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 선배는 근데 절대 아닐 것 같은데….’
그는 일단 내가 크리먼이 되기 전부터 너무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였다. 그런 만큼 다른 사람보다 나에 대해서 많이 알 테지만, 본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노린다고? 몇 번 떠보면 바로 들킬 것 같은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항생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무언가 연구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범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구사월 가이드를 덮쳤을 겁니다.”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이안이 꽤 소름 돋는 얘길 했다. 여전히 언뜻 정중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여기 있는 에스퍼들 파장으로 깨울 수 있는데요? 이안 에스퍼 다 상대할 수 있으세요? C급이잖아요.”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시네. 그저 농담이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등급을 운운하며 그를 자극했다. 이안은 그저 농담이었다며 흘려 넘겼다.
‘진짜 재미없는 농담 하네.’
저 재밌어하는 표정을 보면 그저 내 반응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대하기 피곤한 사람이었다.
“이안 씨 화법인지 모르겠는데,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정말 다른 의도가 없다면 의심 살 겁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기분 나쁜 사람이야….”
“혼잣말하듯이 앞 담화하시네요.”
“사회생활 오래 안 하셨나 봐요. 이런 건 모른 척하는 겁니다.”
“다 들리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합니까?”
그 후로 이안과 계속해서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았다.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내 기분이 나빠지기만 하는 듯한 대화들.
이안의 첫인상은 의심스럽긴 했지만, 굉장히 신사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다.
낯짝이 굉장히 두껍고, 사람을 연구 소재로 보듯 이리저리 간 보는 걸 좋아하는 얼굴만 잘생긴 또라이였다.
다행히 공통 관심사가 없는 탓에 대화 소재는 금방 고갈됐다. 그러자 이제는 자신이 왜 늦었는지, 게이트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줬다.
“게이트 중앙에 신전이 있다더군요. 대개 신전이 있는 경우에는 제물을 바쳐야 보스가 소환됩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석판에 암호가 쓰여 있습니다.”
“…….”
“C2380. 이게 히탄어로 곤충 형 C급 크리처를 칭합니다. 그런데 파이탄어로는 크리처의 이빨을 뜻하죠. 고대 언어와 석판의 그림을 유추하여 가장 비슷한 통계를….”
나는 중간중간 전문 용어가 섞여 있어서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내가 멀뚱하게 있어도 개의치 않고 혼자 떠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제물의 종류를 모두 읊고 나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암호를 에코 팀이 풀었으니까, 내일 저녁쯤엔 게이트가 마무리될 겁니다.”
“정말 일하고 계셨던 거군요.”
“네. 이래 봬도 C지부에서 꽤 인정받던 지능계 에스퍼입니다.”
“아무렴요. A지부에서도 꾸준히 그 능력 입증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하실 일이 많으실 테니 이만 나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 할 거 다 끝내고 왔는데요? 제가 구사월 가이드 졸릴까 봐 이야기 상대해 주는 거 몰랐습니까?”
“전혀요. 도움 정말 안 됩니다. 정신만 흐려져요. 가이딩에 방해됩니다. 나가 주세요.”
“구사월 가이드가 그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닌 것 압니다. 온 김에 같이 해 뜨는 건 보고 가겠습니다. 다른 가이드분들은 언제 오시죠?”
대체 나랑 해 뜨는 걸 왜 보는데. 불편하니까 제발 꺼져. 분노 참기는 아마추어거든?
속으로 수만 가지의 욕이 난무했다. 내가 표정으로 아무리 욕을 해도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 바로 연락하세요. 버렸을 것 같으니까 제 명함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는 빳빳한 명함을 내 손에 쥐여 주고는 결국 정말 해가 뜨는 걸 보고 대기실을 나갔다.
‘버린 건 어떻게 안 거지.’
나가기 전에 경호 에스퍼를 깨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기실 창문 너머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모습이 재수가 없었다. 자꾸 지난번 꿨던 꿈이 겹쳐 보였다.
‘손마디가 가느네. 꿈에서도 꼭 저런 손 모양으로 쓸어내리는 느낌이었는데.’
그는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 했지만, 정신계라면 혹여 지능계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억지스러운 가정까지 떠올랐다.
이내 이안이 완전히 뒤돌아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 찝찝한 기분을 지워 내고 싶었다. 만약 범인이라면 핵이 있을 것이다. 그 또한 크리먼일테니까.
이마 위로 손바닥을 가로로 짚고 눈 위로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다. 눈매를 최대한 좁히며 크리처화를 개방했다. 이안의 뼈의 굴곡, 생동감 있는 근육과 장기, 피의 흐름 따위가 적나라하게 투시됐다.
“…없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석류알처럼 새빨간 핵은 보이지 않았다.
“예? 구사월 가이드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뒤에서 잠에서 방금 깬 경비 에스퍼들이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나는 크리처화를 풀고 그들에게 다시 잠이나 자라고 말했다.
이안에게는 핵이 없었다.
***
잠을 자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숙직실 문을 열자 가이드와 에스퍼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월아. 일어났어?”
복도를 지나가던 지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 게이트 파훼했대?”
“응. 여섯 시간 남기고. 완전 큰일 날 뻔했지.”
창문 너머에는 어두운 밤하늘에 손톱 모양 초승달이 떠올라 있었다. 이안이 예상했던 대로 게이트는 저녁에 마무리한 것 같았다.
“다행이네. 근데 에스퍼들은 이게 다야?”
나는 많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방금 게이트 마쳐서 소독실 간 사람도 있고, 캡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왜? 누구 찾아? 가이딩은 우리가 진행할 테니까 너는 이만 퇴근해.”
“아니…. 백유건은?”
어색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묻자, 지수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그러곤 내가 잘못 본 것이라는 듯 표정을 싹 바꾸며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오자마자 가이드 우르르 끌고선 캡슐 들어갔지. 파장이 21%라고 했나, 22%라고 했나….”
“21%?”
나는 인상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20% 아래로 떨어지면 1차 폭주였다. S급 에스퍼가 폭주해서 폭발하면 센터는 물론 이 일대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유건을 찾으러 가려는데, 지수가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다. 25% 위래. 내가 잘못 말했네.”
그 한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25%도 아주 안심할 순 없는 수치였다.
“왜? 불러줄까?”
“아니. 가이드 몇 명 들어갔대?”
“20명 정도. 나도 지금 들어갈 거야. 할 말 있으면 나한테 말해. 전해 줄게.”
딱히 전하고 싶은 말은 없었다. 그저 그가 폭주했을까 봐 게이트 내내 불안했을 뿐이었다. 내 눈으로 상태를 직접 확인하면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유건 캡슐 번호 뭐야?”
“왜?”
“나도 들어갈까 해서….”
“미안한데, 유건이가 들어가기 전에 너는 빼 달라고 했어.”
“…….”
예상했지만 유건은 이 지경까지 와서도 내 가이딩을 거부했다. 차라리 폭주했다면, 강제로라도 진단원에서 나와 매칭을 시켜줬을 텐데.
“걱정 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 들어가서 쉬어.”
“어…. 그래.”
지수는 대화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 각성자들은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맡은 시간에 할 일을 다 하기도 했고, 불안하긴 했지만 게이트도 파훼에 성공했으니 마음 편하게 퇴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알파 팀 메신저를 뒤적이다가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AGS 구사월 : 캡틴 어디에요?」
「AES 백한결 : 센터. 아직 퇴근 안 했어?」
답장은 바로 도착했다. 나는 전화를 할까 하다가 방금 게이트가 마무리된 만큼 바쁠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AGS 구사월 : 네. 파장 수치 몇이에요? 제가 가이딩 해 드릴까요?」
「AES 백한결 : 아니야. 나 이미 매칭되서 캡슐 왔어.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어.」
한결마저 내 가이딩을 거부했다. 거부라기보단 오랜 시간 나 혼자 가이딩을 맡았으니, 배려라고 보는 게 맞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낮게 가라앉았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인데.’
그렇다고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 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어디를 가도 짙은 피 냄새 때문에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방금 일어났지만 며칠간 피로가 쌓인 건 사실이라 몸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서 센터를 나왔다. 기숙사로 가는 길목의 공원은 며칠간 이어져 온 현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가로등에서 은은하게 빛이 퍼지고, 바람 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인적이 드문 공터를 지나는데, 중앙의 분수대가 물이 졸졸 흘러내리다가 뚝 하고 멈췄다.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밤 11시 58분. 아무래도 자정까지만 분수대를 틀어 놓는 것 같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서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내일은 주말이고 이대로 며칠 쉬고 돌아오면 컨디션은 회복될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토요일에 한결이랑 바다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나는 잠시 한결에게 내일 점심을 먹고 정확히 몇 시에 갈지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괜히 피곤한데 한결이 무리를 할 것 같아서였다. 그 역시 3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피로가 많이 쌓였을 터였다.
내가 먼저 약속을 취소하진 않을 테지만, 한결이 잊고 넘어가거나 다음에 만나자고 하면 흔쾌히 수락할 생각이었다.
바스락.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막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수풀도 잠잠하고 휘잉, 하고 차가운 바람만 허공을 맴돌았다.
‘길고양이인가. 아니면 청설모 뭐 그런 거….’
나도 긴장이 풀리자 눈이 다시 슬슬 잠겼다. 집에 가면 어떻게 자나 싶었는데, 씻고 누우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듯한 물에 반신욕을 하고 누우면 딱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스슥, 하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야.”
재빨리 뒤돌아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공터만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