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49/131)

“어제는 분위기가 그래서 좀 그렇게 됐는데 내가 널 좋아하게 되거나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나는 그냥….”

막상 말을 꺼내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해서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되긴 뭐가 돼…. 말이 한번 꼬이자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졌다.

“알아. 오해 안 해.”

그러나 유건은 마치 예상했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너도 오해하지 마. 에스퍼들 다 그렇잖아. 가이딩 때문에 성감 고조되면 다 짐승 같아지는 거.”

짐승 같다니. 뭘 말하는 거지? 키스해 달라고 한 거? 야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가 짐승 같진 않았다. 키스도 내가 거절하자 억지로 하지 않았고, 중간에 그만하자는 말도 들어줬다.

“나도 그랬던 거야. 몸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네가 중간에 그만하자고 해서 다행이지. 큰일 날 뻔… 아, 아니. 가이딩이 원래 다 그렇잖아.”

그는 나보다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유건은 2단계 이상은 하지 않은 거로 아는데. 가이딩이 원래 그렇긴 뭐가 그렇단 말인가.

오히려 이게 그저 가이딩이라면 거리낌 없이 그와 키스했을 것이다. 점막을 통한 가이딩은 효과가 제일 좋으니까.

그러나 그가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때문에 나도 모르게 키스를 피했다. 유건도 말을 더듬는 걸 보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일부러 어제 있었던 행위를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래. 어제는 고마웠어. 덕분에 위기는 넘겼네.”

여기서 내가 왜 우리가 이렇게 어색한건지 말을 바로 잡으면, 분위기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말을 돌렸다. 유건은 내게 가이딩을 받고 나는 그에게 피를 취하면 된다. 우리 사이에 이 이상의 감정이 섞여있어선 안됐다.

그도 그걸 알 것이니 이토록 외면하려는 것 아닐까. 내가 크리먼이니 좋아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너 근데 이안이 들러붙는단 얘기 어디서 들었어? 처음 우리 팀 사무실 왔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당연히 팀원 누군가가 유건에게 말했을 거라고 단정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팀원들이 이상하게 볼 만한 상황은, 갑작스럽게 따로 대화를 요청할 때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이안이 내게 들러붙었다고 말하는 건 과장이 심했다.

“어? 그때 말고 팀원들이 오다가다 둘이 있는 거 몇 번 봤대.”

“언제?”

“너 방사 가이딩할 때도 그렇고….”

“그때 깨어 있던 가이드가 있었나?”

“그때 말고도 가끔 이안이 너 멀리서 쳐다본다던데?”

“뭐?”

이안은 나와 처음 대화를 나눈 뒤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유건의 말을 들어 보니 정말 멀리서 지켜보고 있긴 한 것 같았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자세하게 알지? 나보다도 더? 누구한테 이런 정보를 들은 거야?

“어제 이안인 줄 알고 도망간 거야? 그 사람이 너한테 해코지해?”

“그건 아닌데…. 일이 좀 복잡해.”

“진짜 무슨 일 있어?”

유건은 어느새 시리얼을 집어 먹던 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그를 더 이상 내 일에 연관되게 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젯밤 있었던 추격전이 내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내가 아무리 크리먼이라서 어느 정도 전투력을 갖췄다고 해도, 어제 같은 상황에는 쉽게 크리처화를 개방할 수 없었다.

센터 안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런 불편함이 있었다. 내 정체를 아는 에스퍼가 아군으로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 적임자는 어느 모로 보나 백유건이었다.

그리고 어제 유건이 제 피를 내어준 덕에 에밀리의 집에 가지는 않았지만, 한번은 에밀리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왜 내게 정보를 숨겼는지 물어야 했다.

여기서 문제는 항생제를 찾는 것에 혼선을 줬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 그녀조차 의심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범인이 이미 에밀리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세뇌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범인이 정신계 에스퍼인 탓에 생각해 두어야 할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나 혼자 밀폐된 공간에서 누군가 만나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유건이 같이 있어 준다면 분명 도움이 될 테고. 근데 유건을 내 일에 휘말리게 하는 게 정말 맞나…. 저 녀석도 내가 크리먼이라서 거리를 두고 있는 건데.

“말해. 가까운 동료로서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고민이 길어지는데 유건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동료?”

“그냥 ‘동료’ 말고 ‘가까운 동료’.”

동료. 같은 직장이나 같은 부문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뜻했다. 잠깐 생각해도 굉장히 멀고 딱딱해 보이는 관계였다.

“아니, ‘제일 가까운 동료.’.”

유건도 그 관계가 영 마뜩잖은지 앞에 ‘제일 가까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아무튼 ‘제일 가까운 동료’든 그냥 ‘동료’든 똑같은 동료 아닌가.

“뭐, 그래…. 너, 도움 필요할 때 말하라고 했지?”

“어. 뭔데?”

유건은 어서 말하라는 듯 다음 나올 말을 부추겼다. 아침인데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게 말이야.”

에밀리를 만나러 갈 때 유건과 같이 간다면,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에밀리의 말과 내가 알아낸 사실이 다르다는 것과, 사라진 연구원과 나를 습격한 범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다 알게 되겠지. 때문에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그에게 모두 공유했다.

“뭐? 너한테 핵이 없다고?”

그는 내가 알아낸 정보보다는 내게 핵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워했다. 그와 페어 관계일 때도 그를 경계해서, 내 얘기는 최대한 하지 않았었다.

그가 에밀리에게 물어봐서 들은 것과 혼자 지켜보며 느낀 것들로 크리먼의 이해도는 높아졌을지언정 나에 대한 정보는 잘 알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왜?”

“이안이 말한 음의 성질이 내가 가이드 등급이 높아서 강하게 작용한 거 아닐까. 핵이 같은 성질이니까 사라진 거고. 핵이 없는 것 때문에 범인이 나를 노리는 것 같아.”

그는 내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말을 듣고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다가 돌연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질문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뭐를.”

“핵이 없으면….”

“안 죽어.”

“영원히?”

“노화가 되면 죽겠지. 그 전엔 무슨 짓을 해도 재생돼.”

이번엔 그가 놀란 걸 숨길 타이밍도 없었다. 그의 턱이 떡 벌어졌다.

“그래서 그때 죽일 수 있으면 죽이라고….”

유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얼마 안 가 처음 그가 내 비밀을 알고 회의실에서 협박했을 때,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에밀리가 내게 일부러 정보를 숨겼다고. 그래서 내일 에밀리 만나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어?”

“당연하지.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에밀리가 왜 숨겼지? 잘못 안 거 아니야?”

“나도 영문을 모르니까 당사자한테 직접 확인하러 가는 거야.”

“이상하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건은 표정이 안 좋았지만 섣부르게 에밀리를 의심하거나 욕하진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세뇌라도 당한 건가? 에밀리가 너한테 나쁜 마음을 먹을 것 같진 않은데. 걔가 네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무슨 걱정?”

“그때 술 마실 때 그랬어. 크리먼으로서도 인간이 되고서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센터에서는 자기가 곁에 없으니까 나보고 잘 돌봐 주라고 말이야.”

“…그런 말을 했다고?”

“어.”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에밀리는 크리먼의 삶을 증오하는 내게 조금은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항생제를 찾아서 둘 다 인간이 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얼 하고 싶은지, 10년 후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와 같은 미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했다.

돌이켜 보면 엄청 필사적으로 그런 말들을 되뇐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막아서려는 것처럼.

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진실에 속이 답답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에밀리에게 당장 달려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한결을 만나야 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덧 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안 그놈은 뭐야? 왜 이렇게 너를 떠보듯이 대해?”

“그 녀석이 요새 제일 미스터리야.”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자세한 건 갔다 와서 알려 줄게.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알았어.”

나는 일단 대화를 끊어 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내가 화장하고 세팅을 할 동안 그는 식탁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같이 숙소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돌연 유건이 1층에 도착했는데도 내리지 않고 멈춰 있었다.

“뭐 해? 안 내려?”

“저기.”

유건이 짧은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밖을 보라는 듯 턱짓했다. 기숙사 앞에 한결의 차가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이럴 거였으면 누구를 만나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걸….

그리고 유건과 내가 같이 나오면 한결이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하물며 어제는 유건과 따로 가이딩을 하겠다고 보고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나 커피 마시고 싶어. 2층 카페 가서 시간 보내다가 나갈 테니까 먼저 나가.”

“그래.”

유건은 밝은 목소리로 마침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오늘… 돌아와?”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뭐를?”

“오늘 가서 오늘 오냐고.”

한결과 외박을 하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어. 저녁 먹고 바로 올 거야.”

“그래. 내일 몇 시에 갈 거야?”

“이 시간에 만나자.”

“응.”

유건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그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뒤돌아서 기숙사를 나가려는데 돌연 이상한 감상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쉽게 나를 보내 주는 게 적응이 안 됐다.

우기듯이 가까운 동료라고 하는 것도. 그런 관계라고 말했으면서 한결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하는 것도.

무엇보다 주말 아침부터 한 침대에 있다가 밥을 먹고 배웅을 해 주는 듯한 이 상황이 제일 이상했다.

마치 남자 친구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다시 돌아가는 기분인데. 아니, 남자 친구랑 있다가 바람을 피우러 가는 건가?

“아, 모르겠다.”

나는 뭉게뭉게 떠오르는 불쾌한 상념을 지워 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둘 다 아니다. 둘 다 아니어야 한다.

내가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백유건과 백한결, 그 둘을 돕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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