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달려온 결과 지금 이 상황에 다다랐다. 눈앞에 없을 때도 어른거리는데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맞닿아 있으니, 이건 부정하고 외면해도 심장을 토할 것처럼 빠르게 뛰며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야. 누구라도 이렇게 있으면 심장이 뛰진… 않지.’
그렇다기엔 요즘 유건은 스스로 무성욕자가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자극에도 무감한 상태였다. 그는 일단 사고를 최대한 멈췄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선 그간의 경험상 판단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일단 사월을 품에서 조금 떨어뜨려 놓았다. 매칭률이 높은 파장 때문에 이성이 흐려졌을 것이다. 몸이 멀어지자, 이번엔 그녀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내려봐서인지 나시 위로 미처 가려지지 못한 몸의 굴곡이 아찔할 정도로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 미치겠네.’
유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지독한 시련처럼 느껴졌다. 그의 인내력에 계속 시험에 들게 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정말 이러려고 온 게 아닌가? …정말? 정말 그게 맞아?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며 배신감과 자괴감이 잇따랐다. 자신이 이렇게 파렴치한 녀석이었던가.
이런 혼란스러운 유건의 마음은 모르고 사월은 어젯밤 유건을 배려한답시고 목을 무는 건지, 애무하는 건지 판단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를 간지럽혔다. 덕분에 샤워기의 물소리만 듣고도 심상치 않던 몸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월은 처음에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 가선 어색한 듯 엉덩이를 뒤로 무르기도 했다. 그게 또 의도치 않게 자극돼서 순간적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유건의 팔 사이에서 살짝 붉어진 채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사월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귀 부근에 은근하게 속닥거리자 배배 꼬는 움직임에, 정신 줄이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뿐 아니라 평소 다소 날카롭던 느껴지던 그녀의 목소리에 흠뻑 물기가 어려 있었다. 사월이 유건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야아…. 하지 마. 제발.”
촉촉한 눈동자로 유건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은 힘도 주지 못하고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건조해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한껏 달아올라 희미하게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선이고 뭐고, 시련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거리는 무슨. 모두 없던 일로 하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만할래. 힘들어….”
그때 사월이 잠깐 가이딩을 멈춘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건 역시 그날을 후회했으리라.
이렇게 가이딩 때문인지 이성적인 감정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은 마음으로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그건 사월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자신조차 버거운 감정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끝날 것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몇 시야?”
“깼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사월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슬쩍 바라보니 아직도 눈에 잠기운이 그득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쓸어 만지고 싶었다.
“8시 32분.”
“멀었네….”
“오늘 약속 있어?”
“응….”
뽀송뽀송한 볼도 입술도 촉감도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사월의 얼굴을 그러쥐며 점점 다가가던 그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어제부터 너무 과하게 다가가 부담을 준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표정을 살피자 그녀는 다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몇…. 프로야.”
“응?”
“파장…. 몇 프로냐고.”
“아. 38%”
그 와중에도 꼼꼼히 유건의 파장률을 체크하는 것이 사월다웠다. 그녀는 파장 수치를 듣자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왜. 뭐가 문제야.”
어제에 비해 훨씬 좋아진 수치를 듣고도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는 사월을 보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말을 해 봐.”
지금 이 순간은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사월이 끙 소리를 내며 유건의 품에 파고들었다. 말랑한 그녀의 상체가 유건의 단단한 가슴팍에 뭉개지듯 겹쳤다.
유건은 불시에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숨을 참았다. 안겨 오는 그녀를 마주 안지도 못하고 오류가 걸린 것처럼 어버버하는 사이, 그녀가 다시 말을 웅얼거렸다.
“2%…. 2%만 더하면 안… 기인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얼마 안 가 2%만 더하면 유건의 파장을 안정기로 끌어 올린다는 말이란 것을 깨달았다.
피곤한 목소리로 ‘2%만 더….’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유건이 씨익 미소 지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이 순간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일평생 다시 없을 순간일 수도 있으니까….
유건은 사월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사월이 그의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
나는 일어나자마자 방을 나와 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아직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바로 받았다.
- 여보세요? 일어났어?
“네. 바로 받네요? 혹시 저 기다렸어요?”
- 응. 어제 일로 피곤해서 푹 자는 것 같길래.
“전화해서 깨우지…. 저는 선배 자는 줄 알았어요.”
- 오늘이 어떤 날인데 내가 잠을 자.
한결은 일어난 지 꽤 된 것처럼 목소리에 잠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처럼 무게감 있지만 다정한 목소리였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막 1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럼 2시쯤 만나요.”
- 그래. 그러자.
만날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바로 끊었다. 2시면 씻고 준비해서 나가기엔 넉넉한 시간이었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파우더 룸을 나오자, 유건이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뭐 해?”
“어? 나 이제 나가려고.”
“밥 먹고 가.”
“괜찮은데.”
괜찮다더니 유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식탁 앞에 앉았다.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다가 냉장고를 열어 먹을 만한 게 있는지 뒤적였다. 물만 가득 차 있고, 제대로 먹을 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유통 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은 요거트와 우유. 시리얼이 찬장에 있었나.
“나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어서. 요거트랑 시리얼밖에 없는데. 어때?”
먼저 밥을 먹고 가라고 한 것치곤 퍽 간소한 메뉴 후보들이었다. 시간이 많으면 배달이라도 시킬 텐데.
“아무거나 줘.”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에 요거트, 팩으로 손질된 과일, 시리얼 봉지를 늘어놓았다. 유건은 그릇을 가져와 우유를 붓고 시리얼을 우유 높이까지 넣어 먹었다. 몇 술 뜨지도 않았는데 그릇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그다음에는 그 그릇에 요거트와 시리얼, 과일을 넣어 먹었다. 별것도 없는데 야무지게 잘 챙겨 먹는 것 같았다.
“너 이거로 배 안 차지.”
“아니, 맛있는데?”
맛없냐고 물은 게 아닌데. 유건은 보기에도 맛있게 잘 먹었다. 뭐랄까… 배고파서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어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캡슐에 들어가서 센터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 와서도 저녁도 먹지 않고 가이딩을 진행했으니 충분히 배가 고플 만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더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유건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혀가 녹을 정도로 달콤한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나는 잠결에 그의 가슴 위쪽에 잘근잘근 상처를 내어 피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마신건지 목구멍이 아직도 촉촉하고, 몸을 구성한 세포들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이 선명했다. 이렇게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맑은 건 손에 꼽았다.
당분간은 피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라면 유건에게 아직도 안 갔냐며 축객령을 내렸겠지만, 그에게 밥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언제 일어났어?”
“조금 전에.”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어.”
그는 평소답지 않게 단답으로 대답했다. 혹여 그가 내가 피를 빨아먹은 걸 알아챘을까 싶어 떠본 건데, 그의 의중을 제대로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자기 전에 갈증이 나면 팔 물어서 먹으라고 했으니 알아도 상관없나. 부위가 다르긴 했지만, 피를 마시는 걸 허용한 거니까….
“몇시에 나가야 돼?”
“어?”
“약속 있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언제 얘한테 한결과의 약속을 말한거지? 어제 내가 말했나?’
어제 너무 정신없이 피를 마시고 잠들어서 기억이 흐릿했다. 속으로 혼란스러워하는데 유건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누구 만나는데? 센터 밖으로 나가?”
누구냐고 묻는 걸 보면 한결을 만나러간다고 말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한결을 만나는 걸 유건에게 말해도 되나 고민했다.
그에게 주말 아침부터 한결을 만나러 간다고 말한다면 내가 한결을 정식으로 만난다고 오해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한결과 세 번의 데이트를 하게 됐고, 그 안에 남자로 안 느껴진다면 한결이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는 건 유건이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굉장히 설레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만약 오해하더라도 해명할 의무는 없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사람이야? 뭐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그냥 말해.”
솔직한 게 제일 좋겠다는 생각에 한결을 만나러 간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유건이 내 말을 가로채듯 말을 이었다.
“한결이 형이면 상관없는데, 너 요새 이상한 사람 들러붙었다며.”
“누구. 송이?”
“아니, 걔 말고.”
누구를 말하는 거지? 요새 나한테 티 나게 들러붙는 사람은 송이뿐이었는데.
“이영… 인가?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이안?”
“그래. 이안. 너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굳이 밖에서 왜 만나.”
“그럼 됐어.”
유건은 다시 요거트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가려는 건가 싶었는데, 요거트 한통을 다 먹고는 시리얼을 야금야금 집어먹었다.
나는 영 입맛이 없어서 깨작거리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왠지모르게 유건과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순간 어젯밤 그가 팔 안에 나를 가두며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다. 그가 최근에 나를 본체만체했던 것과 달리, 그 눈빛의 온도는 시선을 받아 내는 나조차 열감이 오를 정도로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분명 어제 가이딩을 하다가 생각보다 깊은 접촉을 했고, 우리 둘 다 어제 일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찝찝한 마음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백유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