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센터 근처에 주차해 놓은 유건의 차를 타고 다시 에밀리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흡혈하러 간다고 연락해 놓아서,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밝은 미소로 맞아 주었다.
“어서 와. 어? 유건이도 왔네?”
내가 미리 말해 두었기에 에밀리는 유건과 내가 페어를 취소한 걸 알고 있었다. 어제도 나만 가겠다고 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 나는 안 보고 싶었어?”
유건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에밀리가 방싯 웃으며 답했다.
“보고 싶었지. 어서 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네 것도 만들었단 말이야.”
문틈 사이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방으로 들어가자 정말로 유건 몫까지 3인분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둘이 페어 취소했다고 해서, 크게 싸운 줄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오늘 사월이 설득해 보려고 했는데.”
“싸우긴 했는데 화해했어.”
누구 마음대로?
엄밀히 말하면 유건이 내게 고백 비스름한 말을 해서, 날 선 감정들을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간 상황이었다.
내가 유건을 째려보자 그가 정정했다.
“아니, 내가 진 거지. 원래 더 아쉬운 사람이 지는 거잖아.”
“오…. 둘이 뭐야?”
에밀리의 눈동자에 흥미와 놀라움이 깃들었다. 나는 더 이상 두고 봤다간 오해를 살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동료가 되시겠대. 아주 개헛소리지.”
“그냥 동료 아니라니까. 제일 가까운 동료야.”
그러나 내 변명에도 에밀리는 눈매를 좁히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와 유건을 번갈아 봤다.
그 후로 나는 말을 돌리며 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처음 우리가 이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했을 때처럼, 크리처 고기에서 추출한 피를 음료처럼 마시고 갖가지 음식을 곁들여 먹었다.
“나는 사월이가 통 흡혈하러 안 와서, 이제 유건이 피만 마시는 줄 알았어.”
“일이 좀 바빠서. 내가 요새 정신이 없네.”
“게이트 때문이지? 이제 잘 마무리된 거야?”
“어. 게이트도 그렇고, 다른 것도….”
적당히 배도 채웠고, 딱 말할 타이밍이었다. 하루빨리 에밀리에게 물어보려고 급하게 왔으면서 나는 약간 뜸을 들이고 있었다.
유건이 테이블 아래로 발을 툭 쳤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지금 말하라는 얘기였다.
나도 알아. 안다고.
“근데…. 연구원 찾는 건 어떻게 됐어?”
식사 중 급작스러운 내 질문에 에밀리가 놀란 눈을 했다. 유건을 힐끔 바라보는 것이, 유건이 있는데 말해도 상관없냐는 눈치였다.
“말해도 괜찮아. 나 도와주기로 했거든.”
“그래…?”
그러고선 에밀리는 약간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아직 소재 파악을 못 해서….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녀의 입에선 오늘도 기다리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유건의 시선이 나와 에밀리에게 번갈아 와 닿았다.
나는 뻣뻣해지는 입매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연구원 행방 안다던 지인 번호도 못 알아낸 거야? 아니면 네가 그동안 정보 모았던 무리라도 알려 줄래?”
“아니 그게….”
“그동안 너한테만 맡겨서 미안했던 참이거든. 이제 내가 찾을게. 그때 말했잖아, 에밀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에밀리는 내가 크리먼으로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내가 다그치기 전에 그녀가 스스로 터놓길 바랐다. 우리는 크리먼이 되고 나서 느꼈던 혼란과 절망을 서로 나누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 노력했다.
에밀리가 나를 속였을 리 없다. 속여선 안 됐다. 아니길 바랐다.
유건도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나도 그녀가 세뇌를 당했을지언정, 정말로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고 말해. 빨리. 어서.
그녀는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사월이 너는…. 센터에서 생활하니 위험하잖아. 괜찮아. 내가 찾을게.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탕.
“조금? 언제까지?”
“사월아….”
그녀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순간 화가 나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에밀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언제 알아낼 수 있는데? 기다리라는 말만 6개월 넘게 한 거 알아?”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에밀리가 나를 배신했다는 생각이 점점 머릿속에 강하게 들어찼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게 식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에밀리를 다그쳐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범인과 한패라면. 나를 배신하고 일부러 나를 속인 거라면. 이 식사와 함께 그녀를 보는 게 마지막이라면. 그녀가 크리먼화를 개방해서 나를 공격한다면.
그럼 나는 에밀리를 해칠 수 있을까.
나는 끝내 가장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고 말았다. 그녀를 죽일 수… 있을지.
불길한 공기의 흐름을 느낀 듯, 유건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밀리. 괜찮으니까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말해 줘.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조용히 해, 백유건.”
“너도 에밀리가 일부러 속인거라고 생각 안 하잖아. 얘가 범인이랑 연관이 있었다면 너를 밖으로 불러냈겠지. 그리고 나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줬겠어?”
“그렇긴 하지만….”
유건 말대로 그녀를 범인과 연관 짓는 것 또한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그녀는 움직이기 힘든 나를 위해 매주 크리처의 피를 계속 공수하고, 귀찮은 뒤처리를 나서서 도왔다.
그리고 나를 노릴 거라면, S급 에스퍼인 유건의 존재를 반기는 게 아니라 험담하거나 그와 내 사이를 이간질 하는 게 옳았다.
어쨌든 유건과 나는 사이가 안 좋은 시기가 있었고, 그녀에 대한 신뢰가 더 두터웠으니까.
이게 단지 오해일 수 있으니, 떠보고 감정 상할 게 아니라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그녀에게 터놓고 물어볼 수 없었다.
“범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에밀리는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곤 침묵을 지키는데, 유건이 대신 입을 뗐다.
“항생제를 연구했다는 사라진 연구원. C 지역에서 활동하고, 정신계인 거 알아. 그 사람이 C 구역에서 구사월이 핵이 없는 걸 알고 노린 범인이란 것도. 너도 아는 정보 아니야?”
“…….”
“왜 숨겼어?”
“…….”
“괜찮으니까 말해 봐.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유건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묻는데도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이젠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초조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내가 연구원의 뒤를 쫓으면 범인이 들킬 수도 있으니까 숨긴 거 아니야? 습격당한 그날, 너 일부러 내 장소 흘렸어?”
“아니…! 아니야!”
“아니면 왜 숨겼는지 말해.”
“나는…. 나는.”
“네가 나한테 이렇게 숨길수록 나는 더 의심할 수밖에 없어. 내가 핵이 없다는 사실은 너밖에 몰랐잖아. 내 비밀을 가장 많이 공유한 상대는 너뿐이라고.”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은 눈물을 참아 내려 했지만,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짓 안 했어. 나 의심하지 마. 사월아. 나 아니야. 나 아니란 말이야. 내가…. 미안해. 흐어엉.”
이내 크게 흐느끼며 아이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울자 너무 당황해서 일단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에밀리. 내가 너를 범인으로 지금 단정 지은 게 아니라. 그게 나도 너무 이상해서….”
말이 횡설수설 나왔다.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다독이듯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울었다.
“나는…. 흐윽, 흑. 네가 인… 되면…. 흑. 죽을, 까 봐…. 흐어엉.”
“응? 뭐라고?”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인… 뭐?
“네가 인간이, 흑. 되면, 흐윽. 네가 죽고, 싶다고…. 했잖, 아흑….”
나는 갑자기 머리를 댕 하고 얻어맞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와 미세한 행동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되면 죽을까 봐 숨긴 거라고?”
“으응, 흑…. 흐어어엉.”
그녀의 말을 조합하고는 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는 저 멀리 달아나고, 이 상황이 갑자기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번엔 정말 항생제를 찾아서 인간이 될까 봐, 그렇게 되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봐 걱정돼서 내게 정보를 숨긴 거였다.
그녀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가 그녀를 공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나는 사실 그녀를 해치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녀를 안 보면 안 봤지 위해를 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건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대로 더 이상 묻지 않고 센터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에밀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데, 이번엔 유건이 혼란스러운 듯 말했다.
“그게 뭔 소리야. 인간이 되면… 네가 죽을 거라니.”
“하….”
“말해, 구사월. 저 말 사실이야?”
유건이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그를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에밀리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막 크리먼이 됐었을 때. 나 스스로가 싫었을 때 말이야.”
“그래. 지금은 아니지? 난 또….”
“지금도 가끔 자살 충동이 들긴 해.”
“너….”
“으허어엉.”
유건이 인상을 구기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에밀리의 울음소리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주먹으로 내 팔을 툭툭 치며 서럽다는 듯 웅얼거렸다.
“죽, 지마. 사워라아.”
“그래, 그래. 알았어. 안 죽어.”
“죽지 마아.”
나는 일단 그녀를 달랬다. 에밀리는 한번 울음을 터트리면 잘 멎지 않았다. 지금 내가 더 말을 얹었다간 집이 떠나가라 서럽게 통곡할 것이다.
표정이 심각해진 유건에게 따뜻한 물이라도 떠오라며 시키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
크리먼이 되고 나서 나는 종종 같은 꿈을 꿨다. 처음엔 내가 막 크리먼이 됐을 때 이성을 잃고 연구소 사람들을 공격하는 꿈이었다.
어느 정도 내가 크리먼인 걸 인정하게 되자, 그 꿈은 센터 한복판에서 크리처화가 진행되고 각성자들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총을 겨누는 내용으로 변했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이윽고 누군가와 얼굴이 마주했을 때, 탕, 소리와 함께 그 꿈은 깨고 만다.
온몸에 탄환이 박힌 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그런 상황이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테니까 무의식에서 꿈속의 스스로를 죽여 버린 게 아닐까.
과거는 단지 지나간 일이더라도, 총에 겨눠지는 장면은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꿈을 꿀 때마다 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실제로 몇 번 손목을 그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깊게 상처 낼수록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만 여실히 느낄 뿐이란 걸 깨닫고는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사람이 더욱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과 유대감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는데.
나는 왜 에밀리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