수월해지는 법이다.

“뭐야? 무슨 얘기 해?”

“아니에요.”

“뭔데. 나 빼고 왜 비밀 얘기해.”

멀리서 우리가 대화한 걸 지켜본 건지 지한이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와선 물었다. 나는 다시 거리를 넓히며 지한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했다.

지한은 먼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는지, 아이스크림을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규현아. 네가 말해 봐. 사월이가 무슨 말 했어?”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다 봤어. 사월이가 너한테 붙어서 뭔가 말하는 거.”

“안 하셨습니다….”

“유건이한테 이른다? 네가 사월이한테 집적댔다고?”

“안 했습니다! 구사월 가이드님이…!”

“사월이가 너한테 먼저 집적댔다고 하면 유건이가 봐줄 것 같아?”

규현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울먹였다. 그가 눈망울이 애절해지며, 뭔가 도와 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규현이 불쌍했지만, 구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명하려면 불가피하게 범인에 대한 얘기를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지한의 장난기 어린 타박에 규현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너무 오래 골려 먹는 것 같아서 장난 좀 그만치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워치에서 삐빅, 하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알람음이 울렸다.

[C11 구역 F급 게이트 파훼 완료. 해당 게이트 출전 에스퍼 중 B8 구역 C급 게이트 지원 가능 에스퍼 확인 요망.]

“한결이 게이트 마쳤나 본데?”

모두 메시지가 도착한 건지, 지한이 말했다. C11 구역의 F급 게이트는 한결이 두 번째로 출전한 게이트였다.

그다음으로 지원 요청을 받은 C급 게이트는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임 어택 게이트다. 타임 어택 게이트는 일정 시간마다 게이트 안에 또 다른 소 게이트에서 부하 크리처들이 나온다.

그 크리처들을 모두 죽여야만 보스 크리처가 나와서 보스 크리처를 죽이면 게이트가 소멸하는 형식이었다. 얼마 안 가 지원 요청을 수락한 에스퍼 명단이 차례로 떴다.

[AES백한결(이동 중)

AEB박한나(이동 중)

AEA현현재(이동 중)

AEC박서나(이동 중)

…]

가장 먼저 한결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 알파 팀 에스퍼는 하나도 빠짐없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와, 징하네. 얘는 우리나라 게이트 다 지가 파훼하고 다니나 봐. 다른 팀 에스퍼들도 있는데. 또 알파 팀은 전원 참전하자고 했겠지.”

지한이 놀랍다는 듯, 혹은 징그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규현이 곧바로 반문했다.

“징하다뇨. 대단하신 거죠. 여러 게이트가 생성돼서 최대한 빠르게 보스 먼저 잡은 것일 겁니다. 게이트 수당 따로 나오니 팀원들도 나쁜 일은 아닐 테고요.”

“규현이 앞에서는 말도 함부로 못 하겠네. 나도 대단하다는 의미였어. 근데 게이트 세 탕 뛰면 수당이고 뭐고 힘든 게 사실이잖아. 안 가고 싶은 에스퍼도 있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하겠지만…. 힘든 분들은 빠져도 된다고 하셨을 겁니다.”

“그랬겠지. 근데 상관이 가는데 빠지기가 쉬워?”

“강지한 에스퍼는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십니다. 한결 캡틴을 모두 믿고 따르니, 알파 팀의 단합력이 높은 겁니다.”

“그래, 그래. 나만 나쁜 놈이지.”

지한의 말도 일리가 있고 규현의 말도 이해가 됐다. 나는 워치로 한결의 상태 창을 띄워 파장률을 확인했다.

[32%]

연이어 게이트에 들어간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그러나 파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몸에 피로도가 쌓였을 것이다.

어차피 B 지역에 있는 타임 어택 게이트는 마지막 소 게이트를 파훼시킨 것이 세 시간 전이니까, 곧 다시 소 게이트가 출현한다.

이동해도 싸우기 애매한 시간대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다른 팀원들의 파장률도 확인하고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알파 팀 에스퍼는 한 웨이브 끝나고 출전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소 게이트가 세 시간마다 생성되니, 그동안 현장 가이딩도 받고 밥도 먹고 휴식도 취하라고 보냈다.

지한 말대로 센터에는 A지부 알파 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AES백한결 : 알겠어.」

한결은 별다른 말 없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AES백한결 : 너는 식사 좀 했어?」

많이 여유로워진 건지 안부까지 물어왔다.

「AGS구사월 : 네. 오전에는 많았는데 다른 게이트도 거의 다 마무리돼서 그런지 부상자가 별로 없어요.」

「AES백한결 : 다행이네. 다른 별일은 없고?」

「AGS구사월 : 네.」

「AES백한결 : (이모티콘)」

한결이 하얀 털이 송송 난 몰티즈가 엄지를 든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의 이모티콘이었다.

그가 이러한 이모티콘을 사용하게 된 건 나 때문이다. 처음 알파 팀에 들어왔을 때, 한결이 이렇게 연이어 게이트를 다닐 때마다 불안해져서 파장률을 시도 때도 없이 확인했다.

폭주 근사치까지 떨어지면 너무 걱정돼서 바쁜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다. 한결은 상황이 급박하니 단답으로 보내거나, 봤는데 보내는 걸 잊어서 느지막이 답장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정말 괜찮은 건지 심장을 졸여야 했다. 그래서 메시지를 보내기 힘들면 이모티콘 하나라도 보내 달라고 그에게 선물했다.

평소 딱딱한 인상인 그와 반대되는 캐릭터를 보내야 내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세상 무해해 보이는 동물인 강아지로 골랐다.

지금은 이동 중이라 바쁜 상황이 아닐 텐데도, 아기자기한 모양의 이모티콘이 연이어 메시지 창에 올라갔다.

“알파 팀 에스퍼들 전부 홀드 떴네. 사월아, 네가 말한 거야?”

“네?”

“누구랑 메시지 하는데 그렇게 웃어. 한결이 맞지?”

지한이 나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아, 네. 한 웨이브 쉬고 다음 소 게이트 때 참전하기로 했어요.”

“그래, 한 타임 쉬어야지.”

도배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주변 시야로 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규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성규현 에스퍼, 내가 좀 전에 말한 거 결정했나 봐요?”

“네?”

“할 말 있는 것처럼 쳐다보는 것 같길래요.”

“아, 아닙니다.”

내가 휴대폰에 시선을 두면서도 나를 보는 걸 다 안다는 것처럼 말하자, 규현이 급하게 말을 물렀다. 혹시 규현에 대해 오늘 일과를 보고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생각해서 눈치를 본다면, 나로선 대답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근데 유건이 게이트는 좀 오래 걸리네.”

유건이 새벽에 들어간 게이트가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다. 진행도는 97%. 공략은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무슨 문제 생긴 건가?’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알림이 떴겠지만, 혹시 모르니 유건의 파장량을 확인했다.

어제 나와 껴안고 잠들어서 그런지, 오늘 하루 종일 능력을 사용했을 텐데도 43%인 안정기였다.

이대로 게이트를 마치고 돌아온다면 굳이 가이딩은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 게이트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네.’

유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전투 중인데 귀찮을 수도 있고, 메시지 확인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전투 중에 잠시 한눈을 팔아도 한결은 왠지 알아서 처리할 것 같았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그가 게이트에서 어떻게 싸우는지는 모르지만, 간혹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선형으로 꼬이는 그의 생체 리듬 그래프를 가만히 바라봤다. 빨갛고 파란 선들이 모여 기하학적인 모형을 그려 냈다.

얼기설기 엉킨 수많은 선은 꼭 어젯밤 유건의 심장에서 퍼져 나가던 혈관을 떠오르게 했다. 살아 움직이듯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선을 보고 있으니, 자연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에 대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스파크가 튀듯 선이 가시 형태로 일그러졌다.

‘뭐지?’

띠링.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데, 한결이 게이트를 파훼했을 때처럼 청명한 알림음이 울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지한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엥? C급 게이트 벌써 끝났나?”

우리는 각자의 워치를 들여다봤다.

[※긴급 가이딩 요청※ AES백유건 1차 폭주 발생. 아래 명단의 가이드는 즉시 현장으로 지원 요청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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