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3/131)

그런데 오랫동안 마린뿐만 아니라 다른 범고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화려한 배경음이 공허하게 끝이 났고 커다란 수조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어? 수조 색이 이상한데?”

그러다 돌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마린이 떨어진 수조 안을 가리켰다. 짙은 녹색을 띤 수조가 보라색으로, 그다음엔 자줏빛으로, 검붉은색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꺄아!”

환호성에서 비명으로 가득 찬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건 분명 범고래의 피였다. 미세하게 비린 피 냄새가 났다.

아쿠아리스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수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위험해 보이는데.”

한결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아쿠아리스트가 뛰어든 수면을 주시했다. 소름 끼치는 적막에 장내가 고요하게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아쿠아리스트가 떠오르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안 되겠다. 사월아, 잠깐 여기 기다리고 있을래?”

“선배. 들어가게요? 어? 저기 나왔네요.”

그 순간 아쿠아리스트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쇼를 중지하라는 듯 관계자에게 양팔을 엑스자로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수면으로 마린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다른 범고래들도 차례대로 나타났다. 지느러미는 너덜너덜했고 뒤집힌 배에는 날카로운 잇자국 선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조를 활개 치던 범고래들은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사인을 지켜본 관계자들이 긴급하게 방송을 안내했다.

“긴급 안내 방송입니다. 아쿠아 플래닛을 여행하는 관객 여러분. 마린 쇼가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객석에 계신 관객 여러분들은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연 관람에 차질이 생긴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시 한번 안내해 드립니다. 마린 쇼가….”

***

공연이 중지되고 몇 시간 후 A 지부 리마 팀이 아쿠아 플래닛에 도착했다.

“아쿠아리스트가 들어가서 확인했을 때는 이미 범고래들이 전부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린의 입과 이빨에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린이 다른 범고래를 공격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것 같다고 하네요.”

그들은 관계자에게 사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한결과 내게 전달했다.

갑작스럽게 마린이 다른 범고래를 공격한 아주 끔찍한 사고였다. 그나마 인명 피해는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한 겁니까?”

한결이 리마 팀원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정신계나 특수계 에스퍼에게 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시선을 좇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만, 이미 목숨이 끊어져서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물들의 이상 행동. 그 말에 식은땀이 났다. 크리처 혹은 크리먼과 맞닥뜨리면 동물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리먼의 경우엔 크리처화를 개방해야 동물들이 알아채지만, 마린이 높게 솟아올랐을 때… 그때 분명 눈이 마주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다음 마린이 수조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이상 행동을 보였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나 때문에 이상 행동을 하는 건 이론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크리먼인 탓에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월아. 괜찮아?”

어느새 손가락을 말아 쥐고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크리처화를 했을 때 뾰족해진 손톱을 숨기려 하는 습관이었다.

한결이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놀랐지. 일단 센터에 데려다줄게. 느낌이 별로 안 좋아.”

한결은 뭔가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나와 있을 때 벌어진 일인 만큼, 최근에 터졌던 크리먼이 가이드를 습격한 사건을 떠올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도 공연장에 크리먼이 있었더라면, 동물들이 이상 행동을 하는 게 무리가 아님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결은 굳이 그 사실을 지금 입에 올리진 않았다.

“한결 캡틴. 사건 현장에 계셨던 목격자로서 몇 가지 질문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캡틴은 잠시 남아서 진술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려 하자, 리마 팀 팀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동물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 일반인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난 에스퍼의 시선을 최대한 참고하려는 것 같았다.

그 밖에 공연장 안에서 혹 파장을 사용하진 않았는지, 파장이 불안정하진 않았는지,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볼 테지. 아무래도 S급 에스퍼의 파장 또한 변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결은 한동안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스마트 워치로 무언가를 조작했다. 삐빅, 소리와 함께 내 스마트 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알파 팀 지원 요청 건이었다.

“가이드를 혼자 둘 수 없어서 알파 팀 에스퍼가 지원오면 합류하겠습니다.”

“캡틴이 저희를 도와주시는 동안 리마 팀 에스퍼가 구사월 가이드를 경호하겠습니다.”

“알파 팀 S급 가이드입니다. 얼마 전 크리먼에게 습격당해서 집중 보호 대상입니다. 알파 팀에서 경호하겠습니다.”

한결은 리마 팀원에게 딱 잘라 말했다. 현재 공연을 본 관객들은 리마 팀의 통솔하에 갖가지 조사에 임하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닌 만큼 상황은 분주하게 흘러갔다.

만약 단순 사고라면 상관없지만, 누군가 고의로 동물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사건 현장에는 일명 골든 타임이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범인을 잡기 힘들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증거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 확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하다고 리마 팀에서 내 경호를 맡았다가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리마 팀은 더욱 곤욕을 치를 것이다.

리마 팀원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상관의 눈치를 봤다. 상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서자, 그는 힘없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있어도 된다고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의 말대로 나는 아직 집중 보호 대상이었기에 한결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과한 행동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이상한 사고에 휘말릴수록 최대한 눈에 튀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나는 한결을 따라 아쿠아 플래닛 뒤쪽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그가 한 층을 전부 빌리는 걸 보고는 경악스럽긴 했지만, 순순히 그의 뜻에 따랐다.

“한 시간 내로 알파 팀 에스퍼가 도착할 거야. 나는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먼저 에스퍼랑 센터로 돌아가.”

“네. 근데 누가 온대요?”

“유건이. 주말인데 지원 요청 바로 받더라.”

주말에 근무하는 각성자가 따로 있는데, 굳이 백유건이 오다니. 대충 예상은 했지만 유난스러웠다.

여기서 센터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리니까, 불편한 사람과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건가. 근데 이 녀석은 주말인데 아무 데도 안 가나?

“혹시 사월이 너도 느꼈어?”

“뭘요?”

유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한결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린이 뛰어올랐을 때. 얼굴이 우리 쪽을 향한 것 같지 않았어?”

나는 그 순간 얼굴이 경직됐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너무 찰나여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얼굴을 완전히 그에게서 돌렸다.

“하긴…. 일단 우리 주변 좌석에 있던 관객들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혹시 크리먼이 근처에서 너를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역시 그쪽으로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선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이 사고가 더 커지지 않고 별일 없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머리 식히러 와서 결국 제대로 쉬지도 못했네.”

한결이 아쉽다는 듯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에요. 끝이 안 좋긴 했지만, 재밌었고 잘 쉬었어요.”

“진짜?”

“네.”

“그래도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내가 센터로 데려다줘야 안심이 될 것 같은데.”

그가 아쉬워하는 것이 너무 눈에 보였다. 원래는 쇼를 관람하고, 아쿠아 타워 가장 위쪽에 위치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기로 했었다.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더불어 중간에 사람들에게 한결이 에스퍼인 것을 들킬 뻔도 했고, 분명 순조롭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가 오늘을 많이 기대해서 더욱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근데 백유건 오토바이 타고 오는 거 아니에요? 저 오토바이 싫은데.”

나는 괜히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을 것 같아 말을 돌렸다.

“그러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갈래? 내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라올게.”

“됐어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일 천천히 보고 오세요. 차 렌트해서라도 갈게요.”

그는 그 후에도 일하러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만연해 보였다. 스마트 워치로는 그를 닦달하듯 메시지가 계속해서 도착하는데 끊임없이 무시했다.

여기 디저트가 맛있다는 말과 함께 룸서비스로 자그마한 시폰케이크를 시키기도 했다. 유건은 내가 그걸 반 정도 먹어 갈 때쯤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한결이 나 대신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 줬다.

“왔어?”

“어. 구사월은?”

“안에.”

거친 숨소리와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은커녕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유건은 마치 계단을 뛰어 올라온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어.”

‘다친 데는 무슨. 내가 공격당한 것도 아니고.’

나는 소파에서 여유롭게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각 케이크도 질려서 다 못 먹는데, 이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하게 온 것 같은 유건의 행동에 조금 머쓱해졌다.

“사월이 데리고 센터로 먼저 돌아가. 나는 여기 남아서 조사하는 거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알았어.”

“그런데 유건아.”

“어?”

“뭐 타고 왔어?”

한결은 내가 조금 전 오토바이를 질색하던 것 때문인지, 유건에게 질문했다.

진짜 백유건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고 하면 같이 가려고 하려는 건가.

“차 타고 왔지.”

“누구 차?”

그럴 리가 없다는 눈빛으로 한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 또한 그가 차를 운전한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자연히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 차. 둘 다 뭐야. 걱정하지 마.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내게 다가왔다. 한결은 뭔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유건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겉옷을 챙겼다.

“센터 도착하면 연락해. 크리먼 습격 의심되니까 갈 때도 주의하고.”

“네.”

“케이크 10분 후에 찾아갈 수 있게 몇 개 포장해서 프런트에 맡겨 놓을게. 챙겨서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센터로 바로 돌아가.”

“알았어요.”

한결은 잔소리와 함께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방을 나갔다. 유건은 그제야 내 옆에 풀썩 앉았다.

“이게 그렇게 맛있어?”

유건 또한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김이 샌 것 같았다. 나는 예전에 에밀리 집에서 그가 물었던 말이 떠올라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너보다는 맛없어.”

그가 곧바로 키득키득 웃었다. 확실히 데면데면한 다른 에스퍼보다 유건이 훨씬 편했다. 오늘 하루 종일 뭔가 불편했는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