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그가 어떤 의미로 말했건, 그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나에게 미묘한 감정을 드러낸 그 날부터 일방적인 선의가 무척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깐이지만 유건이 나를 본체만체해서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나 의구심도 들었었는데, 유건은 오늘 나를 찾아왔다.
스스로 먹이가 되기 위해서.
이제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찾아왔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는 지금 당장 그가 필요하고, 나도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고. 그럼 일방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 된 거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솔직히 유건이 확실하게 고백을 해 온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신경 쓸 만큼, 지금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유건 자신도 거리를 지키겠다고 말했으니 성급하게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흡혈하지 않았던 것을 의식하자,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것조차 건조하게 느껴졌다. 얼른 어떤 피든 흘려 넘겨서 내 장기를 촉촉하게 젖게 만들고 싶었다.
내 피에 살아 있는 생물의 피가 섞이고, 그 피는 괴물 같은 능력으로 발휘될 것이다. 그래야 범인도 잡고, 나도 살 것 아닌가.
샤워하는 동안 심란했던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챙겨온 나시와 짧은 반바지를 입었다. 파우더 룸에서 머리를 가볍게 말리고 유건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뭐해?”
문을 열자 유건은 딱딱한 맨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전신을 눈동자에 가득 담았다.
“나 가이딩 해 달라고 온 거 아니야.”
그리곤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용케도 눈치챈 것 같았다. 사실 내 복장은 누가 봐도 흡혈만 할 복장이 아니기도 했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를 무시하고 환하게 켜진 불 대신 침대 옆에 무드 등 스위치를 켰다. 벽면에 배치된 조절기로 방 안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파장 흡수를 돕는 기체 분사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천장에서 눅진한 향기와 함께 기체가 내려앉았다. 센터 기숙사여서 캡슐보단 못하지만 최소한의 장치는 갖춰져 있었다. 내 일련의 행동을 보고 유건은 더욱 미간에 골이 파였다.
“누구 나쁜 사람 만들려고.”
“내가 스스로 온 거잖아. 나 먹어도 상관없다니까?”
“가이딩 해 주는 게 마음이 편해. 나를 얼마나 뻔뻔하게 보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고백… 비슷한 걸 했던 애를 나 좋을 대로 이용할 만큼 철면피는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건 고백이….”
“잔소리 말고 빨리 올라와.”
구구절절한 대화를 끊어 내고 지시하자 유건은 움직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만 꾹 다물었다. 뜻대로 안 되니 기분은 상한 것 같았다.
“네가 가이딩 때문에 온 거 아니란 거 믿어 줄 테니까 올라오라고.”
“믿어 주는 게 아니고 진짜 아니야.”
“그래, 알았어.”
“진짜 아니라고.”
“알았어. 그만하고 빨리 와. 나 갈증 나서 돌 것 같아.”
내가 인내심이 바닥난 것처럼 짜증을 내자, 유건이 그제야 쭈뼛거리며 침대로 올라왔다. 한 다리는 무릎을 꿇어 침대에 올리고 다른 한 다리는 바닥에 닿은 채였다. 올라와서도 굉장히 어정쩡한 자세였다.
“그때 목은 아프니까 팔뚝 마시라고 했지? 어느 쪽이 좋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연기가 아니라 슬슬 참기 힘들어졌다.
유건이 내 방에 몇 분이나 있었다고, 공기 중에 단내가 풀풀 풍겼다. 나는 유혹적인 향기에 입술을 달싹거리며 바로 물어뜯고 싶은 걸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유건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귓볼이 조금 붉어진 채 중얼거렸다.
“…그냥 목으로 해.”
“어? 뭐라고?”
“그냥 목 마시라고. 그렇게… 싫은 게 아닌 것 같기도 해.”
싫은 게 아닌 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목을 물리는 게 싫은 게 아니라는 건가?
다소 애매하게 해석되는 말에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밀려오는 갈증에 얼마 안 가 상념은 집어치우고, 그의 손목을 끌어와 침대 헤드 쪽에 반쯤 눕혔다.
그는 내 행동에 순순히 움직이다가 내가 허벅지에 올라타려고 하자, 내 허리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야.”
“뭐.”
“하, 아니다.”
어쩌라는 듯 응시하는 눈빛에 그가 이제 포기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나와 페어를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학습력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한번 결정하면 과정이 어떻건 어떻게든 실행했다. 나는 오늘 가이딩을 진행할 거고, 그의 피를 마실 거다.
뭐든 확실한 게 좋았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넌 겁이 없는 것 같아. 난 불안해 죽겠는데.”
유건이 돌연 긴장된다는 듯 말했다.
“뭐가 불안해. 내가 또 너 정신 혼미해질 때까지 마실까 봐? 그렇게 안 해. 살살 물고 조금씩 길게 마실 거야.”
“아니…. 그거 말고.”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표정에서 근심과 걱정, 혼란스러움이 뒤섞였다.
“나 파장 낮아서 눈깔 돌면 어떡하려고.”
“걱정 마. 내가 평범한 가이드는 아니잖아.”
“그래…. 빨리 시작해.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유건이 우려하는 부분을 알았다. 폭주 중이거나 파장이 낮은 에스퍼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 가이딩을 하면 이성을 잃기도 했다.
유건은 나와 페어일 때도 초반에 파장이 낮긴 했지만 30% 아래까지 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는 지금 무려 26%였다.
파장이 낮은 에스퍼는 순간 정신력이 흐려지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캡슐에는 가이드의 손이 닿는 곳에 강제 개방 버튼이 여러 개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내 개인 공간이기에, 유건이 나에게 달려든다면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내 힘으로 진정시키든 빠져나가든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유건은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이성을 잃고 나를 덮칠까 봐.
내가 크리먼이니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 힘만 믿어서 몰아붙이는 건 아니었다.
급소를 차 버린다던가, 가이딩을 순간적으로 세게 넣어서 쇼크를 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지금은 유건과 적응도도 떨어졌을 테니까 쇼크를 주는 것도 가능했다.
당연히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야겠지만 이 밖에도 에스퍼를 기절시키는 건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나는 구태여 그 방법들을 유건에게 전달하진 않았다. 그가 전전긍긍하는 게 조금 귀엽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네 몸이나 생각해. 잠은 좀 자냐.”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가 잔뜩 충혈돼 있었다. 실핏줄이 얼기설기 돋아 있었고, 혈색이 창백한 게 척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나는 그의 이마를 짚었다가 그대로 내려 목 안쪽의 체온을 쟀다. 조금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유건이 얼굴을 움직여 내 손바닥에 어리광을 부리듯 눈을 감고 기댔다.
“몰라. 나 가이딩 하다가 잘 수도 있어.”
“그렇게 안 될걸.”
나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매달고 그의 반대편 목에 얼굴을 묻었다. 내 입술이 그의 살갗에 닿자마자, 유건의 목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엄청 싫은가 보네.’
당장 이를 박고 싶었지만, 그가 겁을 먹은 것 같아서 살짝 혀를 내어 핥았다. 그 작은 접촉에 혈류의 흐름이 빨라졌다. 유건의 턱에 긴장으로 바짝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가이딩 하면서 하니까 그렇게 안 아플 거야.”
“응….”
“너도 내 몸 만져. 그래야 빠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유건은 평소엔 설렁설렁 잘 넘어가면서 이상한 데에서 고집이 센 것 같았다.
하긴, 웬만하면 2단계 이상으로도 절대 안 한다고 했지. 가이딩을 위한 스킨십이 거북한 건가.
나는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에스퍼는 성감이 고조되면 가이딩 효율이 더욱 높아진다. 고집스러운 에스퍼를 함락시키는 것 또한 가이드의 역할이었다. 유건이 나를 보면 떨린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그 부분은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목을 살살 물고 빨다가 크리처화를 개방해 이를 천천히 집어넣었다.
“읏.”
유건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샜다. 허리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어깨에 닿아 있는 손을 가슴 쪽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대로 아래로 쓸어내리며 배꼽 부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움직임에 유건의 뱃가죽이 홀쭉하게 패였다. 그가 숨을 잔뜩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간지러워…. 아.”
나는 그의 근육이 이완되는 타이밍에 피를 씁, 하고 빨아들였다. 이전에 유건의 피를 마셨을 때 비하면 정말 개미 눈물만큼이나 조금 마신 거였다.
그는 불시에 흡혈 당해서 앓는 소리를 낸 것뿐인지, 근육이 다시 긴장하지는 않았다. 상큼함을 담고 있는 단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언제 마셔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혀를 써서 살을 핥으며 피를 조금씩 빨아들였다.
유건의 손가락이 내 허리에서 꼼질거렸다. 답답함에 그 손을 잡고 나시 안으로 집어넣게 하자, 그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떨었다.
“야…. 이래도 돼?”
“이 정도는 다른 각성자들도 다 해.”
“그래도….”
물론 내가 가이딩을 진행한 에스퍼들은 몸을 만지며 자극해야 할 만큼 파장이 떨어진 적이 없기는 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유건이 여전히 주저하는 듯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선만 넘지 마. 허튼수작 부리면 뼈도 씹어 버릴 거야.”
“와…. 살벌하네.”
장난으로 한 말인데 유건은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저번에 실제로 목뼈를 으득, 소리 나게 깨물어 버렸으니.
그때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흑역사였다. 진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크리먼 같잖아. 너무 야만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겨우 허리 부근만 만졌다. 아니, 쥐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가 한 번씩 자제하지 못하고 피를 조금 세게 빨 때면 조금 세게 쥐는 정도.
생각보다 유건의 자제력 허들이 높았다. 이 녀석 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때 유건의 숙소에서 키스할 땐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문제지?’
생각해 보니 그때도 처음엔 뻣뻣한 태도였다. 나중에는 뭐 때문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달려들어서 놀랐었지.
내가 유건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가이딩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늘 무조건 유건을 안정기까지 끌어 올릴 생각이었다.
유건이 느끼는 부분이 과연 어디일까.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걸 보면 분명 반응은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입을 떼고 유건을 빤히 바라봤다.
“왜?”
“손 들어 봐.”
“뭐?”
의문이 서린 얼굴을 무시하고, 그의 티셔츠 아랫단을 잡고 올렸다. 유건이 놀라서 이게 뭐 하는 거냐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대로 훈련용 티셔츠를 완전히 벗겨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