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0/131)

미세하지만 목소리엔 각성자 특유의 크리먼에 대한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자면 이안은 내게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 주기 위해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거란 말이었다.

‘괜한 의심을 한 건가.’

그의 말대로라면 아무 연고도 없는 내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다. 마땅히 감사함을 표하는 게 맞지만, 나는 그러한 친절조차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는데 제 연구 결과를 상부에 보고해도 진전이 더딘 상태더군요. 누군가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행이 안 된 거로 압니다. 혹시 그 부분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보아하니 이안은 조사 요청에 대한 결과만 보고했을 뿐이지, 임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나 또한 가이드 습격 사건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해 줄 말이 없었다.

그것보다 그가 조사 중에 내가 거슬릴만한 정보를 알아냈단 사실이 중요했다. 크리먼의 핵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은 내게 치명적이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진 것 같진 않지만 이 의견을 센터에서 받아들인다면, 이제 크리먼으로 의심되는 자들에게 2차 검사까지 시행할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임무 진행이 더딘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유를 모르기에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크리먼의 핵과 가이드의 상관관계가 대체…. 정확히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꾸며 내며 물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행 상황 대신, 범인이 나를 노리는 목적에 대해 깊게 파고들었다. 이건 에밀리에게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점이었다.

그가 생각보다 이 사건에 관심이 많고, 상부에서 크리먼에 대한 실험을 맡길 만큼 능력 있는 지능계 에스퍼라면 알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어쩌면 핵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기회였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이안은 약간 자존심이 상했는지, 웃고 있지만 날카로운 어조로 물어왔다.

“그건 아닙니다. 저도 관련된 일이어서 좀 더 파악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눈매를 예리하게 좁히더니, 이내 자기 말을 증명하듯 술술 읊었다.

“에스퍼가 반쪽짜리 각성이라면 크리처는 완전체입니다. 에스퍼는 스스로 파장을 충전할 수 없지만, 크리처는 핵이 파장을 충전하죠.”

그는 최대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했다. 나는 내 영역이 아닌 만큼, 그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들었다.

“그러니까 크리처에게는 가이드 역할을 몸속의 핵이 담당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같은 음의 성질인 가이드를 섭취하면 중첩되어 핵이 작아지는 원리입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의 역할을 크리처는 핵이 담당한다고. 그래서 같은 음의 성질이 중첩되어 작아지는 거라면…. 내가 핵이 없는 이유 또한 충분히 설명됐다.

나를 문 크리처는 가장 높아 봐야 A급, 그리고 나는 S급 가이드이다. 필요한 파장에 비해 그 그릇이 넘치니 아예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다 한가지 번뜩이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럼 반대로 핵이 커질 방법도 있는 건가?’

“혹시 크리먼의 핵과 가이드의 관계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듯 눈을 내리깔았다.

“글쎄요, 나머지는 검증이 필요한 일들이라…. 지금 말씀드리기엔 적절치 않은 것 같군요.”

이어지는 이안의 대답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이드와 에스퍼는 서로 반대의 속성을 가진 존재였다.

크리먼이 가이드의 피로 핵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반대는…. 자연히 유건이 떠올랐다. 에스퍼의 양의 성질은 그 반대의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요즘 S급 에스퍼의 피를 많이 마셨다.

그럼 나에게도 핵이 생길 확률이 있을지도….

“구사월 가이드는 크리먼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군요.”

홀로 희망적인 추측에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데 이안이 자못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내가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뗐다.

“고 구선열 에스퍼님의 자제분이시지요?”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나는 무척 놀랐다. 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튀어나온 탓이다.

“에코 팀에서 일하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알 겁니다. 항생제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사고가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고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센터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에 깊게 연관된 사람이거나 내 가까운 지인들은 내가 연구실 캐비닛에 숨어서 살아남았고, 크리먼에게 물리지 않았다는 검증을 끝마친 걸로 알고 있었다.

이안이 그 사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찔릴만한 구석은 없었다.

표면적으로 나는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불행이 이어져 알 수 없는 크리먼에게 쫓기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선량한 의도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범인이 크리먼에 대한 이해가 높아 보여서 한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질 뿐입니다.”

“…….”

“구사월 가이드가 잡혀 버리면, 이제 범인이 모습을 감추지 않겠습니까? 현재 가장 높은 등급의 가이드이기에 이제 목표물이 없어질 테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사실 이안 에스퍼가 의심스러웠던 참이었는데, 다행히 납득이 가네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저히 좋게 봐 준다고 볼 수 없는 건데도, 그는 넉살 좋게 대꾸했다. 내 예상이 보기 좋게 엇나갔다.

하지만 차라리 이편이 의심스럽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지능계 에스퍼 특유의 지식에 대한 열망이 엿보였다.

‘지능계에 미친놈들이 많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그리고 이안은 모르겠지만 나는 블러드 킹에게 습격 사건의 범인이 방출 게이트 때 사라진 연구원과 동일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범인이 확실히 크리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건 명백했다.

사라진 연구원이 항생제를 완성하지 못했대도, 이안과 만난다면 에코팀에서 진행하는 항생제 연구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이안에게 전달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간, 크리먼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내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 페어도 최근에 정정하셨고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인 걸 인지하셨을 테니 제안드리려 합니다.”

“뭔가요?”

“제가 옆에서 구사월 가이드를 보호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안 에스퍼가 왜요?”

“말했다시피 저는 범인을 만나 보고 싶은 입장이라서요. 구사월 가이드와 같이 다니면 언젠간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옆에 이안 에스퍼가 있으면 더 안 되죠. 지능계라도 에스퍼는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겠습니다.”

“그것도 불편한데요.”

왜 말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그가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내게 들러붙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가 크리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더더욱.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행동에서 크리먼의 특징을 알아채고, 의심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저 언뜻 선량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눈매가 거슬렸다. 나같이 감추는 게 많은 사람은 부담스럽게 느낄 법한 눈초리였다.

“크리먼에게 먹혀도 상관없으신가 봅니다.”

“경호라면 알파 팀 에스퍼에게 받아도 됩니다.”

“내부에 사건 조사를 방해하는 자가 있는데, 그 에스퍼가 안전할 거라고 누가 보장하죠?”

“그렇다고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경호를 맡길 순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반문했다.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들러붙는 건 누구든 귀찮고 거슬렸다.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크리처가 가이드의 피를 마신다고 무조건 핵이 작아지는 게 아닙니다. 일정량 이상을 먹어야 변화가 생깁니다.”

이안은 잘 새겨들으라는 듯 꾹꾹 눌러 말했다. 나는 대놓고 시선을 피하며 흘려들었다. 이안은 그런 내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크리먼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적게는 5명. 많게는 100명이 넘는 가이드를 먹어 치워야 변하더군요.”

“…….”

“그러려면 아마 가이드를 크리먼으로 만들어서 계속 재생시켜야겠지요?”

이건 확실히 소름 돋는 얘기였다. 크리먼이자 가이드인 나로선 자연스레 범인에게 잡혔을 때의 상황이 그려졌다.

“크리먼들은 식사 예절이 저열하다던데. 저라면 그렇게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것 같군요.”

나는 그의 말에 눈썹이 날 서게 올라갔다.

‘젠장. 이 정도면 이 새끼 내가 크리먼인 거 다 알고 물어보는 거 아니야?’

단순히 범인을 만나 보고 싶고, 나를 도울 생각이라기엔 그는 너무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휘어진 눈매는 가면일 뿐이었다. 그 안에 담긴 하늘색 눈동자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갑기 그지없었다.

불현듯 그를 보면 왜 이렇게 오싹한 기분이 드는지 깨달았다. 거미줄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수십 개의 눈을 가진 거미.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한 느낌이 딱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는 그동안 촘촘하게 수사망을 좁혀온 것 같았다.

어쩌면 A지부에 찾아온 것이 이 임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의뭉스러웠지만, 그가 집요한 사람이란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래도 위험성을 못 느끼십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긴 했지만 반대로 크리먼과 관련된 정보를 더 얻게 될 수도 있으니 그 가능성에 걸기로 했다. 게다가 여기서 더 거절했다간 정말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고. 일반인과 같은 가이드라면 이 상황에선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앞에선 알겠다고 하고 곁을 맴돌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 대답에 만족스럽게 씩 미소 지었다.

‘잘 부탁드리긴. 겁대가리 상실한 놈.’

정말로 범인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항생제에 대한 정보를 빼내고 죽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안이 있다면 녀석도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속으로 이안의 목을 물어뜯는 상상을 했다. 새하얀 피부에 선명한 빨간색이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크리먼으로서 새로운 피에 대한 호기심이 자글자글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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