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5/131)

막 크리먼이 됐을 때도 힘들었지만 잘 참아 왔고, 정 참지 못하겠으면 당분간만 유건을 만나지 않는 것도 방법이리라.

-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갈증이 심해지면 사탕이나 껌 같은 거 씹어 봐. 아니면 유건이 피와 비슷한 맛이 나는 피를 마신다거나.

“백유건 피랑 비슷한 피가 있을 리….”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대답하다가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유건의 피를 처음 접했을 때 홀린 듯이 찾아간 센터 앞의 수제 초콜릿 집이 떠올랐다.

거기 파는 초콜릿이 유건의 피와 냄새가 무척 비슷했다. 맛은 한참은 떨어지지만, 대체 식품은 될 것 같았다.

“일단 알았어. 알아봐 줘서 고마워, 에밀리.”

- 내가 뭘. 오늘 ‘식사’하러 올 거지?

“어. 백유건이랑 갈 건데 걔한테는 각인 얘기 비밀로 해 줘. 부탁할게.”

- 당연하지.

에밀리와 시간 약속을 잡고 통화를 종료했다. 머릿속이 심란했다. 내가 유건의 피를 몇 번이나 마셨더라.

처음 매칭률 테스트했을 때 그리고 유건의 숙소에서 싸우다가 억지로 내가 빨아들였을 때, 제일 최근은 내 숙소에서 가이딩을 함께 진행하면서 마셨다.

고작 3번밖에 안 마셨는데 이럴 수 있나.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아니면 횟수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매칭률 테스트 때는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두 번째는 유건이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셨고, 세 번째도 잠결에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몸 안에 생명력이 가득찬 걸 느낄 정도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매칭률과도 연관이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 만에 중독되고 각인까지 됐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됐다.

“휴….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어쩔 거야. 이미 벌어진 일인데….”

답답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어느새 멀리서 소독을 마친 유건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여전히 피는 덕지덕지 묻힌 채였다.

의식하고 나자 그의 다디단 향이 저 멀리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옷에 크리처 피도 섞여 있을 텐데도 유건의 혈 향만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나도 모르게 코를 손으로 막으며, 유건이 가까워질수록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또 코를 막아. 하지 마. 나 트라우마 생길 것 같단 말이야.”

유건이 내 행동을 보고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유건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코를 막았었다.

그때 내가 이 녀석 피에 잔뜩 굶주려 환장한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이런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피를 내어 줄 때 거절했다면. 각인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선 모두 쓸모없는 가정이었다.

“씻고 와.”

“응?”

“씻고 오라고.”

어쨌든 지금이라도 안 게 다행이었다. 마침 유건이 내 핵과 관련해 피를 주기 싫어하니 시기도 적당했다.

이제부터 안 마시면 된다.

“시간 없잖아. 오늘 에밀리 집 가기로 했지? 거기서 씻으면 안 돼?”

“안 돼. 빨리 가서 씻고 와. 안 씻으면 나 혼자 갈 거야.”

그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센터 샤워실로 돌아갔다. 자연스레 그의 뒷모습을 좇는 내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니, 아쉬운 감정마저 들었다.

“진짜 미쳤나 봐, 구사월.”

***

급하게 나온 탓에 제 모습이 어떤 상태인지, 두고 온 물건은 없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숙소도 들리지 않고 바로 에밀리 집에서 자고 오느라 같은 제복 차림이었다.

겉옷은 상관없지만, 안쪽에 입은 티셔츠 때문에 찝찝하게 느껴졌다.

“이리 와 봐. 머리 뻗쳤어.”

“어디.”

“이리 와. 내가 해 줄게.”

유건이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정리해 줬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이라 엘리베이터에는 단둘뿐이었다.

알파 팀에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는 나인데.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평소보다 느리게 올라가는 듯한 착각에 층수를 초조하게 바라봤다.

“너라도 알람 맞추고 잤어야지.”

“미안. 깜빡했다.”

“다시는 안 마셔.”

이렇게 된 건 어제 에밀리와 유건의 꾐에 넘어간 탓이다.

여느 때와 같이 에밀리와 유건은 술판을 벌였는데 이내 둘만 마시기 지루했는지, 크리처화해서 해독시키면 되지 않냐는 둥, 집이니까 취해도 안전하지 않겠냐고 온갖 이유를 대 가면서 내게 술을 권했다.

결국, 크리처 피에 이름도 모르는 술을 두 가지 정도 섞어 줬는데, 그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버렸다.

크리처화를 개방해서 알코올을 해독할 겨를도 없었다. 머리가 좀 띵한 것 같더니 곧바로 암전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다 같이 잔 건지 모두 거실에 있었는데, 나와 유건은 껴안고 있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건이 안은 게 아니라 내가 그의 품을 파고들어 있었다. 그의 옷 위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면서 집착적으로.

“그래, 너는 어디서 술 마시면 안 되겠더라.”

“너희가 이상한 거 탄 거 아니야? 나 원래 그렇게 술 안 약하단 말이야.”

“그럴 리가. 오랜만에 마셔서 훅 간 거겠지. 우리도 같은 거 마셨어.”

“거짓말….”

“손바닥은 다 나았네?”

“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속이 안 좋아서 크리처화를 개방해 숙취를 없앴다. 그래서 그 잠깐 사이에 아문 모양이었다. 일반인이라면 흉터가 남겠다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깊은 상처가 났었는데.

그나저나 한 모금 마시고 취해 버리다니. 혹시 내가 지금 유건의 피에 중독돼서 각인 상태라 그런 거 아닐까.

술을 마시기 전 이것저것 섞인 크리처 피를 보며 선뜻 마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건이 와인 잔에 손을 겹치며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유건이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어서인지 체향이 짙게 느껴졌다.

유건의 피를 마신 이후로 다른 피들이 밍숭맹숭하게 느껴져서 안 그래도 그의 피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중이었다. 몸이 유건의 피인 줄 착각하며 흡수를 도왔다면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각성자의 각인도 각인된 상대의 파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흡수력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니까.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유건의 피를 마신다는 생각만으로 흡수력을 높이는 몸뚱어리가 주책맞게 느껴졌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준비를 단단히 마친 것이 아닌가.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한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어딘지 불안한 마음에 유건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 어제 이상한 말 안 했지?”

“무슨 말?”

내 머리카락은 진즉에 정리가 끝났을 텐데, 유건이 계속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특유의 순수해 보이는 말간 표정이었다.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아서 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니야. 실수한 거 없으면 됐어.”

“실수라긴 뭐하지만 뭔가 말하긴 했지.”

“뭐?”

“음.”

유건이 낮게 침음하며 뜸을 들였다. 지각하기도 했고 어제 있었던 일이 기억이 안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나에 반해 유건은 내내 여유로웠다.

에스퍼는 게이트 때문에 외근이 많으니, 출근 시간에 그렇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았다.

“뭔데.”

그 잠깐을 못 참고 재차 묻자 유건의 입꼬리 한쪽이 짓궂게 호선을 그렸다.

“궁금해?”

유건이 안 그래도 미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여서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떠보는 걸 보면 분명 내가 어제 뭔가 말한 모양인데.

“됐어. 안 궁금해. 말하지 마.”

장난기가 다분한 어조에 나는 태도를 바꾸며 관심 없다는 듯 그를 외면했다.

“그래.”

그도 물어보지 않는다면 굳이 대답할 생각은 없는 건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술주정을 했다면 들어봤자 부끄럽고 창피할 뿐이고, 유건에게 만약 각인에 관한 얘기를 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도 내게 요즘 피를 주지 않으려 하고, 나 또한 피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본능적으로 어제 유건의 피를 빨고 싶어서 옷을 씹은 것 같지만, 술에 취해서 크리처화 개방이 안 된 탓에 피를 못 마신 것이 다행이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갈증을 참아 내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몸인데 스스로 제어가 힘들다는 사실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유건의 피에 몸이 반응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막막함을 느끼는데, 엘리베이터가 알파 팀 사무실이 있는 13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내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것보다 다른 방법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일단 각인에 대한 문제를 제쳐두고, 범인을 잡기 위한 새로운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게 어떨지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코너를 돌아 알파 팀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누군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오나 보네?”

한결이었다. 한 손에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막 회의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캡틴.”

딱딱하게 굳은 내 태도에 비해 유건은 한결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시간은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침이라기엔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캡틴.”

뒤늦게 작은 목소리를 내며 지나쳐 가려는데, 한결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우리가 지나간 방향으로 빙글 돌아섰다.

“구사월 가이드.”

“네, 캡틴.”

한결이 나를 부르는 순간 목덜미가 빳빳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백유건 에스퍼.”

“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둘 다 잠깐 면담 좀 할까?”

“따로따로요?”

“아니, 같이.”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한결은 센터에서 우리에게 항상 존댓말을 했는데, 말을 놓는 것부터 무척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쁜가?”

“아닙니다. 어느 회의실로 갈까요?”

“따라와.”

유건과 나는 결국 알파 팀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눈치를 보면서 한결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잘못을 저질러서 교무실에 끌려가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한결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몰래 국현을 만나고, 퇴근 후에 다른 지부 정신계 에스퍼를 쫓아다녔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이유가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결의 태도를 보면 분명 좋은 이유로 우리를 부르는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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