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7/131)

“그만할래. 힘들어….”

“피 안 마셔?”

“조금만 이따가.”

내가 잠깐 숨을 고르려고 눈을 감았다가 뜰 때까지 그 시선은 내 얼굴에 못 박힌 듯 닿아 있었다.

그가 내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행히 뜨거움보다는 다정함이 묻어난 손길이었다. 긴장이 풀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그래. 그만하자.”

그가 입술을 깨물며 뭔가 참아내는 듯하더니 돌연 내 옆으로 탈진한 것처럼 털썩 드러누웠다. 침대가 그 무게에 출렁거리다가 다시 내 쪽으로 기울었다.

유건이 내 어깨 아래로 자기 팔을 집어넣더니 꽉 끌어안았다.

“다시 생각 있으면 팔뚝 물어서 마시고.”

“뭐야. 너 왜 눈을 감아.”

“잘래. 힘 뺐더니 졸려.”

“네가 무슨 힘을 썼다고.”

“너는 내가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몰라. 정신적으로 체력 고갈이야. 다음부터는 절대 안 해.”

“너 가이딩 해야지. 지금 자면 안 돼. 야.”

그는 이상한 결심을 하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처음엔 그런 척하는 줄 알고 어깨를 흔들었지만 정말 힘이 축 빠진 채 시체처럼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게이트 발생 이후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라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렇다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3초도 안 돼서 잠들다니.

그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지자 내 허리를 감싼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팔을 들어 한쪽으로 치웠더니, 집요하게 다시 엉겨 붙었다.

심지어 더욱 강하게 품에 안는 게 마치 개미지옥에 갇힌 느낌이었다. 유건이 무의식중에 힘을 준 상태라 낑낑대며 숨을 쉴 틈을 벌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의 팔목에 있는 스마트 워치의 파장량을 확인해 보니 34%. 그 잠깐 사이에 8%나 오른 수치였다.

가이드 20명이 달라붙어도 못했던 게 조금 전의 행위로 10% 가까이 올라갔다.

새삼 그와 나의 매칭률이 대단한가보다 싶다가도, 이렇게 쉽게 올릴 수 있는 걸 왜 유건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렸나 의아했다.

이미 가이딩을 진행한 만큼 조금만 더 하면 안정기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자 버리기나 하고…. 문득 나도 이대로 자 버릴까 싶었다.

이것저것 따지기엔 나도 무척 피곤한 하루였다. 따듯한 사람의 온기가 자연스레 나른함을 불러일으켰다.

유건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이마를 간지럽히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일정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와 자면서도 흘러나오는 몽글한 파장이 마치 구름이 나를 온순하게 감싼 느낌을 주었다.

파장마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녀석이었다. 혹자는 파장이 사람의 천성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을 믿는 건 어렵지만 파장은 믿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파장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몸이 나른하게 풀리지 않을까….

나는 점차 혼몽해지는 정신에 밀어내던 힘을 거두고 폭삭 안기다시피 몸을 기댔다. 포기하고 나니 유건의 품이 더욱 안정감 있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백유건. 내일… 내일 두고 보….”

나는 말도 끝마치지 못한 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은은한 향기가 유건의 아침잠을 깨웠다. 새벽녘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연상시키는 맑고도 투명한 향이었다.

오랫동안 쌓인 피로로 평소보다 눈꺼풀의 무게가 무거울 법도 한데, 왜인지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몸을 뒤척이자 옆자리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손가락에 감겼다. 그것을 힘주어 끌어안자 꿈틀거리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음…. 숨… 혀.”

어딘가 익숙하기도, 이 시간에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얘가 내 옆에 있을 리가 없는데. 혹시 또 꿈인 건가? 의문을 품으며 수마에서 헤어 나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너무 부드럽고 기분이 좋아서 포기하고, 유건이 기분 좋은 향에 그것을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숨 막힌… 다고.”

웅얼거리며 뭉개졌던 소리가 완전한 단어의 형태를 띠자 눈이 번쩍 뜨였다. 유건의 눈앞에 동그란 이마와 살짝 푸른빛을 띠는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더 고개를 내리자 사월의 풍성한 속눈썹이 올라갈 듯 말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깰 것 같은 움직임에 유건은 바짝 마른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월은 다행히 다시 유건의 품 안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직된 어깨를 늘어뜨렸다.

거기서 멈춰야 했으나 계속 그녀를 보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하고 사월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날카로운 콧날과 어우러진 쭉 뻗은 눈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화장기를 지운 맨얼굴은 평소보다 순해 보였다.

얼굴선과 가깝게 있어 잘 보이지 않던 턱 부근의 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아, 만지고 싶다.’

유건은 조금 전까지 사월이 깰까 봐 긴장한 게 무색하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앙증맞은 점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따사로운 아침에 자신의 품 안에서 사월이 고요하게 잠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엘리베이터에서 사월에게 거리를 두자고 말하며 나름대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녀에게 짐이 되지 말자는 거였다.

그녀에게 도움은 못될망정 피해는 주지 말자고.

그녀는 유건과 있을 때마다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가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핑계로 상대가 불편해하는데도 붙어 다니고, 사생활에 대해 과하게 간섭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경계심이 많은 성격인데 싫었을 것이다. 잘못을 인지하고 나자 이전의 행동이 너무 개망나니처럼 느껴졌다.

사월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말 이성적인 호감인지, 에스퍼로서의 집착인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자고 말한 거였다.

사월의 말대로 페어를 취소하고 붙어 다니지 않는다면 혹여 괜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녀와 이어진 인연의 실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더라도 친구로서, 혹은 가까운 동료로서 도움을 요청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의 거리에 있고 싶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 사월도 유건에게 점점 경계심을 풀고 신뢰를 쌓아가지 않을까.

유건 또한 사월과 너무 붙어 다니면 객관적인 판단이 안 돼서 딱 그 정도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녀를 찾지 않았다. 가끔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면 단조로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들뜬 말투나 표정이 튀어 나가면 단속하듯 잘라 냈다.

“어…. 그래. 사무실 갈 거지? 나는 훈련소 가 봐야 해서.”

사월은 그에 대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건 말건 관심이 없는 걸지도. 유건은 그 생각을 하면 다시 침울해졌다.

‘구사월이 관심 좀 안 가져 줬다고 침울이라니….’

정말 제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긴 한 것 같았다. 최대한 눈에 담지 않으려 결심했는데, 페어를 취소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월이 꿈에 나와서 유건의 무의식을 괴롭혔다.

사람이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그런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 거라고 애써 외면했다.

B급 게이트에 들어가서는 동료들과 합숙했는데 잠결에 그녀의 이름을 부를까 봐 날을 꼴딱 새우는 일이 빈번했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자서인지 뇌가 마비되고, 그녀에 대한 갈증이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월은 센터에서 방사 가이딩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전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떼를 쓰면서 안 된다고 말했을 테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꾹 참고 누르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끝끝내 정말 참지 못하면, 전투 중에 지수에게 센터에서 사고는 없는지, 방사 가이딩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같은 것만 메시지로 틈틈이 물어봤다.

“사월이는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너나 파장 관리 잘하셔.”

지수의 말처럼 사월은 유건이 없어도 제 할 일을 버젓이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럴 줄은 알았다만… 페어를 위해 며칠을 붙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재가 사월에게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암담해졌다.

‘됐어. 백유건 너도 그만해. 쟤는 너 신경도 안 쓰잖아.’

하루하루 자괴감과 절망에 기분이 바닥을 쳤다.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3주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사월에게는 그보다 더한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만큼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저를 싫어하는 걸까.

어딘지 울적한 마음으로 게이트를 마치고 캡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지수가 캡슐로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백유건. 살아 있냐?”

장난스러운 말투는 그가 무사히 폭주를 안 하고 센터로 복귀한 걸 알아서 한 말이었다.

“너보다는 오래 살걸.”

“꿈도 야무지네. 이 상태로는 내일도 힘들지 않을까?”

스마트 워치를 확인해 보니 파장률은 26%. 이십여 명의 가이드가 달라붙었는데도, 고작 1%가 상승했다. 지수의 말이 마냥 장난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자, 지수가 힘내라는 듯 말을 보탰다.

“그래도 너 걱정하는 사람 많은데 힘내야지. 사월이도 일어나자마자 너 어디 있냐고 묻더라.”

“구사월이? 왜?”

“몰라. 할 말 있었나? 나한테 전해 달라니까 됐다고 하던데? 별 얘기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게 퍼져있던 유건의 뇌가 뱅글뱅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구사월이 오늘 왜 나를 찾았을까. 내가 파장이 낮아서 걱정돼서? 폭주했을까 봐? 걔가 그렇게 내게 관심이 있지 않을 텐데.’

수만 가지 가정이 떠오르던 중,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스산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맞다. 구사월 흡혈하러 가야 하는 날 지난 것 같은데.’

“잠깐만요. 저 가이딩 다 됐어요. 여러분 퇴근하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야, 뭐해?”

돌연 유건이 베드에서 벌떡 일어났다. 팔에 꽂혀 있는 안정제 바늘을 대충 뽑아냈다. 어차피 잠깐이지만 파장률이 전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터였다. 캡슐 안 가이드들에게 이야기한 후 옷을 다급하게 끼워 넣었다.

“야! 백유건! 너 폭주한다고!”

눈 깜빡하는 사이에 캡슐을 나온 유건의 뒤로 저 멀리 지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주위에 각성자들이 도망치듯 달리고 있는 유건을 바라봤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

‘흡혈은 중요하니까 잠깐 정도는 보러 가도 괜찮겠지?’

유건은 내내 끙끙 앓고 있던 실타래가 풀린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단호한 결심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사월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울적했던 마음이 단숨에 날아갔다.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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