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2/131)

“제발 그만….”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내 살갗에 대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에게 내 몸부림이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내 발작을 그만두고 축 늘어지자, 내 목을 물어뜯던 대상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죽은 척하는 거야?”

그는 멈추지 않고 나를 취했다. 바닥인 줄로만 알았던 땅이 사라졌다.

“재밌네.”

나는 점점 더 아래로, 더욱 깊숙이, 끝도 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

그날 내 악몽을 깨운 것은 게이트 발령 경보였다. 새벽반 각성자들이 센터를 지키고 있기에, 하급 게이트는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건 상위 등급 발령 경보였다. 이번 게이트는 B등급으로 센터 에스퍼는 전원 발생 지역인 C 12구로 출동했다.

게이트 제한 시간은 생성 날짜로부터 3일. 그 안에 게이트를 파훼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은 게이트가 출연한 지 이틀째였다. 어느덧 하늘이 어둑해져 시간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게이트 파훼 예상 시간이 분명 오전이라고 했었는데.’

“하. 뒤지겠다. 더 이상 못 뽑아내. 그냥 폭주를 하든지 말든지, 크리처한테 먹히든지 말든지.”

지수가 캡슐을 나오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녀는 오후까지 현장 가이딩을 겸하다가 센터로 복귀했다. 만약 내일 새벽까지 공략하지 못한다면 크리처 웨이브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부 가이드들 파장 떨어진 지 오래래. 중간 보스 때부터 작살났다던데.”

“한심한 놈들.”

“그렇다고 왜 우리 팀한테 일이 몰리냐고요.”

“벌써 우리 팀이야?”

송이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팀원들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A 지부 알파 팀이 상위 등급 가이드가 많으니, 이쪽으로 부상자들이 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도 여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좀 마무리돼가는 것 같은데요? 어…? 아니네. 또 저기 우르르 들어오네요. 어떡하죠? 파장 남으신 분?”

알파 팀 가이드 희운이 한숨 돌리다가 가이딩 대기실 창 너머로, 응급 팀으로 분류되는 오스카 팀원들이 베드를 끌고 오는 걸 보고 말했다.

“개망했다.”

“어디서든 좋으니 파장 좀 박박 긁어와 봐….”

“이러다 우리 팀 에스퍼 가이딩할 파장도 안 남을 것 같은데요?”

알파 팀 가이드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결과 유건은 한 번도 센터로 돌아오지 않았다.

현장 가이딩을 받았을 테지만 걱정이 됐다. 특히 유건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도 파장량이 적었을 텐데….

나는 습관적으로 스마트 워치로 폭주한 에스퍼는 없는지 명단을 계속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내가 할게. 다들 들어가서 쉬어.”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이딩 할 시간이 부족한 것뿐이지, 파장량은 아직 반도 사용하지 않았다.

폭주를 대비해서 유건을 가이딩 할 파장만 남겨 두고 모두 소진할 생각이었다.

“너도 내부로 오는 에스퍼들 도맡았잖아. 괜찮아?”

“등급 값은 해야지. 그러라고 돈 주는 건데.”

S급 가이드는 센터에서 대우가 달랐다. 가이드 평균 연봉의 몇십 배는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런 위급 상황에도 나는 현장 가이딩에는 절대 참여를 하지 않았다. 현장에 가장 도움이 될 텐데도, 접근 권한조차 없었다.

혹시 모를 크리처의 위험에서 S급 가이드를 완벽히 배제하려는 센터의 의도였다. 현장에 나가지 않는 만큼 내부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S급 가이드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한두 명이 아닌데….”

“맞아요. 언니도 힘들잖아요. 저기요. 다른 팀 가이드도 매칭된 거 맞아요?”

“네, 그럼요….”

내가 쉬지 않고 가이딩을 한 것을 알기에 팀원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송이가 나서서 오스카 팀원에게 따지듯 묻자,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다른 팀 가이드분들은 기절하신 분들도 많아서…. 인원이 알파 팀으로 몰린 편이긴 합니다.”

가이드들이 파장이 한계까지 내려가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걸 어쩌지….’

눈으로 대충 가늠해 보기에도 중상을 입은 에스퍼가 열댓 명. 파장이 모자라서 온 에스퍼들이 대여섯 명이었다.

알파 팀 가이드들도 너무 지쳤고, 다른 팀 또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았다.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짧은 고민 끝에 한결에게 방사 가이딩 결재 요청을 보내자 승인은 3초 안에 내려졌다. 전투 중이라 바쁠 텐데도 칼 같은 속도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AES 백한결 : 믿고 맡기는 거야. 방사 가이딩 안전 수칙 제대로 지키고. 다치면 혼날 줄 알아.」

한결이 염려하는 바가 뚜렷하게 다가왔다. 나는 곧바로 오스카 팀원에게 지시했다.

“방사 가이딩 실행할 겁니다. 부상자들만 남겨 두고 다 나가세요.”

“네? 전부 다요?”

“뭐?”

파장 관리사와 이 자리에 있는 각성자 모두 놀란 눈을 했다.

“파장 부족한 분들도 베드에 눕혀서 구속구 꼼꼼히 채워 주시고, 육체계 경비 에스퍼 세 명만 방파복 입고 들어와 주세요. 앞으로 나오는 게이트 부상자 열두 시간 동안 전부 알파 팀에서 수용합니다. 현장에도 전달해 주세요.”

“언니, 괜찮아요? 게이트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송이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스마트 워치로 파악되는 게이트 진행도는 95%. 거의 완료 단계였다.

그러나 몇 시간째 퍼센트가 올라가지 않았고, 더 이상 이렇게 대책 없이 파장을 소비해선 안 될 것 같단 판단이 들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알파 팀도 파장이 곧 바닥날 것이다.

“캡틴한테 승인받았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오전까지 책임질게요. 다른 분들 그 시간 동안 파장 충전해서 오후에 가이딩 진행해 주세요.”

내가 열두 시간만 버티면 팀원들이 파장을 충분히 채워 올 수 있었다. 꽤 합리적인 방법인데도 알파 팀 가이드들은 우물쭈물했다. 아무래도 나만 남겨 두고 가기 걸리는 모양이었다.

‘마음까지 편하게 해 줘야 하는 건가?’

나는 그들이 새삼 귀찮게 느껴졌다. 나도 피곤하고 예민해져서 날 선 말이 튀어나올 찰나였다.

지수가 짝,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팀원들의 주의를 끌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들어가서 눈 좀 붙이자. 지금 상황에서 파장 회복하는 게 사월이 돕는 거야. 자, 빨리 숙직실로 움직여. 얼른.”

“네….”

“알겠습니다.”

그들은 그제야 하나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새벽 4시가 지나고 있었다. 에스퍼들은 베드에 누워 손목과 발목, 상체가 구속구로 단단히 고정된 채 안정제를 맞고 잠들었다.

그들이 깊게 숙면할 수 있도록 전등도 반쯤 꺼진 상태였다.

조명도 어둡고 나 빼고 모두 침대에 누워 잠들어서인지, 몰래 영안실에 숨어 들어온 듯한 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 정도로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였다.

“안 피곤하십니까?”

조용히 눈을 감고 가이딩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홱 돌아보니 이안이 서 있었다.

“여기 출입 금지 구역인데요.”

그는 일체형으로 된 방파복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방파복은 파장을 막아 주는 기능을 해서 방사 가이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막아서는 에스퍼 없던데요?”

경비 에스퍼들도 계속 이어지는 긴장감 속에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들을 배치한 건 돌발 행동을 하는 에스퍼의 위험 가능성 때문에 가이드를 지킬 에스퍼 3명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는 방사 가이딩 안전 수칙 때문이다.

‘저런 주제에 누굴 지키겠다고.’

나는 그들을 잠시 한심하단 눈길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이렇게 많은 에스퍼들 중 범인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걱정하는 사람치곤 굉장히 늦으셨네요.”

“저도 제 할 일이 바쁜 사람이라서요.”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이안은 그렇게 곁에서 지켜보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정말 바빴는지 이틀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게이트가 발생 전,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꿨다. 그 꿈에서 확실하진 않지만 이안과 비슷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음 편하게 가져요. 괜찮아요. 눈 깜빡하는 사이에 모두 끝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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