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7/131)

그렇긴 하다만…. 국현은 내가 사건의 범인을 쫓고 있다는 소문을 어디에서 들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한결에게 물증을 주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자신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린 건 확실한데….

내가 이 사건을 파헤치지 않았더라면 한결에게 물증을 줬겠지. 한결이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범인을 잡기 쉬웠을까.

“안 어울리게 왜 기가 죽고 그래.”

“…기 안 죽었어.”

“형이 먼저 범인 잡으면 범인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안 불안해?”

“그건 안 돼.”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지금도 한결은 국현이 정보를 공유해 준 덕분에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범인이 가이드를 쫓는 이유라든지, 핵이 작아지는 이유라든지, 범인이 정신계이자 B 지역 방출 게이트 사고로 사라진 연구원이라는 사실까지.

범인이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챌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크리먼이라는 사실 여부였다.

한결이 먼저 범인을 잡는다면 범인이 내가 크리먼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야기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가정이었다.

“큰일 난 것 같아. 선배가 뭔가 찾은 것처럼 말했잖아. 먼저 찾으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더 열심히 찾아다니자. 형보다 먼저 찾으면 돼. 뭣하면 형한테 숙소에서 좀 보자고 하고 몰래 살펴봐도 되고.”

“너무 티 나게 행동하지는 말자.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비밀을 들키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유건이 그렇게까지 했다가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한결은 무언가 있다고 의심할 것이다. 나와 같이 범인을 쫓는 것이 유건 또한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안다고 생각할 테니.

조금 전에도 회의실에서 잠깐이지만 한결은 유건을 의아하다는 듯이 주시했다.

한결이 나와 오래 안 사이인 만큼 내가 크리먼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과 비슷한 신체 능력을 가진 가이드로서 어긋나는 행동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급하다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간 되려 스스로 정체를 까발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유건이 안 그래도 나를 도와주는 입장인데, 되도록 위험한 일은 시키고 싶지 않았다.

“구사월 가이드 아직 별로 위기감이 안 느껴지시나 봐요.”

“무슨 소리야. 진짜 너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그래? 형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고?”

“내가 선배한테 미움을 왜 받아.”

한결은 유건 못지않게 나를 걱정하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도 내 행동을 막아서는 목적은 내 안전 때문이다.

그런 한결이 내가 좀 엇나가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아니 그의 말에 불복종한다고 해서 미워할 리 없다. 이건 자만이 아니라 한결이 그동안 내게 보여 준 행동에 기반한 당연한 결과였다.

차라리 징계를 내리거나, 함부로 못 돌아다니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지. 실제로 내가 막 크리먼이 되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을 때, 방출 게이트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핑계로 각성자와 가이딩을 하길 거부하자 별다른 말 없이 업무에서 제외해 줬다.

가이드가 가이딩을 할 수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텐데. 자그마치 6개월이나 배려해 주었다. 하물며 그때 나는 연차가 높지도 않았고, S급 가이드로서 명성을 쌓은 시기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아무리 S급 가이드라도 윗선이나 다른 각성자들에게서 불만스러운 의견이 나왔을 것이다. 사고 후 혹시 모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있을까 정신과를 다니긴 했지만,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었으니까.

한결은 그때도 방출 게이트의 사고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도 않았으며, 간혹 표정이 어두울 때면 옆에 있어 주는 게 다였다. 그가 나를 미워할 리 없다. 내가 크리먼만 아니라면.

“그리고 아까부터 왜 이렇게 사람을 들쑤셔? 안 그래도 심란한데 자꾸 속 긁을래?”

나는 확 짜증을 내며 말했다. 유건의 어딘가 비꼬는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

안 그래도 별것도 아닌 일로 주의받아서 신경 쓰이는데, 위기감이라느니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거 아니냐느니 헛소리나 하고.

“원래대로 돌아왔네. 나한테는 눈치 안 보고 말도 잘하면서.”

그가 일부러 내 신경을 건드렸다는 듯이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더 말을 얹었다.

“원래 할 말 못 할 말 다 하면서 센터 다니잖아. 형이랑 대화할 땐 뭔가 너 안 같아. 잘 말하다가도 하고 싶은 말 참는 것 같더라.”

“그거야 선배는 캡틴이니까.”

“형이 처음에 편하게 말 놓은 건 직급 생각하지 말고 대화하잔 거였잖아.”

나도 한결의 의도를 알았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적당한 핑계를 대는 것이 양심에 찔려서 한결에게 서운한 티를 내며 말한 것이다. 캡틴과 팀원 사이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결국엔, 한결이 크리먼 때문에 너까지 잃어야겠냐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유건 말대로 아무래도 나는 한결에게 약한 면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잘 보이고 싶을 테니까….”

“뭐라고?”

유건이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형 오기 전에 다른 방법 있다고 한 건 뭐였어?”

그러곤 급하게 말을 돌렸다. 별로 중요한 말 같지는 않아서 나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게….”

***

원래 유건에게 하려던 말은 지난번 이안이 말했던 범인을 끌어들일 미끼를 흔드는 짓이었다.

그러나 범인을 꾀어내려다 되려 한결이 걸려들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아주 정석적인 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방법은 일주일 동안 용의자의 숙소 앞에서 잠복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크리먼이라면 일주일에 1~3회 정도 흡혈하러 갈 테니까.

만약 한결이 알아챈다고 해도 주의를 주기 어려운 일이었다. 겉으로는 그저 유건과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는 일일 테니.

한 가지 걸리는 건 유건이 용의자 몰래 목 뒤에 위치 추적 기능을 탑재한 새끼손톱 크기의 녹음기를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걸린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방법 중에선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일찌감치 퇴근하고 만났다. 유건과 내 차가 눈에 띄는 차량이기에 유건의 친구 차까지 빌려서 잠복 중이었다.

녹음기로 드르렁거리는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다른 에스퍼들은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애인도 만나던데.

이번 에스퍼는 집에 돌아오면 잠을 자기 바빴다. 게다가 한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아서 지루하고 따분했다.

‘센터 일이 그렇게 고단한가.’

프로필을 확인해 보니 센터에 들어온 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은 신입 에스퍼였다.

‘그러니 이렇게 자지.’

아직은 적응하기에도 힘든 피로한 시기였다. 또한 정신계는 뇌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몸보다 정신적인 피로도가 빠르게 축적돼 잠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A급 정신계 에스퍼인 국현은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고 들었다. 저번에 봤을 때 어딘가 피로해 보였던 걸 생각하면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일정한 코골이를 들으니 나도 슬슬 눈이 감겼다. 고개를 흔들며 잠을 몰아내려 애를 쓰는데, 유건이 그런 내 행동을 본 건지 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졸리면 좀 자. 내가 보고 있을게.”

“아니야. 안 졸려.”

“아니긴.”

요즘 금단 현상 때문에 불면증이 심해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잠복하면서 밤을 새우자고 그랬는데.

시간을 보니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졸려서 죽을 것 같았다.

하품하며 충혈된 눈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금단 현상을 참기 위해 입가심하려고 챙겨 온 초콜릿을 꺼냈다.

A지부 앞에 파는 유건의 피와 가장 닮은 향이 나는 수제 초콜릿이었다. 윤기 나는 포장지로 싸여있는 구 모양 초콜릿 안에는 혀가 아릴 정도로 쌉쌀하고 단 초콜릿과 과일 농축액이 담겨 있었다.

입 안에 넣고 깨물어 조각을 낸 다음 녹여 먹는데, 옆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아니….”

유건이 입을 막으며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지워 냈다. 묘하게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뭔데.”

초콜릿을 하나 더 입에 넣으려 하자, 이번엔 티가 나게 풉, 하고 웃었다. 내가 가자미눈을 하고 쏘아보자 그가 완전히 창으로 고개를 틀었다.

“설마… 내가 이것도 말했어?”

“…….”

유건이 답이 없었다. 그러나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방금 꺼낸 초콜릿을 다시 포장지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술이 웬수였다. 어쩌다 이 초콜릿 얘기까지 꺼낸 건지.

필름이 끊긴 날, 유건에게 각인에 대해 얘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다. 최근 날 괴롭게 만드는 일 중 하나였고, 각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그 밖의 다른 말들도 많이 한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얘기까지 했을 정도면 각인에 대한 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갈증이 나서 목이 타는데 침도 함부로 삼킬 수 없어 답답했다.

초콜릿을 가방에 집어넣는 소리에 유건이 반응하듯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냥 먹어. 참기 힘들잖아.”

“됐어.”

“그럼 나도 하나 줘 봐. 무슨 맛인지 보게.”

“싫어. 네가 사 먹어.”

나는 그의 손이 닿지 않게 조수석 문 쪽에 가방을 바짝 끌어다 놨다. 그가 몸을 기울여 몇 번 헛손질하다가 됐다는 듯 다시 허리를 세웠다.

“치사해.”

토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얼굴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나도 숙소에 그 초콜릿 있어. 3세트씩이나.”

저 초콜릿이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긴 했지만, 3세트나 쌓아 두고 먹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그가 저 초콜릿을 많이 먹어서 피에서 그런 맛과 향이 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세트씩이나 쌓아 둘 정도로 좋아하면서 왜 무슨 맛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하지?

“왜냐고 안 물어봐?”

나는 가만히 유건을 주시했다. 유건이 괜히 그날 내 흑역사에 대해 놀려 먹을 것 같아서 그와 관련된 질문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정말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정말 만약에라도 초콜릿을 많이 먹어서 비슷한 향이 나는 거라면, 반대로 조금 먹으면 단 향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왜?”

나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물음에 유건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드디어 걸려들었다는 듯 웃어 보이는 표정에 공연히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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