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럼 그렇지.”
나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럼 그렇지’라니. 이번엔 진짜 그럴듯했다니까?”
무시하듯 대꾸하자, 유건이 억울해하며 말했다.
“그럴듯하긴 뭐가 그럴듯해. 그렇게 대놓고 들이대면 범인이 다가오다가도 도망가겠다.”
“아니야. 들어 봐.”
유건의 말은 이러했다. 운이 좋게 게이트에서 용의자 리스트에 있는 C급 정신계 에스퍼와 한 조로 움직이게 됐는데, 유건이 일부러 크리처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니까 굉장히 뜨거운 시선으로 계속 주시했다고.
“그래서 게이트 파훼하고 나서 ‘식사’하러 가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러자고 자기 숙소로 가자는 거야. 완전 빼박이잖아.”
“음. 그래서?”
그건 일반적인 에스퍼라면 조금 이상한 전개이긴 했다. 유건과 그 에스퍼는 초면이었는데, 식사를 수락한 것도 그렇고, 밀폐된 공간인 자기 숙소로 데려가다니.
“숙소 갔는데 진짜 식사를 차려 주더라? 일단 먹었어. 밥 먹으면서 은근히 떠보는 것처럼 원래 아픈 거 잘 참는지, 아니면 즐기는지 같은 걸 물어보길래 조심스러운 건가 싶어서 그렇다고 했어.”
크리먼들은 원래 들키면 신변이 위험하므로 은밀하게 행동한다. 유건은 그가 에둘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질문이 좀 이상하지 않나? 즐기냐고 왜 물어봐?’
나는 의문이 생겼지만 일단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었다. 이미 범인을 색출해 내는 데 실패했다는 대답을 들어서 그런지, 그저 흥미진진한 일화를 듣는 기분이라 범인을 찾을 거란 기대감은 없었다.
“대답 듣자마자 엄청 화색이 도는 거야. 막 손도 떨고 입맛도 다시고. 엄청 흥분한 사람처럼. 그럼 자기 방으로 먼저 가 있으라고 자기는 준비 좀 하고 오겠다고 해서 기다렸지.”
“아, 잠깐….”
나는 돌연 기시감을 느꼈다. 나도 유건을 저런 식으로 오해를 했던 적 있는 것 같은데.
유건이 정말 고통을 즐기는 건지, 나로 인해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뜬 건 아닌지 같은, 그런 의문 말이다.
“아니, 들어 봐. 무슨 철그렁거리는 소리랑 부딪히는 소리 나길래 뭔가 싶었는데, 무슨 기다란 채찍이랑 수갑을 가져오더라고. 보자마자 도망 나왔어.”
역시나. 아주 절망적인 엔딩이었다. 에스퍼는 게이트에서 유건이 일부러 상처를 입은 것을 알아챈 것이다.
마침 그 사람은 SM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유건이 같은 취향인 줄 착각한 것이다. 특이한 성벽을 가진 이들 또한 은밀하게 행동하긴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 정신계 에스퍼 남자라고 하지 않았나….’
에스퍼가 에스퍼에게 호감을 느끼다니. 남의 취향을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유별난 케이스였다. 보통 에스퍼는 파장 때문에 가이드에게 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됐어. 기대도 안 했어. 그 방법은 좀 아닌 것 같아. 다른 방법 찾아보자.”
나도 이 방법을 써먹다가 돌아온 이안의 행동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여러모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방법이었다.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생각났는데….”
막 유건에게 이안과의 대화로 떠오른 방법을 전하려는데 주머니에서 부르르, 하며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서 액정을 바라보니 에밀리였다. 유건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바닥을 보이곤 전화를 받으려 하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내 손을 쥐었다.
“이거 뭐야. 너 왜 다쳤어?”
- 사월아. 지금 통화 돼?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버린 건지, 휴대폰에서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센터에 있을 때 전화를 잘 걸지 않기에, 일단 유건을 제쳐두고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응. 왜?”
- 네가 그때 물어봤던 거 말이야. 몸이 요새 이상하다고 했던 거.
“어. 에밀리, 잠깐만.”
거짓 갈증에 대한 내용이었다. 유건이 잡은 손을 빼서 손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안 때문에 상처를 입힌 생채기가 생각보다 깊게 패어 있었다.
하지만 크리처화 한 번이면 금방 아물 상처였다. 유건에게 유난 떨지 말고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도 방금 센터에 도착했으니 어차피 소독하러 가야 했다. 유건이 약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입 모양으로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서 받으라는 말하곤 뒤돌아섰다.
한산한 곳으로 갔다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할까 봐 우려되는 모양이었다.
“응, 에밀리. 뭔가 알아냈어?”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에밀리에게 물었다.
- 각인이야.
“뭐라고?”
- 각인이라고.
그녀는 무척 간결하고 명쾌하게 말했다. 마치 지금껏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하게. 반면 나는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같은 피를 일정 기간 계속 섭취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난대. 보통 크리먼들은 같은 피를 마실 일이 별로 없어서 잘 몰랐던 거고.
“근데 각인은…. 가이드랑 에스퍼나 하는 거 아니야?”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를 묶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페어고 나머지는 각인이었다.
각인을 하면 가이딩 효율이 가장 많이 높아지며, 전해 듣길 에스퍼는 각인한 가이드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가이드에게 신경이 곤두서고 소유욕이 심해져 집착하게 된다. 언뜻 보면 장점이고 낭만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집착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각인과 관련된 뉴스에서 에스퍼가 폭행이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헤드라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걸 보면 말 다 했다.
사이가 좋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관계이지만, 관계가 틀어졌을 때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래서 각인은 상대 각성자와 평생을 함께할 목적으로 맺는다. 페어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서로 이득을 취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면, 각인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결혼과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각인을 하는 과정은 결혼처럼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매칭률이 50% 이상이어야 가능하며, 3단계 가이딩을 진행해야 한다. 조건을 모두 충족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게 각인이다.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서도 그렇게 힘든 각인이 고작 같은 피를 일정 기간 섭취했다고 맺어지다니. 아니, 애초에 크리먼이 각인을 했다고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사실 이런 경우가 드물어서 명확한 명칭도 없나 봐. 어떤 사람은 단순하게 ‘중독’이라고 부르고 ‘각인’이라고도 부르는데, 내 친구는 단순 중독 증상이라기엔 피에 대한 소유욕이 생긴다는 점에서 ‘각인’이라는 단어가 더 맞을 것 같다고 말했어. 각인된 상대를 자신의 유일한 먹이라고 인식한대.
일반적인 크리먼들은 크리처의 고기에서 피를 추출해서 마신다. 매번 다른 크리처의 고기일 테니 같은 피를 마실 일이 없다.
사람을 습격하는 크리먼들은 그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피를 흡혈한다. 한번 사람의 피를 맛보면 흡혈 욕구를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처럼 상대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고, 흡혈 대상의 피가 다시 재생되면 마시는 크리먼은 드물었다. 그러니 안 그래도 협소한 크리먼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더불어 이 증상에 대해 중독인지 각인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중독은 무언가에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각성자의 각인은 폭발적인 파장의 결합으로 원래 하나의 몸이 둘로 찢어진 것처럼 서로에게 집착하게 된다.
걸리는 과정만 보면 중독이 맞지만, 에밀리 말대로 피에 대한 소유욕이란 건 각인에 더욱 가까운 증상이었다.
그래서 에밀리의 친구는 각인이 더 맞는 단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중독이 먼저고 각인은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유건의 피에 중독되어 각인이 맺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증이 날 때 붙어 있고 싶은 사람은 항상 유건이었고, 다른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다.
내 숙소에서 유건의 피를 마신 다음 날, 유건이 내게 잘해 주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얘는 마땅히 내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사실만 보면 유건이 나와 매칭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페어도 그만두었으니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 모든 기이한 감상이 내가 유건의 피에 중독되어 그에게 각인했다는 증거였다. 그를 내 먹이라고 인식하니, 내가 그렇게 편하게 대하고 격 없이 손을 잡고 같이 있으면 안정을 느끼는 것이다.
“…미치겠다.”
나는 꼬리를 물고 다다른 결론에 작게 탄식했다. 이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모로 보나 각인이 맞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이거 못 끊는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했다. 각성자는 한번 각인을 하면 몸에 새겨진 파장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죽어서도 서로에게 종속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혹자는 각인을 ‘영혼의 서약’이라고 불렀다.
- 아니. 크리먼의 각인은 걸리는 과정이 중독 현상과 비슷하잖아. 끊어 내는 것도 같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보통 각인된 상대의 피를 마시지 않고 3주 정도 지나면 자연히 사라진다더라.
나는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유건이 싫은 건 아니지만, 평생 그에게 종속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입을 빌려 말하길 우린 고작 ‘제일 가까운 동료’일 뿐인데.
- 근데 너 유건이 피 마지막으로 마신 지 얼마나 됐어?
“왜?”
- 2주째가 제일 금단 현상이 심할 거래. 지금은 그냥 몸이 닿아 있으면 갈증이 풀리는데, 금단 현상이 심해지면 다른 피를 마셔도 마셔도 각인된 대상의 피를 갈구할 거라고 그랬어.
나는 에밀리의 말을 듣고 유건의 피를 마지막으로 언제 마셨는지 세어 봤다. 게이트가 발생한 지 일주일 좀 안 됐으니까 유건의 피를 마신 지 6일이 지났다. 다음 주가 2주째니 여기서 더 심해진다는 말이었다.
‘지금도 유건과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갈증이 심해져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되는데….’
앞으로도 그와 함께 행동해야 할 일이 많아서 조금 걱정이 됐다.
“백유건 피를 안 마신다고 크리처화가 억지로 개방되는 건 아니지?”
- 응. 다른 피 마시면 절대 크리처화는 개방 안 돼.
“그럼 됐어.”
금단 현상으로 느껴지는 갈증은 어쨌거나 거짓 갈증이었다. 갈증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도 크리처화가 멋대로 개방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 같은 건 의지로 참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