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8/131)

나는 그 기억을 상기할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빠듯하게 조여 왔다.

‘백유건 입장에선 당연하지. 말은 괜찮다고 했다지만… 난 크리먼인데.’

그 후로 유건과는 가이딩은 물론이고 식사도 퇴근도 같이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따라다니는 걸 모조리 그만두었다.

그 짧은 기간에 내 옆에 유건이 있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일상이 조금 허전하고 적막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누군가 가깝게 지내는 게 싫었는데.

혼자라면 의식 하지 못하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진짜 세상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됐어. 페어를 취소한 건 잘한 선택이야.’

나는 쓸데없는 상념을 뒤로하고 캡슐을 마무리해서 나왔다. 누군가 계속 함께하다가 없어지면 빈 공간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 이 허전한 감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결과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데, 질질 끄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항생제를 연구하던 연구원을 찾아야 하고, 에밀리가 왜 내게 사실을 숨겼는지 알아야 하지만. 이제는 나만 잘하면 되는 문제였다.

연구원을 찾는 중에 만약 내가 크리먼인 게 밝혀지더라도, 다른 사람은 피해를 볼 일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심됐다.

이전보다 더 사람을 경계하고, 누구와도 깊게 관계를 맺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하나둘 순서대로 잘 풀어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캡슐을 막 나오고 있는데, 마침 건너편 캡슐에서 유건이 나오고 있었다. 뭘 하다가 나온 건지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처음엔 커다란 덩치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그 뒤로 가이드들이 줄지어 나왔다. 유건과 가이딩을 진행한 가이드들이었다.

“백유건 에스퍼. 다음 일정 언제예요?”

“진단원에서 매칭 일정 잡히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엔 2단계로 해요?”

“되도록 단계는 안 올리려고요.”

“왜요? 한 단계만 올려도 훨씬 수월할 텐데.”

그들은 킥킥거리며 유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낯선 가이드가 많아서 어색한 건지, 약간 딱딱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전히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가이딩 하러 왔어?”

“아니. 방금 끝났어.”

“일찍 끝났네?”

“너야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요새 캡슐에 콕 박혀 있어서 얼굴 보기는커녕 이렇게 오다가다 우연히 만날 때 빼고는, 말도 섞기 힘들었다.

유건은 방금 대화를 나눴던 가이드 무리를 힐끗 바라봤다. 아직도 그를 지켜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약간 난감해 보이는 표정이 내 핑계를 대며 대화를 빠져나온 것 같았다.

“좋아 보이네.”

대화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투가 튀어 나갔다. 유건이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

“아니. 가이딩 잘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괜히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일까 봐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유건은 그런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가 하더니, 급하게 말을 돌렸다.

“어…. 그래. 사무실 갈 거지? 나는 훈련소 가 봐야 해서.”

“난 가이딩 하나 더 남았어.”

“그래. 수고해.”

그가 나를 지나쳐 갔다. 이렇게 처음엔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도,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급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가 말했던 ‘이 정도 거리’란 게 이렇게 먼 거리였을까.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던 손길을 생각하면 이렇게 멀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마주하자 기분이 더 싱숭생숭해졌다. 무엇보다 다른 가이드와 캡슐에서 나오는 유건이 낯설어 보였다.

‘대체 페어 취소할 때 그런 말은 왜 한 거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지.’

대기실 소파에 앉아 그를 탓하고 있는데, 유건과 가이딩을 진행한 가이드들이 내 바로 뒤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가이딩 샤워시키니까 가슴 근육 쩍쩍 갈라지는 것 봤어?”

“옆통 장난 아니더라. 곱상하게 생겨서 몸은 기대 안 했는데 완전 반전이던데.”

“난 팔뚝 보고 예상했지. 너희는 에스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사이즈가 안 나오니?”

가이딩하는데 상체도 탈의한 건가. 그런데 뭐? 가이딩 샤워?

나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 때문에 자연히 귀를 쫑긋 기울였다.

“김채령 작작 좀 해. S급이라서 마킹 안 남은 게 다행이지. 너 강제로 샤워시키는 거 규정 위반이야.”

“딱 보니까 백유건 에스퍼 가이딩 샤워 당한 줄도 몰라. 당황해서 얼굴만 새빨개져서는.”

가이딩 샤워는 순간적으로 에스퍼의 몸에 높은 농도의 파장을 쏟아 내는 걸 말한다. 그렇게 되면 에스퍼의 몸에서 가이드의 파장이 묻어나는데, 페어 관계일 때 자신의 에스퍼에게 페어가 있다는 걸 암시하려고 남기곤 했다.

그런데 그 파장을 남긴 본인이 아닌 다른 가이드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져서, 페어가 아닌 관계일 때는 금지된 행위였다.

보아하니 유건이 등급이 높기 때문에 파장이 짙어서 먹히진 않은 것 같은데….

마킹이 남지 않더라도 높은 밀도의 파장은 적응도가 높지 않으면 에스퍼의 몸에 무리가 간다. 심하면 쇼크가 올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함과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열이 확 오르는. 한마디로 억지로 성감을 고조시키는 일이었다.

웬만큼 간이 큰 가이드가 아니라면 에스퍼에게 상의 없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데, 유건이 센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장난을 친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 2단계 이상으로 가이딩 한 전적이 없고, 구사월이랑 한 달도 안 돼서 깨졌다길래 어디 문제 있는지 알았어. 우리가 며칠 동안 이곳저곳 만져도 아무 반응도 없었잖아.”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뭘 모른다고 하지만 걸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그래도 증명은 됐잖아. 반응 온 것 같던데? 구사월이랑 페어한 에스퍼도 별거 없네.”

“구사월이 왜 페어 깼겠어? 다른 변태 같은 취향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오히려 너무 소극적이지 않아? 가만히 누워만 있잖아.”

“혹시 처음 아닐까? 각성자 된 지도 얼마 안 됐고.”

“처음은 아닐 듯. 그 얼굴에, 그 몸에 처음인 게 말이 돼?”

“난 처음이면 좋겠다. 가르치는 맛이 있잖아. 물건만 확실하면 배우는 거 금방이고. 그런 애들 잘 길들이면 정신 못 차려.”

“맞아. 겉으론 그렇게 안 하얘 보이는데 속살은 뽀얗더라. 그런 애들이 자국 잘 남는데. 언제쯤 3단계 하려나.”

그들은 점점 듣는 민망할 수준으로 수위를 높이며 말했다.

에스퍼도 가이드에게 질 낮은 농담을 많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가이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결국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서 아무 캡슐이나 들어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휙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란 듯 소곤거렸다.

“야. 뒤에 구사월 있었나 봐. 조용히 해.”

“뭘 조용히 해. 어차피 자기가 싫어서 페어 깬 건데.”

내가 고개를 돌려 마지막 말을 한 가이드를 응시했다. 그 가이드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이름이 김채령이라고 했던가. 목에 매달고 있는 센터 출입 카드를 보니, 색은 파란색. C등급이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훑어봤다.

‘등급도 딸리면서 왜 이렇게 자신감에 찬 거지? 자기가 들이대면 백유건이 무조건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간혹 가이드가 에스퍼보다 수가 적어서 자신들이 좋다고 하면 에스퍼가 다 받아 줄 거란 착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저 가이드가 딱 그 짝이었다. 만약이라도 저 가이드와 유건이 3단계 가이딩을 한다면 나서서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하는 걸 보니, 유건과 자면 동네방네 입을 놀리고 다닐 게 뻔해 보이는데.

“계속 쳐다보잖아. 어떡해!”

김채령 말고 옆에 있던 가이드가 소란을 떨었다. 그들도 최근에 내가 가이드에게 위협적으로 방사 가이딩을 한 것을 들었으리라.

나는 잠시 한마디 얹을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최근 징계 위원회에서 주의를 받기도 했고, 유건의 전 페어라는 현재 내 위치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었다.

‘괜히 평판만 나빠지지.’

인성과 관련한 논란은 더 이상 나빠질 부분도 없지만, 가이드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 건 곤란했다. 이 이상의 관심은 사양이었다.

한동안 거슬려도 귀를 닫고 모른 척해야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송이야. 진짜 마지막으로 말한다. 오빠랑 페어 한 번만 하자.”

“저 페어 있다니까요.”

“이 장미꽃을 걸고 맹세할게. 나는 이렇게 우리 관계가 말라비틀어져도 절대 세뇌 같은 거 안 해. 오빠 그렇게 파렴치한 정신계 에스퍼 아니야.”

“파렴치하든 아니든 왜 제 말을 안 들어요? 이미 페어가 있다니까요?”

“솔직히 말해. 없잖아. 너 같은 성격이 어떻게 페어가 있어….”

“엄청 잘생긴 에스퍼 있다고!”

“그래. 네 앞에 바로 있네.”

“아저씨랑 비교가 안 된다니까!”

사무실로 돌아오니, 지한이 송이에게 장미 꽃다발을 내밀며 페어를 요청하고 있었다.

‘저 꽃을 아직도 사용하다니.’

저 장미는 유서 깊은 꽃이었다. 지한이 페어를 요청할 때마다 같이 차여 온 꽃다발로 풍성하던 장미꽃은 시들시들해진 지 오래였다. 미세하게 불쾌한 향도 났다.

‘저걸 대체 왜 안 버리는 거야.’

“어? 언니. 오셨어요! 지한 오빠가 저 계속 괴롭혀요.”

“알아서 하세요.”

송이는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걸 허락한 적 없는데도 제멋대로 친근하게 불러 댔다. 백유건의 태도에 이어 요즘 거슬리지만 눈감아 주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사월아. 그래서 네가 내 페어가 되어 주겠다고?”

“집어치워요. 썩은 냄새 나.”

내가 괜히 신경이 예민해져서 꽃다발을 냉하게 쳐 내려고 하자, 지한이 재빠르게 손을 물렸다. 예상했다는 듯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는 장난기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저걸 없애야 개 같은 소리를 덜할 것 같은데.’

지한은 C등급 정신계 에스퍼다. 정신계 중에 최고의 능력으로 꼽히는 마인드 컨트롤, 즉 세뇌가 가능했다. 그러나 세뇌에는 조건이 붙는다.

첫 번째로 자신보다 등급이 같거나 낮아야 할 것. 두 번째로는 일정 기간 파장에 노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간에 대해선 정신계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가이드들은 대개 정신계와 가이딩을 꺼렸다. 그래도 지한은 발이 넓은 편이라 가이딩은 어떻게 상쇄가 되는 듯했지만, 페어는 그 역시도 구하기 힘들어했다. 페어는 오랜 기간 파장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세뇌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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