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을 제대로 잡았는지, 오늘은 날씨가 무척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따뜻한 커피.
얼마 전 규모가 큰 게이트가 출연한 것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델타 팀 에스퍼가 저희 팀 캡슐에서 가이딩을 받았는데, 희운이가 그 캡슐 들어갔었거든요. 근데 등급 낮은 가이드가 왔다고 쫓아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도 등급 낮은 에스퍼 가이딩하기 싫다고 한 거야?”
우리는 바다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게이트와 센터에서 있었던 이슈에 관해 얘기했다. 둘 다 삶의 비중에서 일이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네.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딱 봐도 파장 때문에 예민해져서 괜히 성질부리는 것 같길래요.”
그중에 다른 팀 에스퍼가 우리 팀 가이드를 함부로 대한 사건이 있었다. 그 에스퍼가 치명상을 입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알파 팀 캡슐에서 쫓아냈다.
위급한 상황인 걸 인지했지만, 나도 열이 받은 상황인지라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런 건 상관없어. 에스퍼가 파장 낮아서 예민하다고 다 받아 줄 필요는 없지. 무슨 동물도 아니고 에스퍼도 참으려면 다 참을 수 있는 건데. 그 에스퍼 이름 기억해?”
한결에게 조금은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되려 살짝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팀원을 건드리는 걸 무척 싫어했다.
“강도운이요. 델타 팀 B급 에스퍼라고 했어요.”
나는 기억해 놓은 이름을 일러바치듯이 곧바로 말했다. 그날 일을 상기하며 짜증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양희운, 걔는 자기가 팀에 민폐 끼친 것 같다고 답답한 소리나 하고…. 진짜 열받았다고요.”
희운은 D등급으로 등급이 낮은 편에 속하나, 에스퍼의 건강 관리 능력이 뛰어난 가이드이다. 알파 팀 가이드를 영입할 때 한결은 내게 의견을 물어보곤 했는데, 내가 일부러 콕 집어서 데려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알파 팀에 들어와서 에스퍼의 병증을 잡아내는 데 탁월한 실력을 입증했다. 알파 팀은 평균적으로 등급이 높아서 파장량은 부족할 일이 없지만, 만족도 면에서 어중간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이 희운을 보고 좋은 영향을 받길 바랐다.
그런데 희운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도 어딘가 자존감이 낮은 성격 때문에 항상 제 밥그릇을 못 챙긴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가이드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내가 영입하자고 해서 데려온 가이드라서 그런지 위축된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각성자가 등급에 대한 열등감을 이겨 내는 건 어려운 일이야. 차차 나아지겠지.”
“선배는 에스퍼한테는 안 그러면서 가이드한테 너그러운 것 같아요.”
“네가 알아서 잘 교육하니까.”
알파 팀에 오랫동안 근무한 가이드들은 주 업무인 가이딩 외에 부가적인 업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그게 신입 교육이었는데, 그 때문에 송이와 대놓고 싸운 탓에 껄끄러운 관계인데도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송이뿐 아니라 지수, 수아, 희운이 모두 내게 교육받았다. 사근사근한 성격은 못 되는 터라 다른 가이드를 교육할 때도 무뚝뚝한 태도로 임하기도 했고, 센터 자체가 위계질서가 확실한 곳이기에 알파 팀 가이드들이 나를 더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방사 가이딩때는 별일 없었어?”
한결은 내내 다른 가이드 얘기만 꺼내더니 돌연 내 이야기를 물었다.
“네.”
“안전 수칙 잘 지켜서 진행했고?”
“네.”
“파장 10% 아래까지 쓴 건 아니지?”
에스퍼의 폭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이드도 파장이 너무 낮게 내려가면 몸에 이상이 나타났다. 증상은 가벼운 기침부터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까지 찾아오는데, 나는 각성자가 되고 아직 한 번도 10% 아래로 파장이 떨어진 적 없었다.
“네.”
“중간에 송이 페어는 왜 들어온 거래?”
나는 막힘없이 대답하다가 멈췄다.
‘이안이 새벽에 나를 찾아온 건 어떻게 알았지?’
경비 에스퍼 외에 다른 에스퍼는 원래 방사 가이딩 중에 들어와선 안 됐다. 한결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곁눈질로 힐끔 바라봤다.
“무슨 일 있었어?”
“급한 일이 있어서요.”
“뭔데?”
“어…. 에코 팀에 암호 조사 요청했다면서요. 가이딩 얼마나 진행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언제 결과 나오는지 알려 달라고 했거든요.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찾아왔더라고요.”
“꽤 오래 있다가 갔다던데.”
“경비 에스퍼가 잠들어서, 같이 있어 준 것뿐이에요.”
나는 처음에는 조금 멈칫거렸지만 이내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안이 자기 업무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을 적절히 섞어서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됐다.
그 당시에는 심기에 거슬려서 나가라고 난리였는데, 도리어 그 대화가 도움이 된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거짓말할 일도 없었겠지만.
“자기 가이드나 챙기지, 웬 오지랖이래.”
그러다 한결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평소 한결답지 않은 말투에 그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여전히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선배가 한 소리 해 주세요.”
“진짜 그래도 돼?”
“네. 제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해 주면 가장 좋아요.”
그는 기분이 좋은 것처럼 소리 내 웃었다.
‘장난인 줄 아는 건가. 진심인데.’
아무리 그날 투시해서 이안의 몸속에 크리처의 핵이 없다는 걸 파악했다고 하나, 의심스러운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크리먼이 아니더라도 범인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저 월요일에 보고할 거 있는데요.”
“뭐?”
나는 내내 걸리던 주제에 대해 입에 올렸다.
“백유건이요. 어제 숙소 가다가 마주쳤는데 파장이 위험한 단계인 것 같길래 제가 숙소에서 가이딩 진행했어요.”
폭주 위험 수준까지 내려간 유건의 파장이 주말 새에 안정기로 들어섰단 걸 알면, 한결은 이상한 걸 눈치챌 것이다.
유건에게 그 정도 가이딩이 가능한 건 센터에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숨기려고 해도 어차피 한결이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이딩은 굳이 한 공간에서 잠까지 자 가면서 진행할 필요는 없었고, 한결을 만나기 직전까지 유건과 있었다는 것이 말하기 불편했다. 그래서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알아. 어제 체크했어.”
“네?”
“유건이가 갑자기 가이딩 중에 나갔다길래 위치 추적해 보니까 너희 숙소 쪽이길래.”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폭주 위험 수준의 에스퍼가 사라졌는데, 알파 팀 캡틴인 한결이 체크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잘했어. 아침에 파장 확인해 보니까 안정기더라. 나는 앞으로도 유건이가 고집 그만 부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너에게서 가이딩 받았으면 좋겠어.”
도리어 유건과 가이딩 하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 알파 팀 캡틴으로서도, 유건의 형으로서도 당연한 판단인데 나는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거의 다 왔다. 이제 센터 얘기는 하지 말자. 바람 쐬러 나온 건데 일 얘기 너무 많이 했다.”
“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드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해수면에 빛 조각들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시원하고 짭짤한 냄새가 나는 바람이 얼굴에 흩뿌려졌다.
‘근데 백유건 얘기도 센터 얘기인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오늘은 쉬러 온 것이니, 최대한 복잡한 생각은 자제하기로 했다.
***
빛을 모두 다 차단한 공간 안에 자그마한 원형 수조만이 은은하게 발광했다. 손가락 반 마디만 한 해파리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반투명한 몸체는 내가 크리처화를 개방했을 때처럼 몸의 가장 안쪽까지 투영됐다. 위로 수축했다가 뻗어 나가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움직임은, 그저 그 움직임 자체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불멍 같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에 하는 건가….’
기분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마음이 물 위를 부유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평안해졌다.
“예쁘다. 그렇지?”
“네.”
옆에서 나와 같은 수조를 바라보던 한결이 말했다. 공간을 채우는 음악 소리도 어딘가 우주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수조를 감상하다가 어두운 공간을 나왔다.
“30분 정도 남았네. 어때, 더 둘러볼래?”
우리는 모래 해변을 거닐다 일 년에 한 번 아쿠아 플래닛에서 공연하는 범고래 수중 쇼를 보러 왔다.
그가 마침 공짜 표가 생겼다고 해서 쇼가 시작하기 전에 근처 아쿠아리움에서 수중 생물을 관람하고 있었다.
“네. 여기 지하도 있는 것 같던데. 펭귄 보러 갈래요.”
“동물 좋아하는 건 여전한가 봐. 나는 네가 계속 멀리서 봐서 이제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동물이나 말 못 하는 자그마한 생물에게 자연히 거리를 두는 건, 내가 크리먼이 되고 나서 생긴 버릇 중 하나였다.
크리처화를 개방하면 간혹 동물들이 으르렁댄다던가 자해를 하는 것처럼 머리를 땅에 박는 이상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크리처의 목적이 살아 있는 생물의 살생인 만큼,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동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에밀리에게 물어봤었는데, 실제로 동물들은 크리먼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크리처화만 개방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없지만, 나는 괜한 불안감에 항상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좋아해요. 귀엽잖아요. 오랜만에 오니까 새로운데요?”
“다행이다.”
한결이 안심했다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오늘이 일 년에 몇 없는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인 만큼 아쿠아리움에는 사람이 많았다.
S급 각성자인 탓에 둘 다 얼굴이 알려져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들뜨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기대했던 펭귄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 지루한 구간이 있으면 빠르게 건너뛰며 다른 수조를 구경하러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한결이 곁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