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39/131)

“솔직히 양심 있으면 너희 둘 중에 하나는 나랑 페어해야 된다. 나 C등급이라 너희한테는 세뇌 안 통하잖아.”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요?”

“집어치워요.”

“사월아.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계속 징징대면 가이딩도 안 해 드릴 겁니다.”

“어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지한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우기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적당히 받아치자, 손바닥으로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혀를 차며 자리로 돌아가 다음 일정표를 체크했다.

또 오후에 브라보 팀 에스퍼 있네. 얘네 저들끼리 짠 건가?

“어? 저거 누구야?”

브라보 팀 전체를 당분간 받지 않으려고 반려시키는데, 알파 팀 사무실에서 못 보던 남자가 들어왔다. 가장 바깥쪽 자리에 앉은 지수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과자를 오도독 씹으며 말했다.

“실장님!”

송이는 그 남자를 발견하더니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와다닥 달려갔다.

“잘 지냈어요?”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송이의 눈높이에 맞춰 인사를 나눴다. 애시 톤이 도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깊은 아이홀과 우아하게 뻗은 콧날, 뼈마디가 얇은 편이었지만 타고난 골격 때문인지 그렇게 말라 보이지는 않았다.

새하얀 얼굴에 은색 테두리의 안경은 청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자아냈다. 절로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림 같은 남자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C 지부에서 A 지부로 발령받은 백송이 가이드 페어, 이안입니다.”

“헉. 송이 페어라고요?”

“말했잖아요. 저 페어 있다고.”

남자는 외모만큼이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했다. 송이는 이안의 팔뚝에 매달려 으스대며 말했다.

“와. 한국분이 아니신가 봐요.”

“프랑스계 혼혈입니다.”

“근데 우리말 되게 잘하시네.”

“자란 건 한국에서 자랐으니 한국 사람은 맞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진짜 잘생겼다. 송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왜 다들 제 말 안 믿어 주세요!”

지수는 이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관찰했다. 안경에 알 없는 거 아니냐며 손을 넣어봐도 되냐는 생뚱맞은 질문에도 하하 웃었다.

“안녕하세요. 방금 백송이 가이드에게 차인 정신계 C급 강지한입니다. 정말 존재하시는지 미처 몰랐네요. 어찌 누추한 곳에 이리 귀한 분이….”

지한은 평소처럼 구김살 없이 다가갔지만, 어쩐지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여서 민망한데 정말 페어까지 나타나니 분한 건가.

“지능계 C급 이안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지한의 경계 어린 시선을 이안은 가볍게 흘려 넘겼다. 나긋한 목소리와 선한 눈매는 자신의 가이드를 넘봤다고 조금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B급 에스퍼 박한나입니다.”

“반갑습니다.”

“지능계면 A 지부에서도 에코 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차례로 알파 팀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저절로 시선을 끄는 외모 때문에 주위에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안은 사람 좋은 인상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우리 팀 사람도 아니고, 굳이 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로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은 내 목에 걸려 있는 센터 출입 카드를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구사월 가이드시죠?”

이안은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건넸다.

‘에스퍼라고 하지 않았나. 첫인사로 악수?’

보통 에스퍼는 악수를 잘 하지 않는다. 간혹 감정이 동요할 때면 파장에 기분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이드는 파장 제어가 가능하니, 그건 일방적으로 에스퍼의 감정만 들키게 되는 격이었다.

에스퍼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행동을 했던 유건 외에 악수를 청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나에게는 불리할 게 없어서 손을 맞잡았다. 파장 컨트롤을 하는 것인지, 그 정도로 동요를 안 일으키는 건지 감정 섞인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습관적으로 에스퍼 고유의 파장을 살폈는데, 화사한 외견과는 별개로 고요한 파장을 지니고 있었다.

낮게 너울거리는 게 어둡고 음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예전에 비슷한 파장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그 잠깐 사이에 상념에 빠졌는데, 이안이 마주 잡은 손을 잘게 흔들며 집중력을 깨뜨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마치 내가 파장을 읽은 것을 아는 것처럼 느긋해 보였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대화 나눌 수 있습니까?”

그리고 갑작스러운 요청을 했다.

‘방금 처음 만난 사람이 왜?’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팀원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송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송이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가더니,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실장님. 구사월 가이드님께 무슨 용건 있으세요? 제게 말해 주시면 전해 주면 되는데….”

“그게 임무 관련된 얘기라서요. 혹시 제가 송이 씨 팀원에게 말을 걸면 송이 씨가 곤란해지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임무라면 뭐…. 어쩔 수 없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안은 정중하게 송이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송이는 오자마자 다른 가이드에게 말을 거는 이안에게 기분이 상해 보였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임무입니까?”

나는 지능계와 진행하고 있는 임무가 없기에 세부적인 용건을 물었다. 이안은 이곳에서 말하기 약간 난감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나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얼마 전 습격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크리먼이… 가이드를 습격한 사건이요?”

“네. 그 건에 대해서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최대한 무심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심장 박동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유건에게 크리먼임을 들켰던 그 날의 사건 이후로 다른 가이드가 습격 받은 일은 발생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한결이 나를 제외하고 진행한 탓에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한결에게 한번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눌까 하다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한결이 또 이 임무에서 나를 제외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든 탓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묻어 두는 것보다 미리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A031실 예약했습니다. 자리 이동하시죠.”

나는 회의실을 예약하곤 곧바로 이안과 자리를 옮겼다.

***

이안은 회의실에 들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블라인드를 칠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오늘 처음 만난 에스퍼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말씀하세요.”

“구사월 가이드. 얼마 전 페어를 취소한 걸로 압니다. 맞습니까?”

“네.”

“왜 취소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 페어가 임무와 관련이 있나요?”

“…먼저 제가 찾아온 이유부터 확실히 해야겠군요.”

내가 첫 질문부터 경계하며 대답하자, 이안은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는 듯 의자를 빼주었다.

과하게 친절해 보이는 행동에 더욱 께름칙해졌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거절하지 않고 착석했다.

“상부에서 C 지부 에코 팀에게 크리먼이 왜 가이드를 습격하는지에 대해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센터는 팀마다 맡은 역할이 다른데, 에코팀은 연구원으로 구성되며 지능계 에스퍼가 많았다.

“크리먼에 관련된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크리먼의 유전자를 복사한 쥐로 가이드의 특성을 복사한 쥐의 피를 투여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더군요.”

센터 연구원들은 각성자 관련 실험을 할 때마다 동물 실험을 선행하고 인체 실험을 시행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안이 실험 결과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이전에 에밀리가 내게 언질을 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크리먼인 쥐의 핵이 작아지는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높은 등급의 가이드를 먹을수록 더더욱 크기는 작아졌습니다.”

“…….”

하지만 소문을 전해 들은 것뿐이라 실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은 다가오는 무게가 달랐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표정 관리했다.

“그리고 한가지 가설이 떠오르더군요. 가이드의 피를 마셔서 크리먼의 핵이 작아진다면, 어디까지 작아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어지는 얘기에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예 없어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순간 너무 놀라서 혀를 씹어 버렸다. 찌릿하고 감전이라도 걸린 것처럼 퍼지는 통증에 왼쪽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혹시 알던 사실인가요?”

이안의 시선이 내게 향한 것이 느껴졌다. 뒷골이 바짝 당겼다. 나는 최대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이 상황에서 내가 보여야 할 반응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그저 피해자로 보일지 생각했다.

“아니요…. 가이드를 먹으면 핵이 작아지는 게 사실인가요?”

“가정일 뿐입니다. 동물 중에 S급, 혹은 그 이상의 가이드로 유전자 실험에 성공한 실험체가 없어서 검증할 수가 없거든요.”

“만약 핵이 완전히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크리처는 핵이 부서지기 전에는 끊임없이 재생되니 아마….”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범인에게 그 정도로 효용 가치가 있다면 경계하는 것이 옳았다.

“죽지 않겠죠.”

첨예한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는 핵이 사라지면 불사의 존재가 된다는 것까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실험을 통해 논리적 귀결이 객관적 현실과 일치하는지 검증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리곤 그저 가정일 뿐이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크리먼이 그렇다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불가능을 논하는 건 어렵죠. 제 생각엔 그래서 범인이 D급부터 시작해 S급인 구사월 가이드까지, 이토록 끈질기게 등급을 높여 가며 끔찍한 짓을 벌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범인이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안을 주시했다.

“그래서 구사월 가이드가 최근에 페어를 취소하기도 했고,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A17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처음으로 습격에 실패한 케이스였으니까요. 범인은 구사월 가이드를 아직도 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데 이렇게 손 놓고 계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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