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8/131)

“너 습격 사건 일어났던 날, 내가 너 쫓아갔었잖아. 네가 저 초콜릿 좋아한다는 말 듣고 그거 주려고 간 거였거든.”

그러고 보니 습격 사건 후에 며칠 만에 센터에 출근했을 때, 지수가 유건이 내게 무언가 줄 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게 저 초콜릿이었던 모양이다.

“그날 한결 형한테 네가 B 지역 방출 게이트 사고 때 현장에 있었다고 처음 들었어. 그 후부터 사람 만나는 걸 꺼리는 것 같다고 하길래, 내가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하고 귀찮게 군 것 같아서 초콜릿 주면서 사과하려고 했지.”

그런 내막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근처에 게이트 발생 경보가 울린 것도 아닌데 위치 추적까지 하면서 따라온 것에 대해 조금 소름이 돋았다.

물론 초콜릿을 주며 사과할 의도로 따라왔다고 해도 위치 추적을 해서 따라온 건 도를 넘었다. 그땐 비밀을 들킨 입장이라서 따지진 못하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그 후에 유건은 나를 협박을 해서 페어를 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그 일들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유건과 나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리라.

“여러모로 신기하다. 너는 내 피 냄새 때문에 갈증 참으려고 저 초콜릿을 찾았고, 나는 초콜릿 주려고 따라갔다가 네 비밀을 알게 되고.”

“…….”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냥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어. 네가 나를 처음부터 너무 싫어했으니까.”

유건도 옛 생각이 나는지 과거를 돌이켜보듯 고요하게 읊조렸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유건을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수많은 순간이 생각났다.

그를 마주칠 때마다 코를 막은 일과, 어쩌다가 길을 가다 마주쳐도 바로 뒤돌아서 모른 척하며 걸었던 게 떠올랐다. 그가 그런 나를 쫓아올 때면 비상구 계단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매칭률이 높은 S급 에스퍼이건 말건 내 비밀을 들키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유건에게 벗어나려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그에게 의문을 만들었고 그래서 유건을 끌어들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유건을 다른 팀원들처럼 똑같이 대했다면 그가 그날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그 후에 최대한 의연한 척을 하며 적당히 흘려 넘겼다면.

그가 내 비밀을 알게 돼서 나와 엮일 일이 없을 수도 있었을까.

“…후회돼?”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목소리를 내고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가 재차 물었다.

“그날 나 쫓아온 거. 후회되냐고.”

유건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묻자, 그 역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멋쩍긴 했지만,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문제였다.

유건은 나와 엮이고 나서 많은 일을 겪었다. 산 채로 피를 빨리고, 페어를 취소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제는 센터의 규율마저 무시한 채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면서 나와 범인을 쫓고 있었다.

그가 나와 엮여서 좋은 점이라곤 가이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간혹 내 가이딩이 유건에게 그만한 효용 가치가 있는 건지 셈을 쳐보곤 했다.

매칭률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의 파장량이 불안정한 상태라도. 사실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통해 나아질 수도 있을 텐데. 내 가이딩이 그렇게 좋을까. 그렇다면 유건은 어디까지 나를 도울 생각인 거지?

결론은 항상 내가 에스퍼가 아니니 판가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에스퍼에게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는 목숨 줄과도 같으니 그도 나름대로 이것저것 고려한 후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

사실 후회되냐는 말보다 어느 선까지 나를 도울 생각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만약 내가 크리먼인게 밝혀진다면… 그때도 나를 모른 척하지 않을 거냐고.

하지만 이 질문은 할 수 없었다. 그가 혹여 부담스럽게 느껴 나를 돕는 걸 그만두면 안 되니까. 나는 현재 유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굳이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상황에 대한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그것이 유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라도 서운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엔 분명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그를 떼어 내고 싶었지만, 현재는 유건에게 어느 정도 의지를 하는 건 사실이니까.

“너는? 나 아직도 싫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후회하냐는 말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유건이 돌연 역질문을 해 왔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어떨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스무고개 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정신계 에스퍼처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 마음을 안단 말인가.

“몰라. 네 마음 같은 거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냉하게 대꾸했다. 내가 먼저 질문했으면서 되려 심란해졌다. 유건을 다시 내 일에 끼워 넣을 결심을 했을 때, 나는 그에게 가이딩을 해 주고 유건은 그에 따른 보상을 주는 거라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고 해도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이제 유건이 가이딩 때문에 내게 잘해 주는 것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에.

우리에게 가이딩은 그저 가이드라인이었다. 서로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명분. 그래서 유건이 매칭률이며 가이딩 때문에 나를 돕는 거라고 말할 때 말을 바로잡지 않았다.

나도 유건이 그러한 이유로 나를 돕는다고 말해야 심적으로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유건은 내 비겁함에 어울려 주고 있었다.

“그래도 감동이다. 내가 어떤 생각하는지 물어본 거 처음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머쓱해졌다. 유건이 나를 자꾸 나쁜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는데, 이런 걸 보면 나는 원래부터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동시에 그동안 유건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과거에 나는 남을 신경 쓰기엔 내가 더 소중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유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을까. 그건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후회 안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을 주고 있는지도 몰랐던 턱 근육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너랑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가는 게 제일 싫어.”

유건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이라는 불씨마저 한순간에 잠재웠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날들까지.

“오히려 감사하지. 내가 네 비밀을 알아서 엮일 수 있었으니까.”

“넌 좀 이상해….”

나는 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거리를 둔다는 말은 모순적이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회하지 않지만 나를 좋아하게 되는 건 별개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예전에 내가 가이드이고 네가 에스퍼여야 했다고 한 거 생각나?”

캡슐에서 처음 유건과 가이딩을 했을 때의 대화였다. 나는 그 말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집중이나 하라고 했던 것 같다.

“어.”

“네가 나랑 각인됐다는 말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좋았어. 매번 나만 너한테 안달복달해서 억울했거든.”

“쌤통이다 싶냐?”

결국 그렇게 피하던 각인에 관한 말이 거론됐다. 이래도 말하기 싫었는데. 저 ‘안달복달’이란 말의 의미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지금도 밀폐된 차 안에 있어서 그런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향을 참기 힘들었다. 초콜릿도 먹지 않으니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죽을 맛이었다.

나는 괜히 입 안에서 내 혀를 쭉쭉 빨다가, 창문을 내렸다. 어느새 시원한 여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저 멀리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하며 천진하게 울어 댔다. 여름은 질색이지만 싱그러운 풀 냄새는 머리를 맑게 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

“아니. 불안감을 없애 주고 싶지. 갈증을 채워 주고 싶고.”

유건은 각성 발현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 가끔 가이드는 인류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듣는다면 백 점짜리 답안지라고 할 만한 말이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에스퍼가 몸과 정신이 아픈 걸 보면 동정심이나 안쓰러운 감정이 들긴 했다. 아주 개미 눈물만큼.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저 일이라는 느낌이 강해져서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너는 어때? 접촉만 해도 갈증이 좀 채워진다며. 그런 상태면서 왜 가이딩은 오늘 안 하려고 해?”

그와 각인이 됐다는 사실을 모르기 전에는, 괜히 가이딩 핑계로 유건의 손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유건이 나와 각인한 사실을 안다는 걸 의식하자,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참을 만해. 이런 일로 너 이용하는 것도 별로고.”

그 순간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을 정도로 유건의 시선이 한층 짙어졌다.

크리먼화는 피를 못 마시면 강제적으로 개방되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건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참으려면 참을 수 있는 충분히 견디려면 견딜 수 있는 영역이었다.

“왜. 가이딩 하고 싶어서 그래?”

따가울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에 다른 의도가 있을까 물었다. 그 말에 유건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의 체온이 내 손에 닿았다.

“이리 와 봐.”

“왜.”

“잠깐만.”

“뭐 하는 거야?”

그대로 자기 쪽으로 당기더니 폭, 끌어안았다. 내 양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 들렸다.

“나는 이렇게 하면 좀 낫던데.”

그가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틈 없이 껴안았다. 그의 힘차고 건강한 심장 고동 소리가 내 안에 울려 퍼졌다.

“불안감이란 게 에스퍼랑은 다르니까 별 소용 없으려나.”

달짝지근한 살 냄새와 파장이 몸을 서서히 감쌌다. 유건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내 소유의 피가, 내 먹이가 언제든 입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더불어 끓어 넘칠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맹렬한 기세로 흐르는 혈액이 느껴져 침이 고였다.

각인한 사실만으로 유건의 피에 지독한 소유욕이 일었다. 당장 내 손에 쥐고 흠뻑 적시고 싶었다.

원래 내 것인데 왜 못 마시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성과 욕망이 거세게 자기주장을 하며 내 안에서 다투는 느낌이었다.

“별로야?”

“아니, 잠깐.”

내가 아무 말을 않자, 유건이 다시 몸을 물리려고 했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등에 손을 붙이고 끌어당겼다.

“가만히 있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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