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만….”
“맞습니다.”
그런데 돌연 국현이 가볍게 수긍했다.
“네?”
“솔직히 아직 센터 규정도 숙지 못한 풋내기보다는 제가 낫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 에스퍼 말고 저와 같이 움직이자는 말입니다. 어차피 저도 범인을 쫓는 입장이고, 구사월 가이드와 있으면 범인을 마주할 확률도 높아지니까요. 저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십니까?”
이득은 무슨. 그로서는 제법 논리정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유건을 데리고 다니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내 비밀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현이 만약 S급 정신계라도, 아니 SSS급이라도 그보다 유건이 나을 수는 없었다.
“지하에만 계셔서 센터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시나 본데, 백유건 에스퍼는 이번에 알파 팀에서 영입한 염동계에서도 실력으로 손꼽히는 에스퍼입니다. 더 이상의 무례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유건이 에스퍼이기는 했지만 같은 소속 팀원이었다. 연차로는 내가 선배니 챙기는 것이 마땅했다. 더불어 유건이 왜 국현보다 나은지 설명할 순 없어서 적당히 대처한 거였다.
“육체계인 줄 알았는데 염동계였군요. 같은 팀원으로서 위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정말 보기 좋아서 하는 말은 아니리라. 그는 거절당해서 기분이 상했는지 비꼬고 있었다. 이대로 대화가 마무리됐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는 한 술 더 들었다.
“신입치고 제대로 된 염동계 에스퍼를 못 본 것 같은데. 민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염동계나 자연계는 광범위하게 능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에스퍼 중에서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국현이 말한 것처럼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시일이 좀 걸렸다.
그만큼 컨트롤이 어렵고, 위험한 능력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틈만 나면 가이딩 크리스털이라든지, 동전이라든지, 볼펜 같은 걸 손 위로 굴리며 컨트롤 연습을 했다. 컨트롤은 무게가 가벼울수록, 크기가 작을수록 어렵다.
국현은 그런 유건을 면전에서 무시하며 깎아내렸다. 나는 유건을 잡고 있던 팔목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내 완전히 손을 떨어뜨리곤 국현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유건이 잠시 내 쪽을 쳐다보더니 슬며시 미소 지었다.
콰득, 촤르륵.
“……!”
불시에 국현이 들고 있던 스테인리스 컵이 일순 통조림처럼 찌그러지면서 차가 흘러넘쳤다.
국현이 놀라서 손을 떼자, 컵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컵이 인격이 있는 것처럼 너울너울 움직이며 국현을 조롱했다.
무언가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현의 얼굴을 향해 총알 같은 속도로 빠르게 돌진했다.
쾅!
컵은 다행히 국현을 비껴갔다. 시멘트로 되어 있는 벽에 선명한 금이 가더니, 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잔부스러기가 여기저기 튀어 순식간에 주변이 엉망이 됐다. 매캐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풋내기라 컨트롤이 미숙해서 실수를 했나 봅니다.”
유건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센터 내 기물 파손과 동료 폭행은 규정 위반일 텐데.”
“조건을 걸고 가이딩 혹은 가이딩 크리스털을 요구하는 것도 규정 위반 행위일 텐데요.”
완전히 비껴간 줄 알았는데 국현의 뺨에 얇게 생채기가 남았다. 국현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백유건 에스퍼는 머지않아 지하 수용소에서 볼 일이 생길 것 같군요.”
“정신계는 등급 차이가 나면 하등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들었는데.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능력을 쓰지 않아도 고문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차피 지하 2층 수용소로 온다면 목에 칩이 박혀서 올 테니.”
각성자에게 일명 빨간 줄이 그어지면 뇌와 가장 가까운 위치인 귀 뒤에 칩을 박는다. 그 칩은 에스퍼가 폭주할 때를 대비해 뇌를 터뜨리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위치 추적 기능을 했다. 그리고 전류를 흐르게 하거나 통각을 자극하는 것도 가능했다.
“센터에서 오래 근무하시려면 성질 죽이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풋내기라서 실수로 사람을 처박히게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그는 증명이라도 하듯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띄우며 너울너울 춤추게 했다.
태블릿 PC와 비어 있던 의자, 3단으로 되어 있는 서랍과 물을 끓이는 티 포트, 달랑달랑 달려 있던 전구까지.
풋내기라서 컨트롤이 미숙하다기엔 어느 것 하나 어색한 움직임이 없었다. 유건의 손 모양에 맞춰 균일적으로 움직이는 게 그가 마치 모든 사물의 지휘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답이 나온 것 같네요.”
염력은 참으로 신비롭고 편리한 능력이었다.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니.
“대화 즐거웠습니다.”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견고한 철문을 나왔다. 유건이 내 뒤를 따르며 방을 나왔다.
철그렁, 하고 물건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
“미안해.”
“뭐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내가 팔 놔줬잖아. 어차피 들을 것도 다 들어서 상관없다는 뜻이었는데. 알고 그런 거 아니야?”
“괜찮겠지?”
유건이 다 저질러 놓고 뒤늦게 눈치를 봤다. 페어를 취소할 당시, 그 또한 경비 에스퍼를 따돌리느라 벌인 위협적인 행동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소환됐다고 들었다. 나와 비슷한 경징계를 받고 근신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페어를 취소한 일로 센터장님이 송이까지 불러서 한 소리 하셨다면, 유건은 필시 불려갔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났어. 정보를 듣긴 했지만, 크리스털 계약했잖아. 네 말대로 크리스털 요구는 규정 위반이니까, 네가 한 짓도 웬만해선 넘어갈 거야.”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가.”
“어. 거기 보니까 CCTV도 없더라. 들켜선 안 되는 짓을 하니까 설치를 안 했겠지. 뭣하면 내가 그런 일 없었다고 증인 서 줄게.”
“거짓 증인이라니. 든든하네.”
그가 웃긴다는 것처럼 맞장구쳤다.
“그럼 더 할 걸 그랬다. 정신계 별것도 없는데.”
“그건 선 넘는 거고. 적당히 잘했어.”
마지막 말에 유건은 완전히 근심을 털어 낸 얼굴이었다. 유건을 보니 오래전 내가 막 센터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각성자들이 등급이 높은 상대에게 열등감을 갖는 일은 빈번했다. 알파 팀은 어느 지부에서나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팀이고, 그 안에서도 등급과 실력으로 계급이 나뉘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등급 높은 신입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괴롭힘을 당하기 쉽다. 그 당시 알파 팀에 있던 가이드 선배들이 내게도 일명 텃세를 부렸다.
물리적인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사월이는 등급이 높아서 일이 쉽겠다.’던가, ‘너는 이런 거 상관없지?’ 같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닌.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말을 많이 했다.
예전엔 나도 순진했던 터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알고 싶지 않더라도, 자연히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태생이 무던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알게 되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들이 내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선배들은 그런 내 일관된 태도에 더욱 열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센터 내에 입지가 쌓이고, 연차가 높아지니 그 괴롭힘 아닌 괴롭힘은 자연히 사라졌다.
이처럼 가이드는 에스퍼처럼 대놓고 몸싸움을 할 수는 없으니 이리저리 돌려서 까는 걸 즐기는 아주 웃기는 집단이다.
그런 관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것도 혼자 다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국현이 이 케이스에 든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딱히 텃세를 부리려던 게 아니라, 정말 유건을 잘 몰랐고, 염동계 신입 에스퍼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무시한 것 같았다.
그래도 뭐, 결과적으로 잘 모르면서 상대를 무시했단 점에서 같은 취급을 해도 되려나. 국현이 게이트가 아닌 다른 위치에서 높은 성과를 내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유건을 무시할 급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 전투력이 약한 정신계가 면전에서 염동계인 유건을 도발한 건 그의 명백한 실수다.
인정하긴 싫지만, 센터에서 한결 말고 유건을 이길 상대는 현재 없다. 그 또한 유건은 원거리가, 한결은 근접전이 유리하기 때문에 유건의 상성상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련에선 그렇지만 실전인 게이트라면 조금 다르다. 유건의 능력에 숙련도가 더해진다면 유건은 분명 한결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보일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유건이 운 좋게 높은 등급과 특성으로 각성했다고 생각하여 무시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가능성과 성장이 눈에 뚜렷하게 보였다.
유건은 무엇보다 성실하고 거만하지 않았다. 백씨 집안이란 뒷배경도 훌륭했다.
되려 눈치를 보는 걸 보면 그는 아직 센터에서 자신의 위치와 가능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일러 주진 않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기에 과도한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유건은 내가 돕지 않아도 이대로만 간다면 한결 못지않게 훌륭한 에스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국현이 키워 주냐는 말을 할 때 얼토당토않아서 웃음이 터진 것이겠지.
유건은 웬만해선 기도 죽지 않고 은근히 성깔도 있는 편이니 높은 자리도 꿰찰 수 있지 않을까. 각 팀의 캡틴들도 절대 만만한 성격은 아니니까.
이런 걸 보면 한결과 같은 핏줄인 게 느껴졌다. 백씨 가문 에스퍼들은 하여튼 남달랐다.
“근데 한결 형은 어떻게 안 거지? 너 들은 거 있어?”
“아니.”
알파 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국현은 우리가 오기 전에 한결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물적 증거를 제외하곤 정보를 모두 공유했다고 말했으니, 범인이 정신계이고 사라진 연구원이란 걸 알 것이다.
범인이 왜 나를 쫓고 있는지 그 목적마저도.
그 사실만으로 공기 중 산소가 희박해진 것처럼 갑갑했다. 숨통이 점점 조여드는 느낌이다.
“선배한테는 비밀로 해. 나한테 말 안 하고 움직인 거 보면 선배도 말할 생각 없는 것 같으니까 당분간 서로 모른 척하자고.”
“그래.”
나는 일단 유건의 입을 단속했다. 이렇게 된 거 이안보다, 국현보다, 한결보다 더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한다. 범인 물색에 이전보다 더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래도 오길 잘한 것 같아. 들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고. 그거 단추 수사대에 맡겨서 지문 감식 안 되나?”
유건이 밝은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물었다.
“이미 지국현 에스퍼가 해 봤을 것 같긴 한데. 일단 맡겨 보자.”
능력을 차치하더라도 지들이 최상위 계층인 양 오만을 떠는 것들보다 말 잘 듣는 에스퍼가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