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2/131)

가끔 한결은 모든 일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 성격이 지금도 작용한 듯했다.

그래도 알파 팀 가이드를 내게 모두 맡길 정도로 나를 어느 정도 믿어 준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연인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배려하고 맞춰 나가고, 힘든 일도 같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게 맞다고 부모님이 항상 말씀해 주시고는 했다.

물론 아는 것과 별개로 나도 독단적인 성격이 있어서 그것이 무척 힘들지만, 지금은 오히려 주도권을 완전히 상대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과거 그의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해서 한결이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 같지만 글쎄….

그가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는 내가 생각이 깊어지자,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네. 제가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이 오갔다는 게 일단 기분이 나빠요. 선배도 그런 행동하기 전에 적어도 저한테 언질을 줬어야죠.”

한결은 내 대답을 듣고 괜찮은 척도 못 하겠는지, 크게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수습할 시간도 없었다. 그가 혼자 너무 멀리 생각하고 행동한 것 같았다.

‘백송이 가이드한테 처음 들었을 때도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그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갔다. 누구보다 내가 이런 걸 싫어하는 걸 알면서 끝까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하는 그가 미웠다.

“내가 아직 어리다…. 회의실에서 너랑 유건이가 페어 신청서 쓴다고 같이 있는 거 보니까 눈이 번쩍 떠지더라.”

그는 허탈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날을 되새겨보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였다.

“가족들이 함부로 못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유건이한테 질투 나서 한 행동도 맞아.”

“백유건을 왜…. 저는 백유건이랑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건 나지. 15년 동안 내 감정 하나 솔직하게 표현 못 해서 곁을 맴돌았는데 유건이는 결국 네 옆에 섰잖아.”

“그건….”

한결과 유건은 형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이 상반됐다. 어떠한 목적이 있을 때 한결은 꾸준히 노력해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유도하는 반면, 유건은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직진으로 부딪히고 쟁취하는 성격이었다.

한결이 유건과 간밤에 가이딩을 진행한 걸 안다더니,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둘은 어느 성격이 더 낫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유건과 페어를 하고 그와 붙어 다녔던 건 단지 그에게 비밀을 들켰기 때문이다.

나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백유건이 선배보다 나아서 곁에 두는 거 아니에요. 선배 어머니와 관련된 일과 가문 때문에 제가 밀어내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로 내가 밀어낸다고 생각한다면, 한결이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아 그건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건 한결과 내가 연애를 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었다.

“저도 선배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누구를 못 만나는 이유가 있어요.”

그가 아무리 우리가 만나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뒷말이 없게끔 초석을 단단히 다진다고 해도, 내가 크리먼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우리가 함께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말했다.

“그건, 아직 알려 줄 수 없는 거지?”

“네….”

“유건이는 그 이유를 아는 거고?”

“…….”

깊어지는 질문에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에게 아직 알려 줄 수 없는 게 아니라, 영원히 전할 수 없는 얘기였다. 이 얘기를 들으면 크리먼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 더욱 강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옷깃 너머로 그가 어머니에게 공격당했을 때 생겼다던 목 안쪽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흉터가 우리는 절대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또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결이 나같이 두려워서 그동안 숨기고 이 같은 행동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만약 내가 그를 만나고 싶다면, 실은 내가 크리먼이라는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해결한 후에 그를 만나려고 했을 것이다.

그가 진실을 안다면 나를 혐오할 거라고 단정 짓고 있으니.

그렇다고 내가 그의 의견을 듣고자, 크리먼이란 사실을 밝히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그는 과연 내가 크리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성적인 감정은 고사하더라도 나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알파 팀 캡틴으로서 내가 크리먼인 걸 은폐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깊게 생각할수록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떨릴 정도로 그와 나를 둘러싼 현실이 참담했다.

“그래. 네 생각 존중해. 어차피 두 번째 데이트잖아. 천천히 생각해 봐.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받아들일 거야.”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겹쳐 왔다. 이렇게 다정하게 대할수록 마음이 착잡했다.

그와 나의 관계에 희망을 가지려는 한결의 얼굴을 점점 보기 힘들었다. 15년 동안 쌓아온 관계가 다른 형태로 변하려고 하니, 그동안 묻어 두었던 풍파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

나눴던 대화의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지라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한결은 몇 번이고 내 표정을 살피며 되물었다.

“기분 별로면 다음에 올까? 돌아가서 쉴래?”

“아니요. 1년에 한 번 있는 공연이잖아요. 그냥 들어가서 봐요.”

나는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애써 상념을 밀어냈다. 오늘은 어쨌든 즐기려고 온 것이고,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한결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그 선택은 내가 인간이 돼야 가능했다.

“진짜 괜찮아요. 이대로 돌아가기 아쉽잖아요. 저도 보고 싶었던 공연이에요.”

“그래.”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붙잡으며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이윽고 한결 또한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운동장 크기의 커다란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가까운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튈 것을 대비해서 우비를 입고 있었다.

우리 좌석은 가장 윗줄에 있었는데 통유리로 된 작은 룸 형태여서, 조금도 물이 튈 염려가 없었다.

“아무래도 네가 사람 많고, 물 튀는 거 싫어할 것 같아서 위쪽으로 골랐어.”

“네. 좋아요. 우리 뭐 먹으면서 볼까요?”

일부러 물을 맞으러 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물을 맞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 해도 찝찝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돌아다니는 식품 판매원에게 맥주와 감자튀김 종류를 몇 개 사 왔다. 밖에서 먹는 맥주는 시원했고 놀러 왔다는 기분을 물씬 느끼게 했다.

“시작한다.”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가운데에 아쿠아리스트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범고래 세 마리가 넓은 수조 안을 힘차게 헤엄치며 등장했다.

“와아!”

그들은 서로의 사이를 매끄럽게 유영하며 장내를 한 바퀴 돌았다. 가운데로 모였다가 양 갈래로 높게 솟아올랐다.

푸쉭.

“꺄!”

범고래가 일으키는 거친 파도에 수조 너머로 물이 쏟아졌다. 앞줄에 있는 사람들은 흠뻑 젖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범고래는 아쿠아리스트와 뽀뽀하기도 하고, 공중제비, 지느러미로 손을 흔드는 모션 등, 다양한 묘기를 부렸다.

다.

‘범고래가 지능이 높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부러 아이가 많은 관객석을 향해 꼬리로 물보라를 만들 때는, 마치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검은 바탕에 하얀 무늬가 있는 범고래가 아니라 푸른빛을 띠는 범고래가 출연했다.

“와아. 마린이다!”

저 범고래의 이름은 ‘마린’. 이 범고래 쇼가 유명한 이유였다.

주위에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함성과 플래시가 터졌다. 반짝거리는 푸른빛은 은은한 은하수를 연상시켰다.

마린이 수면 위로 크게 날아오르며 입으로 물줄기를 쏘자, 원 모양의 얼음이 생성됐다.

그 안으로 다른 범고래들과 허들을 넘듯 뛰어올랐다가 다시 몸으로 부딪쳐 얼음을 부숴 내고, 다시 다양한 얼음 조각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커다란 수조 안이 범고래의 놀이터가 되었다.

“진짜 신기하네요. 어떻게 저렇게 섬세한 컨트롤을 하죠?”

마린은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몸체와 섬세한 빙결 조각의 조합으로 유명해진 범고래이다. 마린이 물을 뿜을 때마다 자연계 빙결 능력을 지닌 아쿠아리스트가 얼음 조각을 만들어 내는 게 마치 범고래 스스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예전에 리마 팀에서 확인해 봤는데 아쿠아리스트가 숙련된 능력 사용자라고 하던데. 게이트에 들어갈 정도로 등급이나 능력치가 높은 건 아니라 센터에 소속되어 있진 않지만 컨트롤 훈련의 성과가 더해졌나 봐.”

리마 팀은 동물을 관리하는 팀이었다.

주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전투용 동물들을 사육하고 훈련했지만, 그 밖에 사회에서 필요로 해서 동물과 연계하여 능력을 쓰는 각성자도 주기적으로 관리했다.

“놀랍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쇼에 집중했다. 마린은 아쿠아리스트의 손 모양에 맞춰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고 동시에 수면 위가 얼어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얼음 성이 완성되었고, 주위의 다른 범고래들이 아름다운 물줄기를 만들었다.

“와아!”

관객석이 들썩들썩하며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얼음 성을 부수려는지 마린이 우리가 앉은 관객석 높이까지 높게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보았던 범고래들의 점프에서 물방울 하나 맺힌 적 없었으나, 처음으로 후드득, 하고 유리창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가까이에서 본 마린은 다른 범고래보다 족히 세 배 이상은 커 보였다.

순간적으로 범고래와 눈이 마주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공에 있을 때 우리 쪽으로 얼굴이 향해 있었다.

그 크기와 위용에 압도되어 저절로 몸이 뒤로 기울었다. 마린은 그대로 아래로 풍덩 빠지며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켰다.

공연장 전체에 비가 내리듯 물줄기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다시 마린이 활개 치길 기대하며 수조 안을 주시했다.

하지만 수조로 들어간 마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야? 뭘 하려는 거지?”

“너무 가까이에서 보지 마. 갑자기 튀어나올라.”

마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한껏 상승했다. 다음은 어떤 액션을 취할지 저마다 추측하고,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열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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