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1/131)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부딪히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품으로 확 끌어당겨서 다행히 충돌하진 않았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한결이었다.

“죄송합니다아.”

“괜찮습니다아.”

꾸벅 90도로 배꼽 인사를 하는 아이를 따라하는 듯 한결이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했다. 그는 아이들에겐 굉장히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작 작은 아이인데 엄청난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가 날렵하게 몸으로 막아서는 것이 멋쩍게 느껴졌다.

미세하게 파장이 느껴지는 게, 신체를 강화해서 달려온 것 같은데. 너무 재능 낭비가 아닌가.

“너는 죄송합니다. 안 해?”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는데, 한결이 사뭇 강경한 어조로 나를 혼내듯 말했다. 얼굴엔 장난기가 그득 묻어났다.

그 말에 아이는 정말 내게 사과받고 싶은지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 순수해 보여서 나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장단을 맞춰 줘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엄마가 뛰어다니지 말랬지!”

다행히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데려가서, 내가 고개를 숙일 일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저 애가 나한테 달려와서 먼저 부딪히려 한 건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하마터면 한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뻔했다.

“푸흡.”

한결은 내 잠깐의 고뇌를 읽은 건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선배.”

“응.”

“저 좀 놀리지 말아요.”

“알았어. 예전엔 사과도 잘하고 착했는데, 조금 잘못 컸다 싶네.”

“아, 진짜.”

“그러니까 길 안 잃어버리게 손 잘 잡고 다녀. 없어져서 놀랐잖아.”

그가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는 그 후에도 “돌고래랑 사진 찍을래?”, “아이스크림 먹을래?” 등 나를 애 취급하며 놀려 먹었다.

당연히 나는 그의 모든 권유를 거절했다. 이렇듯 그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우리가 보내 온 세월 때문인지 종종 옛날 버릇이 튀어나왔다.

한결의 태도에 기분이 별로일 때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그가 손을 잡는다거나 어깨를 쥐는 가벼운 스킨십을 해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건 좋았다.

“아니면 사진은 나랑 같이 찍을래? 저기, 저희 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아니, 잠깐.”

“네. 그럼요.”

저지할 틈도 없이 한결이 자신의 휴대폰을 지나가던 여자에게 건넸다. 10m 남짓한 높이의 대형 수조 앞은 이 아쿠아리움의 포토 존이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쥐며 자기 쪽으로 당겼다.

“마스크 벗고 찍을까?”

“그건 좀 불안하지 않아요?”

“모자 눌러쓰면 되지.”

약간 상기되어 보이는 한결의 태도에 나는 마스크를 아예 벗지는 않고, 턱 쪽으로 조금 끌어 내렸다. 그에 반해 그는 마스크를 훌렁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찍을게요.”

“네.”

다행히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감 속에 우리는 다소 어색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유난히 내가 카메라 앞에서 굳어 버린 탓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놀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사진을 찍는 걸 좋아했지만, 크고 나서는 누군가와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외부로 나가면 악질적인 파파라치가 들러붙어서 더욱 거부감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더 찍을게요.”

“왜 이렇게 뻣뻣하게 서 있어.”

“사진 찍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안아 줄까?”

“하기만 해 봐요.”

그 당시엔 한결과 사진을 찍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를 좋아했으니까 둘만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그때마다 나를 무릎에 올려놓거나, 팔로 들어 올렸다. 첫 만남 때 내가 여덟 살이었으니, 그렇게 적은 무게도 아니었을 텐데.

빙긋이 미소 지은 한결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한 것이 느껴졌다.

“찍겠습니다.”

“선배. 얼른 앞이나 봐요.”

나는 그에게 주의를 줬지만, 왜인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한결이 어깨를 쥔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내 머리통이 그의 널따란 어깨에 폭 기대어졌다.

“오오.”

사진을 찍어 주던 여자가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그 행동에 반응하며 낮게 웅성거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려다봤다.

탁, 하고 내 모자챙이 한결의 모자와 부딪히더니, 이내 그의 모자가 등 뒤로 넘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한결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와, 남자 진짜 잘생겼다.”

“어? 저 사람…. 나, 본 적 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눈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 주던 일행들이 한결을 보며 말했다.

“나도. 저 사람 우리 언니가 좋아하는 에스퍼인데?”

“여자도 모자 쓰고 있는데, 각성자인가?”

“여자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이내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한결은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휴대폰을 받아 왔다.

“큰일 났다. 도망가자.”

큰일이라며 사고가 난 당사자답지 않게,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나는 점점 몰려드는 인파에 당황해서, 그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

우리가 사람들을 피해 도착한 곳은 차 안이었다. 어차피 아쿠아리움도 거의 관람했으니, 범고래 쇼 공연장이 있는 아쿠아 플래닛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갑자기 고개 들어서.”

“아니야. 내가 말하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어깨에 기댄 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놀랐을까.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는 등급이 높은 게이트를 파훼할 때마다 알파 팀 캡틴으로서 여러 번 공식 석상에 섰다.

어릴 적부터 선이 굵은 이목구비와 현장에서 단련된 몸은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 덕분에 대중들은 잘생기면 다 오빠라며 ‘한결 오빠’라는 말을 고유명사처럼 그에게 붙였다.

그만큼 잘 알려진 에스퍼였기에 사람들이 알아챘다면, 기사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네가 불편하면 그렇게 하고.”

상관없을 리가 없을 텐데. 나야 무슨 말이 떠돌든 정말 상관없는 입장이지만, 그는 ‘백씨 가문’과 ‘센터’, ‘에스퍼’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있어서 여러모로 피해가 클 터였다. 그가 괜찮다고 해도 센터에서, 혹은 백씨 가문에서 스캔들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여유롭지? 뭔가 있나?’

“그랬겠지. 한결 오빠가 연애만 자기랑 하면 된다고 몰아붙였다던데. 그 녀석이 허락을 안 하면 어쩔 건데.”

불현듯 예전에 송이와 소란이 있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결이 가족들에게 나와 연애만 자기와 하면 된다고 했다고. 그래서 유건이 허락했다는 아주 이상한 얘기를 들었었다.

“선배,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뭔데?”

“제가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

“뭔데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얼토당토않아서 말을 꺼내길 주저했다. 한결이 궁금하다는 듯 유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간신히 입을 뗐다.

“혹시 가족들한테 선배랑 저랑 연애할 거라고 말했어요? 아니, 제 얘기를 한 적 있어요?”

마침 신호가 걸렸다. 차가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그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그리고 내 예상과 전혀 빗나간 대답을 했다.

“아니…. 왜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당시 당연히 송이가 꾸며 낸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말이 나왔어도 분명 말이 와전되었을 거라고. 소문이란 게 무릇 그러한 성질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급하게 묻지 않은 것인데 이 말이 사실이라니. 한결은 난감한 기색으로 이마를 문지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는 돌연 갓길에 차를 세웠다. 뭔가 제대로 대화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너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했던 거 기억나?”

“네.”

“언제까지 미룰 순 없으니까, 말하는 게 낫겠지.”

그는 결심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그동안 알아 온 한결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서 도저히 납득이 안됐다.

이건 제대로 된 이유가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이내 차분한 어조로 그가 그동안 숨겼던 이유에 대해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 사람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때마다 국민 대다수가 등급 높은 에스퍼이길 원하잖아. 내 어머니의 사고가 그것과 연관이 있었거든.”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가 나를 만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선 크리먼과 관련이 있을 거란 내 예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한결이 이전에 내게 그의 어머니는 크리먼에게 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고 한 것은 전부 이야기해 준 게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문의 압박과 에스퍼를 낳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크리처를 데려오는 무리수를 두었고, 오히려 자신이 물려서 크리먼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린 한결을 공격했다고….

그 얘기와 함께 이미 집안에서 내가 막 각성했을 당시, 한결과 결혼 얘기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순간 불쾌함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써서, 한결이 내 눈치를 보기도 했다.

한결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내 의견도 묻지 않고 저들끼리 속닥댄 것이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에겐 너와 나 사이에 끼어든다면 우리 가문의 일을 모두 알린다고 말했어. 이 얘기를 들으면 누가 우리 가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하겠어.”

확실히 국민이 원하는 것과 가문의 압박은 달랐다. 생각보다 그 압박이 굉장히 심했으니, 한결의 어머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센터에서 너랑 잠깐 소문이 났어도 우리 집안에서 아무 조치를 안 취했던 거고.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불러들여서 한마디 하셨겠지.”

“뭐라고요?”

“나와 페어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의 할아버지인 센터장님과 아버지인 지부장님이 묘하게 마주칠 때마다 매번 아는 체를 하고, 송이와 충돌이 있었을 때 큰 징계 없이 넘어간 일이 떠올랐다.

한결은 점점 심하게 굳어지는 내 표정을 보며 나보다 더욱 얼굴에 그늘이 졌다.

“지금 내가 다 얘기하는 건, 네가 이 얘기를 모르고 나를 선택하는 건 불합리하단 생각에서야. 그렇지만 나를 만난다는 결정을 한다면 네가 이러한 짐에서 벗어날 수 있게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놨어. 이 문제에 대해선 네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없어.”

“무슨 계획이요?”

“아이는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

“네?”

“일단 가문 사람들이 섣부르게 행동 못 하게 막으려고 한 소리야.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일상인 사람들이라, 어지간히 말하면 들은 척도 안 할 것 같아서.”

“그래도 그건….”

“그래. 너한테 말도 안 하고 가족에게 먼저 만나겠다고 말한 건 과한 행동이 맞아. 하지만 나는 또다시 그 상황이 와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

“내 어머니도 그런 압박 못 이겨서 그런 사고 난 거고, 나는 옆에서 어머니가 고통받는 거 지켜봐 와서 절대 네게 그런 상황 겪게 하고 싶지 않아. 혹여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

그러니까 그는 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가문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초석을 깔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해도 내 의견을 묻지 않고, 가족들에게 나를 만나겠다고 먼저 말한 건 방법이 잘못되었단 생각은 변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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