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구 님. 찾아보니 그 글이 두 번째 게시물이던데,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그렇게 단언하듯 말씀하시면 신입 회원들이 혼란스러워하십니다. 제가 마침 커뮤니티에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잘못된 정보가 더 퍼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블러드 님이 굉장히 믿음직스러워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흠흠. 그러세요. 다른 곳에서 이상한 말 듣고 퍼뜨리느니 제게 물어보는 게 낫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크리먼이 된 지 5년 차 블러드 킹. 항간에 떠도는 크리먼에 대한 소문은 꽉 잡고 있죠.”
블러드 킹은 음성만 듣는데도 왠지 재수가 없었다. 5년 차면 나보다 적은 것 같은데…. 잠시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아쉬운 입장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잘못 올렸던 연구원에 대한 정보 말인데요. 블러드 님께서 D 지역이 아니라 C 지역이고, 육체계가 아니라 정신계라고 적으신 거 봤습니다. 꽤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시던데 혹시 사라진 연구원과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인가요?”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블러드 킹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저 또한 건너 건너 들은 얘기입니다. 크리먼의 소문이란 게 다 그렇죠. 하지만 정확도는 높을 거예요. 가이드 습격 사건 때 가이드를 덮친 크리먼들이 그들을 데리고 C 지역으로 돌아갔고, 폭주한 크리먼을 꼭두각시처럼 다루려면 정신계밖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왜 갑자기 가이드 습격 사건을….”
나는 순간 섬뜩했다. 내가 블러드 킹과 대화를 나눈 주제는 항생제와 사라진 연구원의 행방, 그 둘 뿐이었다.
그런데 돌연 가이드 습격 사건과 연관 지어 말하니. 내가 그날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리고 왜 가이드 습격 사건의 범인이… 사라진 연구원이라는 것처럼 말하지?
“아. 모르셨구나. 가이드 습격하는 거 그 연구원이 시초라는 소문이 있거든요.”
“네?”
“그 후로 다른 크리먼들이 따라서 가이드의 피를 마셨더니 핵이 작아져서 요새 유행하고 있는 거고요. 이 소문은 크리먼들한테는 꽤 많이 알려진 건데. 모르셨어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항생제를 연구하는 연구원이 나를 습격한 사람일 줄이야. 나는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 제가 크리먼이 된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러시구나.”
“블러드 킹 님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습격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블러드 킹은 헛헛, 하고 헛기침을 냈다. 살짝 올라간 목소리 톤만으로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칭찬에 무척 약한 사람 같았다.
“그럼요. 습격 사건이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그 자리에서 가이드의 피를 먹어 치웁니다. 그 연구원으로 추측되는 사람은 폭주시킨 크리먼을 이용해 납치하더군요.”
“그럼 첫 번째 경우는 보통 본인들이 가서 피를 마시나요?”
“그렇죠. 뭐 하러 귀찮게 자리까지 옮겨가며 마셔요. 빨리 마시고 튀어야지.”
“…….”
말하는 걸 보니 블러드 킹 또한 가이드를 습격하여 피를 마신 전적이 있어 보였다.
“구구 님께서도 생각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 친구들이 등급이 높은 크리먼이어서 용병으로도 자주 쓰이거든요.”
“하하…. 아닙니다. 저는 무서워서요.”
“부담 없이 편하게 오셔도 됩니다. ‘B 지역 술고래’님 추천으로 가입하셨으니 그 정도는 해 드립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B 지역 술고래’는 에밀리의 커뮤니티 아이디였다. 이 커뮤니티는 맛집 커뮤니티로 위장해 정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회원 가입 조건 또한 까다로웠다. 그 조건은 지인 추천이었다. 나를 추천한 건 당연히 에밀리였다.
“제가 커뮤니티 운영자니까 알죠. 에밀리 친구분 아니세요?”
블러드 킹은 에밀리의 본명까지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저도 에밀리랑 친하거든요. 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문자 남기세요. 제가 지금 전화를 끊어야 해서. 아니면 에밀리에게 물으셔도 됩니다. 에밀리도 이 정도 정보는 다 알 테니까요.”
뚜뚜뚜, 하고 통화 종료음이 귀를 울렸다. 블러드 킹은 정말 급한 일이 생겼는지 급하게 전화를 종료했다. 나는 한동안 굳어 있다가 귀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에밀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에밀리는 분명 내게 사라진 연구원이 C 지부에 있고, 그 후로 행방이 묘연하단 것만 알려 줬다. 그 연구원과 나를 습격한 사람이 동일 인물이란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숨긴 건가?’
에밀리는 특수계에 속하는 동물 소통 능력을 갖춘 크리먼이다. 센터에서는 그 능력을 갖춘 에스퍼를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고 불렀고 그들은 정보 수집 면에서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에밀리가 6개월간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때부터 의심은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일부러 내게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니….
나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당장 에밀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금요일에 흡혈하러 가는 날이니, 얼굴을 보며 대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가 천리안을 쓸 수 있는 에스퍼거든요. 천리안 아시죠? 천 리 밖에서도 보인다고 해서 천리안인 거.”
“네.”
“등급은 낮은 편에 속하긴 하지만 현장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브라보 팀에 있는 거고요. 저희 팀 캡틴도 제가 들어오고 나서 수비 쪽이 많이 보완됐다고 좋아하셨거든요.”
“네.”
이럴 줄 알았다. 원래 가이딩이 예정돼 있던 브라보 팀 캡틴이 갑자기 급한 임무가 생겼다며, 자기 팀 다른 에스퍼를 캡슐로 보낸다고 했을 때부터.
대타로 들어온 에스퍼는 들어오자마자 대기업 면접이라도 보는 것처럼 자기 PR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단원에서 파장 밀도 체크해 보시더니 2차 각성 가능성도 염두에 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되면 아직 젊은 편에 속하니까 지금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네.”
“제 예상엔 그럼 알파 팀도 가능할 것 같은데. 수비 쪽 인력 충원한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네.”
“제가 알파 팀 들어가면 페어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구사월 가이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의미 없이 ‘네, 네’거리고 있는데, 돌연 에스퍼가 고개를 들이밀며 물어왔다.
뭘 물어봤더라.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이제 어깨 안 아프시죠?”
“오. 진짜네?”
나는 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말을 돌렸다. 남자는 가이딩에 전혀 집중을 안 하고 있었는지, 어깨를 돌려보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으로 가이딩하실 때 손목에서 세 마디 정도 떨어진 부분 위주로 가이딩하세요. 오른쪽 다리 말고 왼쪽 다리도 고루 사용해 주시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 오른 다리 쓰는 거.”
“가이딩 완료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잠깐만요.”
가이딩이 완료되어서 캡슐을 나가려는데, 남자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눈을 흘기며 노려보자, 그가 놀라서 손을 급하게 떨어뜨렸다.
“아, 죄송해요. 근데 대답은 해 주셔야죠.”
“뭘요?”
“그러니까 제가 알파 팀 들어가면 페어…”
“저는 페어 원래 안 합니다.”
각성자 중에도 비(非) 페어주의인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성의 없는 거절이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했었다.
“얼마 전에 백유건 에스퍼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유건과 페어를 해서 이제 생각 없다는 말은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속으로 계속 달라붙는 게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떠오르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해 봤는데 별로 좋은 경험은 아녔어요.”
“아, 그러시구나.”
“다시는 안 하려고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남자는 체념하는 듯하더니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하긴, 페어로서 절대 안 될 일이죠. 한 달 만에 페어 깬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무슨 소문이요?”
“그… 백유건 에스퍼가 생각보다…. 그러니까….”
남자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내 살짝 붉어진 낯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거기가 부실하다면서요?”
“아.”
나는 듣자마자 건조하게 탄식했다. 특별할 일은 아니었다. 페어 정정 기간에 페어를 취소하면 센터에는 남자 각성자를 대상으로 매번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내가 이런 상황을 겪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남의 얘기를 들을 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듣고 넘겼는데, 내 입장이 되니 참 난감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부정하자니 내가 유건과 3단계까지 간 것처럼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아무 말도 안 하자니 멀쩡한 녀석을 하자가 있는 놈을 만드는 것 같아서.
“페어 제가 문제 있어서 깬 거고요. 백유건 에스퍼는… 에스퍼로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 당연하죠. 구사월 가이드 문제가… 네?”
“하자는 제게 있어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에스퍼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유건이 잘못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내가 크리먼이라서 하자가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건은 그 점을 알고 페어를 맺은 것이기에, 나와 페어를 하면서 고통 받았던 것은 자업자득이지 싶었다.
동시에 그동안 너무 화만 내고 더러운 꼴을 보여 준 것 같아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어쨌거나 유건은 서툴러도 나를 이해하려고 했었으니까.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놓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내 예상과 한참 벗어난 유건의 태도에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를 돌려보냈다.
“네가 그 사실만으로 조금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너 곤란하게 만드는 짓 이제 절대 안 해.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었는데….”
“딱 이 정도 거리가 좋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 편이 되어 준다는 말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유건을 생각하면 항상 속없는 사람처럼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 떠올랐는데, 이젠 ‘거리’를 지키겠다며 살짝 미소 짓던 얼굴이 같이 떠올랐다.
투명하지만 단단한, 어떠한 혼란도 없는 올곧은 시선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리고 그 뒤에는 원래는 보이지 않았던 씁쓸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유건이 그렇게 후회하고 절제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가 모호하게 말했어도 저 또한 내게 가지고 있는 호감이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다가가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