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69/131)

나는 얼굴을 유건의 가슴에 바짝 붙이곤 더욱 파고들지 못해 아쉽다는 것처럼 볼을 비볐다. 할 수만 있다면 달콤한 피로 가득한 그의 몸 내부까지 닿고 싶었다.

손을 안 댔으면 안댔지, 이대로 떨어지기 너무 아쉬웠다. 며칠이나 황량한 사막을 거닐다, 물웅덩이를 손안에 가득 담은 기분이었다.

물어뜯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지만, 그저 손안에 쥐어진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피를 달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혀 아래 침이 잔뜩 고여 애타게 입을 달싹여야 했다.

“한 번씩 네가 약한 모습 보여 줄 때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좋을까, 사월아.”

유건이 내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너 도와주는 거 나 좋으려고 하는 거야. 나한테 부담가지지 마. 마음껏 이용해. 네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좋아.”

“너 진짜 이상해….”

그가 목소리를 낼 때마다 닿아 있는 몸이 진동했다. 소곤거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손가락이 곱아 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풀 냄새와 섞여 유건의 향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와 파장, 목소리,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까지 안정감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졸음을 참기 힘들었다.

“솔직히 좀 미친놈 같아….”

“내가 너한테 미친 게 한두 번이야?”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수긍하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져서 우스웠다. 일방적으로 느껴졌던 소유욕이 이제 유건만의 감정이 아니라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니, 가이딩. 가이딩 말한 거야.”

“알아.”

그 뒤에 덧붙인 말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유건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꿈을 꿀 것만 같았다.

나는 잠들기 전, 못다 한 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너 안 싫어.”

“…….”

“안 싫어한 지 꽤 된 것 같아.”

편안하고 고요한 밤이었다.

***

일어났을 땐 뒷좌석에서 유건과 내가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염력을 쓴 건지 들고 옮긴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깼어?”

품에서 꼼지락거리자 유건이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유건 또한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무엇 때문인지 C지부 기숙사 앞이 각성자들로 인산인해였다. 아마 저 소음 때문에 자다가 깬 것이리라.

“무슨 일 있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들여다봤다. 안타깝게도 한결이 위치 추적을 할 것 같아 워치를 각자의 숙소에 두고 와서 센터 경보 알람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걸 보니 새벽인 것 같은데. 새벽이라면 이건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보통 새벽에 이렇게 센터가 어수선한 건 높은 등급의 게이트가 나타날 때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러 군데 게이트가 출연했거나.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서 긴급 재난 문자를 확인했다. 유건과 나는 화면을 확인한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F4구역] 오늘 3시 30분 기준, D등급 게이트 발생」

「[A7구역] 오늘 3시 52분 기준, F등급 게이트 발생」

「[B8구역] 오늘 4시 13분 기준, C등급 게이트 발생」

「[G3구역] 오늘 4시 15분 기준, D등급 게이트 발생」

「[C11구역] 오늘 4시 32분 기준, F등급 게이트 발생」

대략 한 시간 만에 무려 게이트가 5개나 생성됐다. 간혹 한 게이트의 파장에 영향을 받아 비슷한 유형의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럴 경우 고등급 게이트가 생성됐을 때처럼 데프콘, 즉 방어 준비 태세 2단계가 발령된다. 등급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게이트가 단순 보스만 잡는 게 아닐 수도 있기에 서둘러 A지부로 돌아가야 했다.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42분. 다행히 시간이 많이 지체되지 않았다.

유건은 바로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서둘러 A지부로 향해 기숙사에서 워치를 챙기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팀원들이 모두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알람 못 들어서.”

“으휴.”

지한이 유건을 작게 꾸중했다. 나는 가장 뒤쪽에 슬그머니 합류했다. 한결이 막 게이트에 대해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다.

“D등급 게이트는 산림형이니 자연계가 가고, F등급은 동굴형이라서 육체계 위주로 팀을 짰습니다. 배정된 게이트를 마무리하는 대로 B8 구역에 있는 C등급 게이트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C등급이라고는 하나, 타임 어택 게이트라 크리처가 시간마다 나눠서 나올 겁니다. 자세한 위치와 소대는 이동하면서 워치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상황이 급박해서인지 브리핑은 짧게 이어졌다. 마침 에스퍼들의 워치에 배정된 게이트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한결이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유건을 향해 말했다.

“백유건 에스퍼는 경호 임무는 잠시 홀드하고 A7 구역에 있는 F등급 게이트에 출전하세요. 구사월 가이드 경호는 다른 에스퍼에게 맡기겠습니다.”

유건은 내 경호 에스퍼 역할을 맡은 후, 자처한 게 아니라면 게이트에 투입된 적이 없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등급이 낮을수록 난이도가 낮지만, 그만큼 파훼 제한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게이트가 한꺼번에 출연했을 때는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파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럼 구사월 가이드 경호는 제가 맡겠습니다, 캡틴.”

유건의 옆에 있던 지한이 나섰다. 정신계와 지능계는 전투력이 낮은 편이라, 게이트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지한은 국현과 마찬가지로 심문하는 역할을 했다.

차이점이라면 국현은 어느 정도 죄가 의심되는 각성자를 상대로 심문하였고, 지한은 임무 중 증인으로 세울 수 있는 자에게 정보를 빼낸다.

지금 상황에서 마땅히 일이 없는 지한이 내 경호를 맡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왠지 한결이 좀처럼 지시를 내리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구사월 가이드 경호는 강지한 에스퍼와 성규현 에스퍼가 맡기겠습니다.”

“성규현 에스퍼는 왜….”

가장 앞줄에 있던 규현조차 자신의 이름이 불릴 줄 몰랐는지, 고개를 들며 두리번거렸다.

규현은 한결의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 육체계 B급 에스퍼이며 시각과 청각이 고도로 발달하여 높은 위치에서 적의 위치를 브리핑하는 역할을 했다.

근접해서 싸우는 한결은 규현의 서포트를 받으면서 날개를 단 것처럼 순식간에 현장을 쓸어 버리곤 했다.

그 외에 한결에게 전술이나 작전을 짜는 트레이닝을 받아 한 소대 정도는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에스퍼이다.

그런 규현을 왜 갑자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내 경호로 붙인단 말인가.

“게이트에 출전하는 에스퍼들이 많아서 센터가 평소보다 한산할 겁니다.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결의 명령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센터 안에 있을 텐데.

게이트가 발생했으니 부상자가 오면 센터에서도 거의 캡슐에 있을 것이다.

“그럼 모두 맡은 책임을 다하되 무사 복귀 바랍니다.”

“예, 캡틴.”

한결의 판단에 의아함을 느끼며 다른 뜻이 있는지 고민해 보는 사이, 한결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각성자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사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나마 제일 가까운 게이트에 있으니까.”

“어.”

“퇴근 시간 됐다고 혼자 숙소 돌아가지 말고. 나 올 때까지 기다려.”

“알았다고.”

데프콘 2단계가 발령됐을 때는 퇴근 시간에 돼도 당연히 센터에서 대기해야 했다.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유건이 불안한 건지 되새기듯 주의를 줬다.

“절절하다, 절절해. 무슨 일이 왜 있어. 에스퍼가 둘이나 붙는데.”

지한이 작작 하라는 것처럼 유건을 나무라곤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사월이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키는 건 좋은데, 팔은 떼고.”

유건은 못마땅한 눈을 하곤 지한의 팔을 내게서 떨어뜨리곤 자기 어깨에 둘렀다.

“성규현 에스퍼. 왜 갑자기 캡틴이 당신께 경호 임무를 맡겼는지 압니까?”

마침 내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온 규현에게 유건이 물었다.

“아니요. 잘 부탁한다는 말만 하시곤 가셔서….”

한결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유건은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지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형이 잘 감시해. 성규현 에스퍼랑 구사월 단둘이 두지 마.”

아무래도 규현보다는 더 가까운 사이인 지한이 믿음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규현 몰래 말한다기엔 유건의 목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규현이 그 말을 들었는지, 억울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백유건 에스퍼님. 저 구사월 가이드님에게 삿된 마음 없습니다. 경호만 철저히 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저는 성규현 에스퍼가 구사월 가이드한테 삿된 마음을 품었다고 안 했는데요?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도둑이 제 발 저려서….”

“빨리 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는 유건이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등을 떠밀며 말했다. 그 후에도 저거 분명 뭔가 있다고, 수상하다고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사무실 밖으로 내쫓다시피 끌어냈다.

“잘 다녀와.”

“구사월. 상대가 누구라도 단둘이 있지 마. 알겠지?”

“어, 어.”

“건성으로 듣지 말고 대답하라고.”

“알겠다고.”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언니. 쟤 좀 데려가요.”

옆으로 지나가던 알파 팀 에스퍼 한나에게 유건을 맡겼다.

“얘는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에스퍼 망신 다 시키네.”

“구사월!”

한나는 유건의 팔을 잡더니 질질 끌고 나갔다. 드넓은 13층 복도에 유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나는 센터에 에스퍼 둘을 대동하고 업무를 봤다. 캡슐에 들어설 때마다 매칭된 에스퍼가 지한과 규현을 보고 흠칫흠칫 놀랐다.

“제가 최근 발생한 가이드 습격 사건 때문에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것처럼 말했지만, 애써 괜찮은 척했던 건지 가이딩 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근데 둘이나 구사월 가이드를 경호하는 건가요?”

“…예.”

“역시 S급은 다르시네요.”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매번 이런 반응이었다. S급이라도 이건 처사가 과했다. 그것도 각성자들이 득실거리는 센터 안에서.

그 후에도 커다란 장정이 양옆으로 따라붙으니, 어디를 가더라도 시선을 끌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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