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6/131)

불안과 걱정으로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유건이 불현듯 내 팔을 붙잡으며 한결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내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조그맣게 속삭였다.

“말 맞추기 어려우니까 묻는 말에 한 사람만 대답하자.”

좋은 생각이었다. 지금은 말을 맞출 시간도 없었다. 괜히 어설프게 대답이 엇갈렸다간 의심을 살 것이다.

“그래.”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할게.”

내가 대답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다시 한결 뒤로 따라붙었다. 센터 회의실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안이 다 보이는데, 그중 대회의실에 사람이 가득했다.

한결은 원래 그곳으로 가려 했는지, 사람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바닥을 보이곤 그 옆 회의실로 들어섰다.

유건과 나는 한결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너희 요새 뭐 하고 다녀?”

한결은 많이 바쁜지 어떠한 서론도 없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많이 당황하지는 않았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한결에게 비밀로 하고 움직이더라도, 한결은 언젠가는 다 알아챘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아는 건지는 모르지만, 예전부터 수많은 알파 팀 각성자들이 무슨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무서울 정도로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으니까.

“그때 말했다시피 백유건 에스퍼는 제 경호 임무를 맡아 함께하고 있고, 저는 신입 교육이랑 가이딩 중점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거 말고.”

한결이 나긋하게 웃었다.

“그거 말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그가 웃고 있지만 되레 무섭게 느껴졌다. 어설프게 둘러댔다가는 언제든 태도를 싹 바꾸며 돌변할 것만 같았다.

“캡틴은 왜 숨겼어요?”

그러나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못마땅했던 부분을 따졌다.

“뭘?”

한결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더욱 깊게 따져 물으려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스스로 밝혀야 하므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가이드 습격 사건 관련해서 지국현 에스퍼 찾아갔잖아요.”

어차피 이 주제가 거론된 이상 어물쩍 넘어갈 순 없었다. 여기서 내가 말을 못 한다면 훈계만 듣다가 나와야 할 것이다. 한결이 어디까지 알게 됐는지 나 또한 궁금하던 참이었다.

“사월이 넌 그 임무 배정 안 됐으니까 공유할 의무는 없지.”

“그렇다기엔 백유건도 모르던데요?”

한결은 잠시 유건에게 시선을 보냈다. 유건은 약속대로 저의 이름이 거론됐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 말고 이 임무에 방해자가 있는 것 같아서 개인으로 움직였어.”

“비밀리에 움직일 거면 우리가 찾아 나서도 상관없잖아요.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냈어요?”

“왜 상관이 없어. 네가 아무리 피해자 입장에서 범인을 잡고 싶다고 해도 너는 가이드잖아. 범인은 정신계 크리먼이야. 범인을 쫓다가 되려 또 당하면 어쩌려고 찾아 나서?”

“그래서 백유건이랑 같이 다니는….”

“유건이는 경호하라고 붙여 놓은 거야. 너와 범인을 쫓으라는 게 아니라. 너는 이 사건에서 손 떼.”

한결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내 말을 잘라 냈다. 역시 한결은 범인이 정신계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 조사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지, 범인에 대한 가닥은 좀 잡힌 건지. 자세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결의 강경한 태도를 보니 앞으로도 내게 어떤 것도 공유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이드는 힘이 없으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에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인 가이드라면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으니 그의 말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나는 크리먼이다. 나 또한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기에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한결은 내가 크리먼인 걸 모르니 한 말일 테지만, 억울하고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주변에 이상한 일 벌어져서 불안하단 말이에요.”

한결에게 내가 크리먼인 걸 말할 순 없으니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답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불안함을 내비쳤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증명해야 했다.

그도 평소답지 않은 내 행동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무슨 일? 아쿠아 플래닛 사고 말고 다른 일이 있었어?”

한결은 내 말에 곧바로 예민하게 물어왔다.

“아니요. 아쿠아 플래닛에서의 사고 말하는 거였어요.”

공원에서의 추격전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CCTV를 확인했을 때 작게라도 크리처화를 한 걸 알아챌 수도 있는 일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아무래도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한결은 잠시 눈매를 좁히며 예리하게 주시하더니, 되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차분하게 기다려 줄 수 없어?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거 알잖아.”

한결은 전보다 감정을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 또한 한결이 저렇게 다정하게 말할 때면 매번 전투력이 꺾였다. 그가 B 지역 방출 게이트 사고 이후로 내 안전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걸 알아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오빠 좀 믿어. 내가 꼭 잡을게.”

“…….”

“내가 크리먼 때문에 너까지 잃어야겠어?”

여전히 내가 알겠다고 말하지 않자, 한결이 과거의 일까지 입에 올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한결도 말실수를 한 것처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발 조금만 참아 줘. 곧 꼬리를 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뭔가… 알아낸 건가요?”

내가 기대감을 슬쩍 내비치자, 한결은 옅게 미소 지었다. 뒤늦게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크리먼까지 들먹이며 부탁했건만, 전혀 이 사건에 손을 떼지 않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유건 에스퍼.”

그는 대답 대신 돌연 유건을 불렀다.

“예, 캡틴.”

“앞으로 구사월 가이드가 경호 외에 다른 요청 하면 거절하세요. 명령입니다.”

“선배.”

치사하게 명령하다니. 한결은 팀의 캡틴이기에 저렇게 명령조로 말한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거절하거나 대답하지 않는 순간 명령 불복종이기에 단순한 징계 사유가 아니라 처벌 사유까지 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유건은 캡틴으로서 이야기한 한결의 말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명령을 받아들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눈가가 찌푸려졌다.

“구사월 가이드도 백유건 에스퍼 곤란하지 않게 집중 보호 대상인 거 인지해 주세요. 구사월 가이드에게 사고가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백유건 에스퍼에게 있는 겁니다.”

“그게 왜….”

“그리고 첫 습격 때 구사월 가이드는 백유건 에스퍼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백유건 에스퍼가 지켜 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문이 돌까요.”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원래는 용의선상에 올라간다.

첫 습격 때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해서 유건은 용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런 상황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면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아들었을 거라 믿습니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자, 한결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팀 분위기 흐리지 않게 근태 신경 씁시다. 그럼 다른 회의가 있어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어찌나 칼 같은지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한결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명령했으면 해결될 사안을, 굳이 대화로 풀어내려 했던 거였다.

그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지그시 손으로 쥐었다가 뗐다.

자신이 한 말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담긴 복합적인 의미의 접촉이었다.

“우리도 나가자.”

한결이 나갔는데도 내가 한동안 자리를 지키자 유건이 일어서며 말했다.

“사무실에 가방만 놓고 바로 나와. 캡슐에서 얘기 좀 하게.”

유건은 원래 가방을 안 들고 다니기에,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우리가 지나왔던 복도로 향했다.

오늘 아침부터 평소의 생활 패턴이 깨져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한결과의 대화로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알파 팀에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는데, 한 번 실수한 것으로 주의하라고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한결이 센터에서 빡빡하다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고 완벽주의인 걸 알지만, 그 화살이 나를 향하니 되려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야….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체념하듯 한숨을 쉬며 회의실을 나왔다. 원래는 한결이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기에 부딪힐 일이 없었다.

제게는 항상 너그러웠던 그에게 꾸중을 들어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범인은 어차피 내가 아직 크리먼인 걸 모를 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닐까. 진전이 없으니 더욱 내 행동에 회의감이 들었다.

***

“뭘 다 대답해 주고 있어. 알겠다고 하고 움직이면 그만인데.”

“그래도 너한테 피해 갈지도 모르잖아.”

“상관없어.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캡슐 안으로 들어왔다. 유건은 한결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타격이 없는 얼굴이었다.

군법을 잘 모르는 건지, 한결이 유건을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건지. 설마,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유건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아니. 솔직히 선배가 말하는 거 짜증 나서. 크리먼인 걸 말할 수 없으니까 제대로 반박을 못 하겠네.”

“착각할 뻔했네. 말이라도 예쁘게 해 주지.”

유건이 서운하다는 듯 웃었다.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싶어 뒤늦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너도 조금 신경 쓰이긴 해.”

“뭐라고?”

“너도 신경 쓰인다고.”

“엎드려 절 받았다. 그치?”

빈정대는 말과는 다르게 유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만연했다. 장난기 있는 목소리는 처음부터 못 들어서 물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유건이 한결의 명령을 어긴데도 한결이 묻어 줄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괜히 집안싸움을 시키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내자, 유건이 흘깃 쳐다봤다.

“그렇잖아. 선배는 혼자 움직이는데도 뭔가 찾은 것 같은데, 우린 아무것도 없고.”

“왜 없어. 지국현한테 물증도 받았잖아.”

“그건 운이 좋았어.”

“운도 실력이야.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운은 아니지. 서로 원하는 바가 맞아떨어졌으니까. 가이드인 너랑 거래하고 싶어서 형한테 증거를 안 넘긴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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