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0/131)

“아, 그래요. 제가 이름을 잘 못 외워서. 뭐, 신입은 맞나 봅니다?”

국현은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 사람 은근히 웃기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웃음기를 머금으며 국현에게 태블릿 PC를 건넸다.

“서명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국현은 빠뜨린 부분이 없는지 계약서를 차분하게 검토했다. 유건을 흘깃 바라보자 기분이 상했다는 걸 티 내는 듯 볼을 부풀렸다.

곁눈질하는 눈빛이 왜 편을 안 들어주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입 모양으로 ‘뭐.’라며 무심하게 대꾸하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귀엽긴.’

나는 테이블 아래로 유건의 팔목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여기서 더 놀리면 난동을 부릴 것 같아서 참으라는 뜻이었다.

뜻을 알아들은 건지 그는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럼 계약은 이걸로 마무리하고….”

국현은 검토를 마치고 태블릿 PC를 옆으로 밀어 두었다.

“어디까지 알고 오셨습니까?”

그가 습관적으로 차를 호록, 하고 마셨다. 처음엔 너무 미세한 향이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꽃 향이 나는 차였다. 피로해 보여서 분명 커피일 줄 알았는데.

피 냄새가 짙게 나는 국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였다.

“먼저 얘기하세요. 정보는 저희가 받는 거지, 제공할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계약서까지 쓴 이상, 우리가 굽히고 들어갈 이유는 이제 전혀 없었다. 내 가이딩 크리스털이 아깝지 않도록 하나하나 셈을 쳐가며 밑바닥까지 뽑아 먹을 작정이었다.

“좋습니다. 일단 그 사건의 범인이 정신계라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저를 찾아온 걸 테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 대화하면서 떠보려 했는데, 첫 번째 계획부터 엇나가는 기분이었다.

“그걸 어떻게 믿죠?”

“제가 이 사건의 범인을 쫓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다시 태블릿을 켜 화면에 한 장의 사진을 띄웠다.

“C 지역에서 처음 습격당한 D급 가이드 지석현. 그 가이드가 제 친척 동생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진 국현의 말은 실로 놀라웠다. 동생이 습격당하기 전, 국현은 동생과 C 지역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동생이 식사 중에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다더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화장실로 찾으러 갔습니다. 거기서 범인을 목격했습니다.”

“현장에 계셨다고요?”

“예.”

그는 범인과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얼굴을 봤습니까?”

“아니요. 뒷모습만 봤습니다. 커다란 후드 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체격이 있고 키가 컸습니다. 성인 남성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제가 화장실로 들어오자 범인이 제 동생을 물었습니다. 동생은 제 앞에서 크리먼이 됐습니다.”

나도 모르게 안쪽 살을 질끈 깨물었다. 폭주한 크리먼이 된 어머니에게 물린 한결과 B 지역 방출 게이트 때 내게 공격받은 연구원들. 나의 부모님이 스쳐 지나갔다.

“이성을 잃고 저를 공격했습니다. 범인은 그사이에 창문으로 도망갔습니다. 범인이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동생은 조종이라도 당했던 것처럼 갑자기 공격을 멈추더군요.”

공격을 멈췄다고?

“그러곤 같이 창문으로 탈출했습니다. 동생의 뒤를 따라갔을 땐 다른 폭주한 크리먼들이 방해해서 더 이상 쫓을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조종당한 것 같았고 폭주 상태인 다른 크리먼들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면, 범인이 정신계인 것은 이제 비단 소문이 아니라 확실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언뜻 들으면 이 부분만 짚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었다.

“정신계라도 세뇌는 파장에 노출될 일정 기간이 필요한데, 동생은 지국현 에스퍼 앞에서 물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건 불가능했다. 이 말대로라면 범인은 ‘즉시 세뇌’가 가능한 능력을 갖춘 정신계 크리먼이었다.

“용케도 알아차리셨네요. 정신계는 등급에 따라 3일에서 길게는 보름, 정신계 파장에 노출해야 세뇌가 가능합니다. 크리먼인 정신계의 세뇌 조건이 에스퍼와 다른 것 같더군요. 그리고 세뇌의 조건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죠. 등급.”

정신계 에스퍼는 자신의 등급과 같거나 낮은 대상에게만 세뇌가 적용됐다. 만약 등급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S급인 내게도 세뇌가 적용된다는 소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 동생이 D급이기에 등급까지 상관없는 건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구사월 가이드도 이 사건을 파헤치려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D급이라면 하등급이라서 세뇌에 등급은 상관없는 건지 분별력이 없긴 했다.

이건 진짜 좀 위험한 것 같은데….

“제 동생은 그 이후로 실종됐습니다. 그때가 이제 4개월 전이니, 살아 있다고 보긴 힘들 것 같군요.”

그는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닌데 컵 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이 사실을 센터에서도 압니까?”

“물론입니다. 처음 C지부에서 가이드 습격 사건에 대한 임무가 진행됐을 때, 목격자로 참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전이 되지 않아서 제가 나선 겁니다.”

원래라면 이제 가이드 습격 사건 임무가 A지부 알파 팀이 일임하기로 했으니, C지부에서 진행된 조사 내용은 온전히 전달되어야 맞았다.

그런데 유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도 이 사실을 몰랐던 모양인데. 국현은 그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니라 현장 목격자였다.

그리고 센터 지하의 일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국현의 힘이 약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이 묻힌 것이 의아했다.

“그럼 물증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유건이 조급하게 물었다. 국현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밀폐 용지를 건넸다.

“이거입니다.”

“이건….”

그 안에 있는 건 단추였다. 엑스 자로 엇갈린 창과 정중앙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방패.

센터의 마크였다. 단추에 마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색깔은 채도가 낮은, 푸른색을 띄었다.

“범인은 센터 소속 C급 정신계 각성자입니다.”

센터 제복 견장에는 등급을 나타내는 단추가 달려 있었다. 파란색은 C등급을 의미한다.

범인이 현장에 그 단추를 떨어트리고 간 것이다.

“범인이 정신계에 B 지역 방출 게이트 때 사라진 연구원이라는 정보는 다들 아시겠죠? 그래서 저는 B 지역 연구소에서 용의자를 추렸습니다.”

그는 태블릿으로 다른 문서를 띄웠다.

“그곳에는 정신계 에스퍼인 연구원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가이드는 당연히 없고요. 그렇다면 에스퍼는 크리먼이 되어도 다른 특성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인만 정신계 각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리스트는 B 지역 연구소에서 근무한 일반인 연구원 리스트입니다.”

리스트의 명단은 총 3명이었다. 내가 일반인일 때 간혹 연구실을 오가며 보았던 익숙한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프로필 사진 아래 세 명 모두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쓰여 있었다. 실종 상태였다.

“그리고 그 후에 정신계로 센터에 들어왔을지도 모르니, 현재 C급 정신계 에스퍼로 근무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추렸습니다. 총 5명입니다.”

그다음 슬라이드에 사람들은 B지부, C지부, F지부, 그리고 알파 팀 지한까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제가 조사하고 있는 용의자는 이렇게 일반인 연구원과 C급 정신계 에스퍼 총 8명입니다. 두 그룹에서 교집합이 범인일 겁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일반인인 연구원과 C급 정신계 에스퍼. 국현의 말대로라면 범인은 이 조건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한과 이안은 자연히 용의자에서 제외된다. 지한은 사고 당시에도 알파 팀에서 정신계로 근무했으니, 그때 B 지역 연구소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안은 C급 지능계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너무 수상쩍어서, 사실 정신계인데 다른 술수를 써서 지능계인 척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조건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국현이 아직까지 범인을 찾지 못한 이유는 범인이 능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세뇌했든, 위장으로 정체를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지한은 몰라도 이안은 충분히 의심해 볼 만 했다.

국현이 뭔가 알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 임무에 진심이고, 집요하게 쫓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증거로 내민 이 단추는 정말 큰 수확이었다.

“어떻습니까. 크리스털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감사 인사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지국현 에스퍼 말대로 대가는 충분히 지불했으니까요.”

나는 단추가 들어가 있는 밀폐 용지를 쥐고 주머니에 넣었다. 국현이 또다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언뜻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려는 것처럼도 보이는 애매한 미소였다. 그런데 눈빛은 또 너무 직선적이라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하니,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왔다.

“구사월 가이드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처음 봤을 때는 성인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저를 아세요?”

무척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선명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A지부에서 구사월 가이드 모르는 에스퍼도 있습니까?”

“아니 만난 적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내 기억으로는 마주친 적이 없는데. 국현이 인상이 흐릿한 편도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큰 건 아니지만, 먹물처럼 짙은 색을 가져서 그런지 잠깐 봐도 눈에 잔상처럼 남았다.

“일방적으로 멀리서 본 것이니 만난 건 이번이 처음 맞을 겁니다.”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길 가다가 봤다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본 거야?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분명 국현이 센터에 오래 근무했으니, 오다가다 마주친 적은 있을 것이다. 센터 출입증에 이름과 등급이 색깔로 표시되어 있어서 내 이름도, S급인 것도 알았겠지.

에스퍼는 20대부터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외형으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국현은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았다. 사뭇 단정하면서도 무심한 눈초리가 내 얼굴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습관적으로 쇄골 부근을 가리듯 매만지는데, 유건이 끼어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제가 뭘 했습니까?”

“구사월 가이드한테 추파 던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단어 선정 한번 노골적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유건 때문에 더욱 낯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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