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59/131)

미로 같은 복도 끝에 다다르자, 경비 에스퍼가 가장 마지막 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 방입니다. 돌아가실 때 연락해 주시면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길이 하나여서 앞으로 쭉 나가면 될 것 같은데. 어딘가 기계처럼 느껴지는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장소도 장소인지라 정신 조종을 당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똑똑.

쓸데없는 감상을 그만두고 문에 노크했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여기가 맞다고 했는데.

“알파 팀 구사월 가이드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

여전히 정적이 흘렀지만, 손잡이를 돌려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낡은 4인용 테이블과 빛이 희미한 전구, 3단으로 되어있는 협탁이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리했다.

깔끔하다는 감상과는 별개로 뭐든 최신식으로 구축된 센터에서 유일하게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협탁 위에 있는 커피포트는 조금 전 누군가 물을 올려놓은 건지 팔팔 끓고 있었다.

“지국현 에스퍼는 어디 있지?”

유건이 휑한 방을 둘러보는데, 건너편 문 너머에서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와 함께 희미한 비명과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 문에서 한 남자가 계단으로 올라왔다.

철컥.

“안녕하십니까.”

그는 태연한 태도로 다시 문을 닫고는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델타 팀 A급 정신계 에스퍼 지국현입니다.”

각성자답지 않게 머리카락이며 눈동자며 모두 새까맸다. 그렇다고 일반인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 색소가 너무 짙어서 되려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의 단정한 손에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컵이 들려 있었다. 살짝 피로해 보이는 표정으로 커피포트의 물을 붓자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걸어 우리 건너편에 앉아 눈을 감았다. 흡사 잠이 든 것도 같은 고요한 분위기였다. 유건이 눈치를 보다가 먼저 입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나는 구사월 가이드와만 면담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유건의 말을 끊어 내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재밌는 걸 달고 오셨네요?”

그가 눈을 천천히 뜨며 유건을 평가하듯 훑어봤다. 호록 소리를 내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유건이 처음 보자마자 국현의 건방진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에 그의 팔을 붙잡고 일단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줬다.

“바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만 간단히 하죠. 가이드 습격 사건 때문에 오셨죠?”

그는 우리가 온 목적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처럼 선수를 쳤다.

“얼마 전 알파 팀 캡틴이 다녀갔습니다. 그래서 협력 요청 건을 반려시킨 거고요.”

“한결 캡틴이요?”

“예.”

한결이 다녀갔다니. 아예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말씀하셔야죠. 다짜고짜 일정이 안된다고 반려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임무 협조 요청은 원래 팀의 캡틴에게 먼저 보고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팀이니 당연히 정보를 공유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딱딱한 어조로 묻는 유건에게 국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먼저 팀의 캡틴에게 상신하는 게 맞긴 하지만 센터 각성자 중 그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상관없으려니 했건만, 국현은 그 부분을 깐깐하게 집어냈다.

“가이드 습격 사건에 대해 뭘 아시는 겁니까?”

일단 국현이 우리를 피한 일에 대한 건 제쳐 두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알 만큼 압니다. 저도 몇 달 전부터 그 사건의 범인을 쫓고 있는 입장이니까요.”

“그럼 저희에게도 그동안 알아낸 정보를 공유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음.”

그는 잠시 특유의 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오기 전에 몰랐다 치더라도 제가 정보를 공유했다고 말했으니 그쪽 캡틴한테 물으면 될 텐데요?”

우리는 한결에게 국현이 알고 있는 정보를 물어보기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그에게 물으려면 우리도 왜 국현을 찾아왔는지, 범인이 정신계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분명 한결이라면 같이 쫓자는 할 텐데, 모든 걸 터놓고 행동을 같이하기에는 내가 그에게 감춰야 하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국현이 말하는 걸 보니 순순히 답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표정이 원래 단조로운 편인 것 같긴 하지만 내키지 않아 하는 건 확실히 전해졌다.

“지국현 에스퍼도 원하는 게 있으니까 면담에 응한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태연한 태도로 물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면 메신저로 저희 팀 캡틴에게 정보를 말했으니 공유하라고 말씀하셨겠죠.”

국현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그가 컵을 들어 차를 마시고 다시 내려놓았을 땐, 그 웃음기는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죠. 원하는 걸 말하세요.”

“눈치가 빠르시네요. 아니면 이런 식으로 거래할 일이 많았다거나.”

“…….”

“하긴, S급 가이드이니 어떻게든 꼬여 내려는 사람들이 많았겠네요.”

나는 국현의 찔러보는 듯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저도 그 많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한 달에 50개. 구사월 가이드의 가이딩 크리스털을 원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 전부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역시 꿍꿍이가 있었다. 유건의 임무 협조 요청 건도 일부러 반려시켰을 것이다. 용건은 내게 있었으니까. 같은 알파 팀인 유건의 협조 요청을 지속적으로 반려시키면, 결국 사건의 당사자인 내가 찾아오게 될 거라는 계산이 있었으리라.

“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5년 정도로 하죠.”

그러나 아주 뜻밖의 제안은 아니었다. 그가 일면식도 없는 가이드의 면담을 받아들인 건 목적이 뻔했다.

“제가 아시다시피 한가하게 캡슐 가서 가이딩이나 받을 시간이 없어서요.”

‘가이딩이나’라니. 국현의 차분한 목소리에서는 점잖은 분위기가 묻어 나왔는데, 동시에 미세하게 가이드를 낮춰보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위화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편이었다.

가이드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주제에 가이드를 우습게 여기는 에스퍼는 지국현 말고도 숱하게 봐왔으므로.

“구사월 가이드에겐 그렇게 어려운 조건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려운 조건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조건도 아니었다.

나는 오후에는 무조건 가이딩을 스케줄에 넣고, 오전엔 매칭이 안 잡혀 있으면 대개 3개의 크리스털을 충전해 놓는다.

그렇게 하면 일주일에 15개의 크리스털이 모이는데, 한 달이면 딱 60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오전에 매칭이 안 잡혀 있을 경우, 즉 무척 한가한 기간일 때만 가능한 일이다.

평균적으로는 한 달에 30개의 크리스털을 충전했다. 국현에게 꼬박꼬박 한 달에 50개의 크리스털을 바치려면, 개인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구사월. 형한테 가서 물어보자. 어차피 같은 내용이잖아.”

유건이 국현에게도 들리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같은 내용이라면 내가 굳이 이런 거래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한결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는 내가 숨기려고 한다면 꾸역꾸역 물어볼 성격이 아니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이 제안을 거절하는 쪽으로 저울이 기우는데, 국현이 다시 입을 뗐다.

“알파 팀 캡틴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정보가 있습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어떤 겁니까?”

“범인에 대한 물적 증거. 그것도 전부 드리겠습니다.”

물적 증거? 범인과 접촉한 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국현의 정보는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구사월.”

내가 이전과는 달리 성급하게 대답하자, 유건이 제지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됐어. 물증이라면 해 볼 만해. 캡틴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증거라잖아.”

“다행히 말이 통하네요. 그럼 이쪽에 전자 서명하시면 됩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국현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태블릿 PC에서 계약서를 띄웠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시 어떻게 처리하는지, 크리스털을 받는 시기와 정보에 대한 비밀 유지 각서 등, 이 단순하다면 단순한 거래에 대한 조항이 계약서 다섯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 계약서만 보더라도 지국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서 태블릿 PC를 받아든 후 계약서에만 몰두하며 조항을 검토했다.

유건은 이 거래가 영 마뜩잖은지 팔짱을 낀 채 다리 한쪽을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오기 전 얌전히 굴기로 한 약속 때문에 할 말이 있어도 참는 것 같았다.

“구사월 가이드.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국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생각에 조항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불현듯 국현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거지?’

에스퍼가 내게 이런 식으로 운을 뗐을 땐 보통 페어 요청을 하거나 남자 친구 여부를 물었다.

국현이 그런 걸 물을 것 같진 않은데.

“아니요.”

무슨 말이든 사적인 질문은 받고 싶지 않아서 단박에 거절했다.

“천천히 검토하면서 들으세요.”

그러나 국현은 긍정의 답을 들은 것처럼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직급으로 보나 등급으로 보나 알파 팀 캡틴과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이 에스퍼랑 다닙니까?”

그의 질문은 유건을 향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알파 팀 신입 같은데, 구사월 가이드가 키워 주는 거예요?”

나는 순간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닌데 왜 웃음이 터진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특히 국현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어투로 물어서 더 웃긴 것 같았다.

“야….”

“아, 아닙니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어떻게 키웁니까.”

국현은 거의 지하에서 업무를 봐서 센터 돌아가는 정세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건이 아무리 신입이어도 보통 A지부 각성자라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우린 최근에 센터에서 각자 큰 사고를 치기도 했고, 아무리 그가 다른 각성자보다 비교적 늦게 각성했어도 S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3년 동안 받는 각성자 교육을 단 석 달 만에 마쳤다.

그 뒤에는 백씨 집안의 서포트가 있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3달 남짓 된 에스퍼가 50건 가까이 게이트에 참여한 것도 그렇다.

그건 단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유건도 과거의 한결 못지않은 전도유망한 에스퍼였다.

“협조 요청 보낼 때 못 보셨습니까? 직급은 낮지만, S급 에스퍼고, 제 이름은 ‘이 에스퍼’가 아니고 ‘백. 유. 건.’입니다.”

얌전히 앉아 있던 유건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힘주어 말하는 모양새가 또 웃겨서 나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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