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문제점에 봉착했다. 다른 지부로 출장을 가서 용의자를 오랫동안 살피면 좋으련만, 한결이 유건과 나의 캡틴인 탓에 대외적인 핑계를 대고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정말 이게 맞아?”
“에스퍼들 은근히 평소에 단순하고 굼뜨다니까.”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유건과 나는 B지부 근처에 있는 3층 높이의 상가 건물 옥상이었다. 우리는 몇 시간 전부터 이곳에서 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온다.”
유건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국현이 준 리스트 중 한 사람이 보였다. B지부의 C급 정신계 에스퍼 문서형.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폭주하진 않겠지?”
유건이 염려된다는 듯 말했다.
“폭주 안 해.”
“이 정도로 괜찮으려나….”
“그렇게 걱정되면 옆에 있는 거 던지든지.”
유건이 자기 팔뚝만 한 화분에 시선을 주었다가 그 반절 크기의 미니 화분을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 위협은 느껴야 크리처화 개방될 것 아니야.”
“그렇긴 한데….”
우리의 첫 번째 계획은 이러했다. 멀리서 내가 투시하여 일단 핵의 유무를 확인하고, 만약 찾지 못해도 강제로 크리처화가 개방될 만큼 큰 위협을 주어 이중 확인하자.
그래서 고른 방법이 높은 위치에서 화분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퍼는 급소인 머리와 심장이 크게 손상되면 바로 폭주를 일으키는 탓에 썩 내키지 않았다.
괜찮을까…. 그렇다고 범인이 다시 찾아오길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는데.
나는 투시를 하며 끝없이 고민에 빠졌다.
“핵은? 있어?”
“없어.”
“그럼 던진다.”
“잠깐.”
나는 당장이라도 화분을 떨어뜨릴 것 같은 유건의 팔뚝을 붙잡았다. 유건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나는 그의 손에서 미니 화분을 뺏고 큰 화분을 쥐여 줬다.
“하려면 확실히 해야지…. 위치는 가까워야 돼. 머리는 피하고. 그래도 이 정도 높이면 충분히 위협적이라 크리처화가 개방될 확률이 높으니까.
유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일말의 고민 없이 화분을 떨어뜨렸다. 순간 유건의 파장 흐름이 느껴졌다. 그 파장은 떨어트린 화분에 닿아 있었다.
갑자기 시간이 늘어지는 것처럼 느릿하게 보이더니 머리로 향하던 화분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빡,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뭐야!”
화분은 정확히 상대의 발 앞에 떨어졌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치명상을 입을 만한 위치였다. 우리는 용의자가 홱 위를 돌아보는 움직임에 급하게 몸을 숙였다.
“어떤 놈이야! 나와!”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으세요?”
“어떤 미친놈이!”
화분에 맞을 뻔한 에스퍼가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주변에 그를 걱정하며 웅성거리는 소음도 함께.
유건을 돌아보자 용의자가 크리처화가 개방이 안 된 걸 확인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크리처화가 개방됐다면 모두 벌써 소리를 지르고 도망갔을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리스트의 용지에 X자를 그렸다.
“이 사람 아닌 것 같아. 다음은 누구지?”
“C지부에 두 명. 한 명은 기숙사에서 출퇴근하고 한 명은 아니야. 그렇게 안 머니까 오늘 갔다 올까?”
다음 찾아갈 에스퍼를 찾고 있는데,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어깨를 맞은 에스퍼가 잔뜩 열이 받아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일단 도망가자.”
“응.”
유건이 한 손은 어깨를, 한 손은 무릎 뒤를 잡고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목에 팔을 감자, 둥실 떠오르며 부유했다. 유건이 염력을 사용해 몸을 띄운 것이다.
우리는 그 상태로 유유히 옆 건물로 이동했다. 건물 옥상에 마땅한 자리를 찾을 때도 이런 식으로 왔지만, 영 적응이 되지 않는 자세였다.
밤이면 크리처화해서 내가 뛰어다녀도 괜찮은데. 이 나이를 먹고 공주님 안기라니. 절로 얼굴이 홧홧해졌다.
“적당히 왔으면 내려 줘. 자세 불편해.”
에스퍼는 다행히 따돌린 것 같았다. 가려지는 것 하나 없이 하늘과 가까이 있으니, 붉은 석양 때문에 눈이 부셔 눈가가 찡그려졌다.
“힘주고 있으니까 불편하지.”
유건이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쳐 들었다. 나는 유건의 말대로 힘을 풀고 그의 품에 기댔다.
“목은 꽉 잡아. 떨어질라.”
그가 목울대를 진동하며 웃었다. 그와 맞붙어 있자, 얼마 전부터 이어져 온 거짓 갈증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선명한 심장 소리가 내 옆에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게 왜 이렇게 안정감을 주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
-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바로 발 앞에 떨어뜨리더라. 염력 사용해서 방향 조정한 것 같아. 재주도 좋아.”
- 대박. 용케도 그 높이에서 맞췄네. 유건이 진짜 대단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샐러드를 먹으면서 에밀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최근에 에밀리를 오해해서 관계가 소홀해졌었지만, 이렇게 그녀와 통화하는 건 원래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근데 나 묻고 싶은 게 있어.”
- 뭐?
오늘은 이런 일상 얘기만 하려고 전화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나 요새 몸이 이상해. 계속 갈증 나고, 피 부족한 크리먼처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꾸 사람만 보면 입맛 다셔.”
내 몸에 나타나는 기이한 변화. 처음에는 목이 좀 마른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곧 흡혈할 시기 돌아와서 그런 거 아니야?
“저번 주에 백유건 피 마셨댔잖아. 그다음 날부터 계속 이 상태였어.”
- 증상이 자세히 어떤데?
나는 에밀리에게 내 상태를 자세하게 열거했다. 불면증과 하품, 재채기, 불안감과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증상은 역시, 갈증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피가 아닌 그저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하는 거짓 갈증.
- 진짜 이상하네. 피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갈증을 느낀다고? 그렇다고 물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에밀리 역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 또한 내 몸의 변화에 대한 이유는 모르는 것 같았다.
- 갈증만 빼고 보면 무슨 금단 현상 같다.
“금단 현상?”
- 나 요새 금연하잖아. 너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긴 하거든.
에밀리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서 지켜봤을 때 금연하는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예민해지곤 했다. 쫓기듯 초조해하다가 입이 심심하다며 간식을 찾는 등 식욕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나는 담배 안 피우는데.”
- 담배 말고. 요새 계속 주기적으로 하다가 끊은 거 있어?
“글쎄. 밤에 잠 안 와서 커피는 좀 줄였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 그럴 수도 있고. 근데 커피를 끊었다고 갈증을 느끼는 건 좀…. 그럼 커피를 마시면 채워져?
“채워지지. 그 갈증이 그 갈증이 아니지만.”
그건 그저 수분이 부족할 때 채워지는 충만감이었다. 크리먼의 ‘갈증’은 그것보다는 더 강렬하고, 절실한 감각이었다.
오랜 기간 갈증을 참게 되면 이성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혼란과 고통이 찾아온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정신 착란과 가까운 증상이었다.
“혹시 네 크리먼 친구 중에 이랬던 애는 없었어?”
- 글쎄… 본 적 없는 것 같아. 내 친구 중에 크리먼인 의사는 있는데. 걔한테 물어볼까?
“의사라도 사람 신체만 잘 알 것 아니야.”
- 아니야. 걔 지능계 크리먼인데 크리먼에 대한 의학에도 관심 많아. 자기 몸도 째서 연구하는 녀석이야.
자기 몸을 실험체로 쓰다니.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안 아프대?”
- 마취제 넣으면 할 만하대. 내가 보기엔 일반적인 크리먼은 아니야.
“지능계들이 다들 좀 그런가….”
지능계는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가치관이나 비상식적인 욕망을 가지기도 했다. 새로운 것과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자들.
내 주변에도 요새 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에밀리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 너 그 이안이란 사람 말하는 거지? 얼굴 궁금하다. 잘생겼다며.
“잘생겼다곤 안 했는데. 생긴 건 정상이라고 했지.”
- 네가 그 정도 평가한 거면 잘생긴 거야.
에밀리는 항상 내가 눈이 높다고 했다. 딱히 그렇게 느끼진 않지만, 센터 각성자들을 오래 봐 왔으니 미적인 기준이 높을 가능성은 있었다.
“멀쩡하긴 한데…. 입만 열면 재수가 없어서.”
에밀리가 하하 웃었다. 내 부모님은 연구원이라도 상식과 윤리, 도덕성은 결여돼 있지 않았는데. 초능력으로 지능이 갑자기 높아지면, 뇌 어딘가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걸까.
지능계는 도덕관념 혹은 인성과 지식을 등가 교환이라도 한다던가. 이안을 생각하면 마냥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이안이 준 명함의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멀리서 지켜보는 건 그만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더니, 지금까지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확인하고 그만둔 건지, 아직 못 본 건지.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유건이 요즘 밖에선 나와 같이 다녀서 괜찮았지만, 이렇게 혼자 집에 있을 때면 종종 불안감이 들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왠지 집 안이 유난히 크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먹던 샐러드를 치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갈수록 겁쟁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
나는 오랜만에 홀로 본관 앞 광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광장은 각성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정가운데엔 커다란 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A지부 뿐만 아니라 각 지부에는 이러한 나무가 한 그루씩 있는데, 우리는 이 나무를 지역을 지켜 주는 ‘수호 나무’라고 불렀다.
이 커다란 수호 나무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고도 어렵다. 게이트 안 보스의 핵을 가루로 빻아서 토양에 뿌린 뒤 그곳에 나무를 심으면, 6개월도 되지 않아서 50m에 육박하는 높이로 자란다.
옛 선조들은 이 나무가 지역을 지켜 주고 있으며, 이를 함부로 베었다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속설에 불과했다.
옛날에는 마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런 미신에 기댔지만, 현재는 게이트에서 채광이 가능한 마석을 캐서 건물에 심는다. 그러면 게이트 방해 파장이 구성된다.
그러니 이제는 쓸모없는 나무라지만, 벌목해 봤자 이득도 없고 처치 곤란하여 내버려 두는 상황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햇볕이 따사로운 날엔 나무 하나만으로 훌륭한 피서지가 됐다. 센터 각성자들은 시원한 카페를 두고, 꼭 이 근처로 빙 둘러앉아 휴식을 취했다.
“안녕하세요.”
다음 용의자로 어떤 사람을 찾아갈지 태블릿을 확인하고 있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퍽 예의 바른 말투였다.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