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오토바이 말고 차를 타고 왔다더니, 정말로 호텔 앞에 검은 스포츠카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거 네 거야?”
“어.”
“네가 돈이 어디서 나서?”
유건의 차는 나도 눈여겨보던 브랜드의 신형 스포츠카였다. 공기역학 기술을 활용해 스포티하면서도 깔끔하게 빠진 유선형의 디자인이 다른 차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돈이 있어도 차례를 기다려야 하기에 하루 이틀 만에 구할 수 없는 차량일 텐데. 가격 또한 각성자 월급으로도 만만치 않은 걸로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오토바이 탄 줄 알아?”
유건이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하긴, 그가 아무리 젊고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백씨 가문 에스퍼였다.
세계 부호 3위 안에 드는 가문이니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선 안 됐다. 그리고 보통은 처음 각성해서 지부를 발령받고, 소속 팀과 계약할 때 계약금을 받는다.
그 금액이 꽤 커서 그것만으로도 차 한 대 정도는 살 수 있었으리라.
“근데 차는 언제 샀어?”
“얼마 전에.”
“갑자기 왜?”
나는 보조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단단히 채웠다. 에어백은 잘 터지는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가 유난스럽다고 할까봐 시선으로만 차 내부를 훑었다.
“네가 오토바이는 사고 날 것 같아서 불안하다며.”
그가 단조로운 어투로 말했다. 이전에 에밀리 집에 가기 전에 서로 각자 오토바이와 차를 타고 가자며 아웅다웅 말다툼했던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차를 샀다는 건가?’
나는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가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것처럼 당황한 낯을 하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 여러모로 차 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샀어.”
“그래…. 운전은 오늘 처음 하는 건 아니지?”
“어.”
아무려면 어떤가. 당분간 그와 행동할 일이 많을 텐데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제대로 운전 안 하면 내가 할 거야.”
“예. 그러십시오.”
그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를 산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서 온몸에 힘을 바짝 들어갔다. 연습을 했다고 쳐도 실전과 다른 게 운전이었다.
운전하면 일명 사람의 진짜 ‘성격’이 나오기 마련이다. 유건은 평소에는 유순한 편이지만 욱하는 면이 있기에 어떻게 운전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직도 걱정 돼?”
그러나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그는 운전을 곧잘 했다. 부드러운 핸들링과 편안한 주행감.
시트가 편안한 건지, 차가 좋아서 그런 건지, 유건이 운전을 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유건의 운전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뭐, 괜찮네.”
“그래. 나 좀 믿으라니까.”
아니, 솔직히 안정적이라고 느껴졌다.
‘단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운전하지. 무슨 과외라도 받았나.’
위험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자, 나도 가지고 싶던 차량인지라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옵션으로 제공되는 7인치 조수석 터치스크린과 깔끔한 내부 디자인을 훑어봤다. 그가 운전하면서 곁눈질하다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크리먼 습격 사건과 연관성이 의심된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는 한결에게 물어도 되는 걸 내게 물었다. 아까는 다 아는 것처럼 말했으면서.
“크리처나 크리먼이랑 마주치면 동물들이 이상 행동하잖아. 오늘 사건이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내가 최근에 크리먼한테 습격당해서 선배가 그쪽으로 의심하는 것 같아.”
“근데 크리먼은 크리처화해야 동물들이 겁먹지 않아? 그런 걸로 아는데. 네가 공연 중간에 크리처화 개방한 건 아닐 테고.”
“당연하지.”
“진짜 크리먼이 있었나? 공연 볼 때 이상한 건 못 느꼈어?”
“몰라.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어서.”
그 당시 나는 온 집중을 마린에게 쏟고 있었다. 주변이 환호성 소리에 소란스럽기도 했고, 놀러 왔으니 잡생각을 밀어내려고 의식적으로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때 누가 쫓아온 것 같다고 한 것도 그렇고, 진짜 누가 너 따라다니는 거 아니야? 말 나온 김에 에밀리 먼저 만나러 갈래?”
“에밀리? 오늘? 지금?”
나는 놀란 듯이 물었다. 그에 반해 유건은 여기 올 때부터 생각해 둔 것처럼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에밀리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거라면, 수집한 정보를 네가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숨겼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알면 안 되는 정보라니…. 그게 뭐지? 내가 항생제를 찾다가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 힌트가 있을까. 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무언가. 사라진 연구원이 나를 습격한 범인과 동일 인물이란 사실이라거나.
“형이 센터 도착하면 위치 보고하라고 했으니까 일단 센터 들렀다가 나가자.”
“…어, 근데 선배가 보고 후에도 위치 추적할 것 같은데.” 나는 생각에 잠기다 주의를 집중하며 말했다.
“선배도 내 습격 사건이 뭔가 이상한 거 눈치채고 있어.”
캡틴이 팀원을 관리하려는 이유로 위치 추적 기능을 사용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팀원이 위치 추적 기능을 사용하면 소속 팀의 캡틴에게 알림이 가지만, 한결이 캡틴이니 그는 눈치 볼 사람도 없었다.
한결은 유건이 폭주 위험 단계 상태로 캡슐에서 나갔을 때도 위치를 추적해서 그가 내 숙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결이 지금 내 안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센터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아도 계속 내 위치를 수시로 확인할 것 같았다.
“다 방법이 있지. 나만 믿어.”
유건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난스러운 미소에 그게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
우리는 센터에 도착해서 한결에게 도착했다는 보고를 올리고, 각자의 숙소에 스마트 워치를 풀어 놓고 다시 만났다.
“여길 들어가라고?”
“응.”
“너무 좁은 거 아니야?”
유건이 나를 데려온 곳은 공원 구석에 있는 허름한 철조망이었다. 그 아래 개구멍처럼 둥글게 철조망이 뚫려 있었다.
“잎사귀로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생각보다 많이 안 좁아.”
그는 보란 듯이 가려져 있는 잎사귀를 휙휙 걷어냈다. 그렇게 했더니 정말 구멍이 두 배는 커 보였다.
“너뿐 아니라 가이드들 에스퍼 없이 밖에 나가는 거 통제됐잖아. 다른 가이드들은 여기 통해서 다 나간다던데. 너, 몰랐지.”
“…….”
내가 알 리 만무했다. 이런 은밀한 장소를 공유할 만큼 가깝게 지내는 가이드가 없을뿐더러, 에스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백씨 형제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으나, 한결의 입장에서는 개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 건 선을 넘는 짓이기에 알아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유건은 염력을 쓰니 어렴풋이 공중에 비행해서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늘 위엔 자그마한 드론이 경비를 지키고 있어서 내키지 않아도 어차피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흙바닥을 기어가야 한다니. 옷 더러워지는 거 싫은데.
“내가 먼저 들어가서 잡아 줄 테니까 따라 들어와.”
“어….”
주저하고 있는데 유건이 시범을 보이듯 먼저 나섰다. 그래도 이곳을 통하면 앞으로 외출할 일이 있어도 유건을 굳이 데리고 안 나가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구사월. 내 손 잡고,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어느새 그가 건너편으로 넘어가 흙바닥에 겉옷을 깔아두고 손을 내밀었다. 유건이 지나갈 정도면 나는 큰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릎걸음으로 조심조심 기어가는데, 머리카락 한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힐끗 쳐다보자 철조망에 머리카락 일부가 걸려 있었다. 한 손으로 대충 풀어내곤 다시 잎사귀를 헤치며 전진했다.
그렇게 유건의 손을 잡고 무사히 철조망을 빠져나오는 듯했으나, 마지막에 손을 짚고 있는 부분이 미끄러져서 앞으로 몸이 주욱 밀려갔다.
“읏…!”
중심을 잡기 위해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는데, 이내 단단한 몸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몸을 꽉 붙들며 빠져나와 고개를 들자, 유건의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했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텁텁한 흙냄새와 풀 냄새, 유건의 단내가 섞여 오묘한 향을 자아냈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내 얼굴 위로 촘촘하게 시선을 내렸다.
“…흙 묻었어.”
어색한 분위기에 공연히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가 내 볼을 가볍게 닦아냈다.
“더 묻었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유건이 내 볼을 더욱 넓게 문질렀다. 유건의 손에는 나보다 더 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촉감에 인상을 찡그리며 손등으로 볼을 닦아내자, 그가 나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어.”
언제 어색했냐는 듯, 그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흙먼지가 묻은 무릎이며 팔꿈치를 툭툭 털어 줬다.
바닥에 깔아놓은 옷으로 자기 손을 닦아 내더니,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까지 귀 뒤로 반듯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러곤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유건의 손바닥은 무척 따듯했다. 체온이 조금 낮은 내 손이 그에게 차갑게 느껴질 것 같아 의식될 만큼.
언제부터인가 그는 내게 무척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했는데, 이전에 우리가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아무렇지 않게 가이딩을 하고, 싸우다가 입을 맞춘 데다가 흡혈하다 의도치 않게 깊은 접촉을 해서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와 거리를 두자니 약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작 손잡는 건데 뭐 어때. 동료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변명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그와 매칭률이 높아서 가이딩을 진행할 일이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딱딱하게 굳을 거냐고.
그러다가 그와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유건이 뭘 하든 아무 감상도 들지 않았다. 손을 잡든, 입을 맞추든, 껴안든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아니었다. 가이딩이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잠깐.”
싱숭생숭한 감상에 빠져 있는데 돌연 그가 멈추어 섰다. 나를 품에 안고 허리를 숙였다.
그가 쳐다보는 시선을 따라가자, 상공에 경비용 드론이 위잉,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체향과 함께 심장 고동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심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혈액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위로 맥박치는 두꺼운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다디단 체향에 침을 꼴깍 삼키며 유건의 옷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됐다.”
그는 그 드론의 비행 소리가 멀어질 때쯤,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며 걸었다. 어딘가 부상당한 사람과 걷는 것처럼, 과도하게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유난스러운 배려에 거부감이 일어야 마땅한 일인데 나는 조금도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유건은 당연히 내게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야 하고,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걸 받는다는 느낌이었다.
계속 이어진 생각은 그의 심장에서 퍼져 나오는 혈액은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데에 이르렀다. 분명히 오늘 충분히 갈증을 채웠는데 갑자기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갈증이 인다면 물고 싶다는 생각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가까이 닿고 싶었다.
되도록 피가 가장 많이 흐르는 부위에 입술을 문대고 싶었다. 그건 굉장히 생소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