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3/131)

나는 눈을 치켜떴다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안이 평소처럼 예의를 가장한 미소를 머금고 옆자리에 앉았다.

“요즘 바빠 보이던데. 뭘 하고 다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알고 있던 거 아니에요? 저 미행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언뜻 그가 내 메시지를 보고 쫓아다니는 걸 그만두었기에 내 행적을 모르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가 몰래 지켜보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면 아마 답장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나를 며칠째 피하는 것처럼 코빼기도 안 비출 게 아니라.

“말은 제대로 하죠. 미행은 몰래 뒤를 밟는 거고, 저는 엄연히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경호를 하는 겁니다.”

“그게 뭐든 메시지 보냈다시피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 제가 최근에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정말 제게 연락을 하셨군요?”

그는 역시 메시지를 못 본 거였다. 아니,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수리를 맡길 걸 그랬습니다.”

정말 미처 몰랐다는 듯 아쉬워하는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됐고, 그래서 계속 경호를 빙자한 미행을 계속하셨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그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구사월 가이드가 워낙 유명해서 저 말고 다른 경호 에스퍼가 붙었다고 소문이 났더군요. 그래서 안심하고 제 볼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시길래.”

방금 미행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오늘만 혼자 있던 걸 어떻게 안 거지….

“그 경호 에스퍼는 어디 갔습니까?”

“게이트요.”

“경호는요?”

“잠깐 갔다 오는 거예요. 금방 돌아온다고 했어요.”

상대를 심리적으로 위협하여 크리먼인지 확인하는 건 첫날 이후로 그만두었다. C급 정신계만 노려 공격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면 조사가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C지부 기숙사에서 출퇴근하는 용의자는 어떻게 살필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D3 구역에 발생한 게이트에 용의자가 참여한다고 해서 유건이 현장에 갔다.

피로 유혹해 보겠다는 이상한 말을 하던데. 또 허무맹랑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급하게 가서 나도 그가 뭘 한다는 건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나는 게이트를 파훼하기 전에는 게이트 근처에 접근 권한이 없어서 센터에서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업무 태만이네요. 이 위험한 센터에 S급 가이드를 혼자 두다니.”

“센터 한복판에 크리처라도 나타난답니까?”

나는 이안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얼마 전 기숙사 앞에 있는 공원에서 추격전이 있긴 했지만, 그건 주변에 사람이 없고 한밤중이었다.

지금은 주위에 각성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만약 크리처가 나타난다 치더라도 금세 제압할 것이다.

“크리처보다 더 무서운 게 나타나죠.”

내가 어디 말이라도 들어보자는 것처럼 힐끗 바라보자, 이안이 자못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먼.”

“…….”

“이 중에 크리먼이 숨어 있을지 누가 압니까?”

또 장난질이지, 이 새끼.

“망상이 지나치시네요.”

“글쎄요, 그냥 망상일지…?”

이안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망상입니다.”

더 이상 그의 말에 장단 맞춰 주고 싶지 않아 내가 그를 무시하며 대답하자 그가 더한 말을 덧붙였다.

“저는 가끔 인류의 최종 지배자는 크리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나 쳐다보는데,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

“크리먼은 에스퍼의 초능력과 가이드의 재생력을 가진 완전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또한 가지고 있죠. 주기적으로 피를 마신다면 능력을 활용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피를 마셔야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제약입니다.”

“그렇더라도 에스퍼처럼 가이드의 파장만 취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생물의 피’라는 조건은 에스퍼보다는 리스크가 훨씬 낮습니다.”

그건 사회의 인식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크리먼의 리스크는 사회에 속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성이 있기에 크리처보다는 초능력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각성자보다 혹은 인간보다 더 우월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에 신뢰에 바탕을 둔 체계를 쌓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선, 오로지 공포와 힘으로 통치하는 독재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보여 주듯, 독재 정치는 언뜻 견고해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정치 체제이다.

권력에 반하는 사람을 강제적으로 찍어 누르고 탄압하면, 다수의 시민에게 불만을 살 수밖에 없다.

반대파가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해야 하는데, 불신으로 이루어져 위태롭게 유지하는 체제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결국 서로를 뜯어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크리먼 우호 주의자입니까?”

인류의 최종 지배자가 크리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다니. 그가 간혹 위험한 가설을 세우긴 했지만, 이건 사상을 의심해 볼 만한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저 흥미로운 논제를 두고 토론하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매번 왜 이런 식으로 스스로 의심을 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는 의도인 건 이제 알겠다. 그런데 그 자극하려는 목적이 단순히 내 반응이 재밌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불쾌할 지경에 다다랐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극하지 않아도 유의미한 진전이 없어서 답답한 상황이다. 조급함에 점점 쫓는 방식도 조심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거 한번 막 나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능글맞게 사람 속이나 살살 긁어 대는 상대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싶기도 하고.

나는 제복 가슴 위치에 달린 센터 문양의 배지를 빼냈다. 뾰족한 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손가락으로 살살 문대 보다가, 손바닥을 푹 쑤셨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안이 갑작스러운 내 자해 행동에 미간을 구겼다. 날을 옆으로 조금 그었다가 떼자, 금방 새빨간 혈액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드실래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손바닥을 내밀며 여상하게 물었다.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 유건이 게이트에서 정신계 에스퍼에게 시도할 방법이었다. 유건은 이렇게 대놓고 묻는다곤 안 했지만, 목적은 같지 않은가.

크리먼이라면 공기 중에 노출된 뜨끈뜨끈한 혈액에 군침이 돌기 마련이다. 그가 크리먼이 아니더라도 마치 크리먼인 걸 시험해 보듯 간 보는 행동에 기분이 상하기를 바랐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이안의 입가에 웃음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분명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런 반응에도 손을 물리지 않고 주시하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시리도록 차가운 벽안에 희미한 냉기마저 돌았다. 눈싸움하듯 서로를 노려보는데 불현듯 그가 내 손바닥을 쥐더니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그가 이 사이로 혀를 내더니 상처를 길게 핥아 올렸다. 쓰린 감각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저 골리려는 의도였는데 그가 흘러내리는 피마저 아깝다는 듯이 샅샅이 핥아먹고 있었다. 뱀처럼 긴 혓바닥이 눅진하게 살을 눌러 왔다.

하지만 크리먼의 뾰족한 이빨도, 맹수 같은 금안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리먼은 이런 식으로 혀만 깔짝거리진 않는다.

뒤늦게 손을 빼내려 하자, 이안이 손끝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놓아 주지 않았다.

“됐습니다. 치워요.”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에요.”

그가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꾹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혀를 내어 아쉽다는 듯 제 입술을 훑고는 살짝 내려간 안경을 바르게 고쳐 썼다.

언제 그런 지저분한 짓을 했냐는 듯 의연한 태도였다. 손바닥이 얼얼한 통증에 주먹을 쥐자, 팔 전체가 저릿저릿했다.

‘진짜 재수 없는 사람.’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칩니까. 놀리고 싶게.”

“진짜 별짓을 다 하시네요.”

“시작은 구사월 가이드가 했습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자꾸 건드는 게 짜증이 나서 달려들었다가, 괜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혈액에는 어쩔 수 없이 파장이 깃드는 거 아시죠?”

그의 말대로 미세한 양이지만 혈액에는 파장이 섞여 있다. 이건 아무리 숙련된 가이드라도 제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이안이 맛있다고 한 건 파장을 뜻하는 거란 말이었다. 의도치 않게 그에게 가이딩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그런 식으로는 범인 못 잡습니다. 잡으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끌어들여야죠.”

그는 역시 내가 요새 뭘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범인이 혹할 만한 걸 쥐고 살랑살랑 흔들어 봐요.”

범인은 나를 노린다. 정확히는 내 피. 내 피를 마셔서 불사가 되길 바란다.

불사가 되기 위해선 끝없이 재생되는 피를 수도 없이 마셔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인이 목적을 이뤘을 때는 내가 과연 어떻게 될까.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그려지는 현실이었다.

“제 목숨을 가지고 도박하라는 건가요?”

“그게 제일 확실한 미끼이긴 하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이 따르니 다른 것이 좋겠군요.”

“그런 말은 저도 하겠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지 아는가. 어떤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건만, 그는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핀잔만 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에밀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범인이 이미 한번 습격에 실패했잖아. 실패 요인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가겠지.”

에밀리는 범인이 실패 요인을 조사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현재 범인이 혹할 만한 건 내가 크리먼이란 증거였다.

내가 직접적으로 드러낼 순 없으니, 내 비밀을 알법한 지인에게 접근하도록 유인하면 좋을 텐데. 에밀리라던가 백유건이라던가.

전투력이 낮은 그녀에게는 위험 부담이 있으니 아무래도 유건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과연 범인이 그럴듯한 정보를 흘려도 유건에게 접근할까. S급 에스퍼인데.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 고려해봄 직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피부터 들이대는 방법은 역시 아닌 것 같았다.

***

유건은 해가 지기 전에 센터로 돌아왔다. 옷에는 자기 피인지, 크리처의 피인지 모를 붉은 혈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D급이었다며. 왜 이렇게 다쳤어?”

아직도 사람들이 빼곡한 광장인 탓에, 그가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말했잖아. 피로 유혹하겠다고.”

“그래서. 성공했어?”

유건이 말없이 몸을 물리며 씨익 웃었다.

‘진짜 저 말도 안 되는 수작에 걸려든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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