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6/131)

나와 유건이 페어를 취소했단 소문은 하루 만에 A지부 전체에 퍼졌다. 나는 다시 원래의 업무로 돌아가 다른 에스퍼와 가이딩을 진행했고, 유건은 모든 임무를 중지하고 파장을 안정기로 올리기에만 전념했다.

“야, 오늘 역대급. 백유건 에스퍼 캡슐에 18명 들어갔대.”

“대박이다. 왜 자꾸 늘어나는 거야?”

“애초에 매칭률이 다 낮기도 하고, 파장이 들쑥날쑥하니까 제대로 못 받아먹나 봐.”

“그러다 폭주하는 거 아니야?”

“센터가 S급 에스퍼가 폭주하게 놔두겠냐.”

센터는 1차 폭주의 위험성 때문에 유건을 5명 이상의 가이드를 매칭시켜 가이딩을 진행하게 했다.

아주 이례적인 일로 센터에서 큰 화제를 모았지만,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않은 여파로 파장을 안정기로 끌어 올리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백유건 에스퍼 2단계 이상은 그렇게 싫어한다더니, 곧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럼 18명이랑도 할 수 있는 거야?”

“진단원에서 매칭시킨 거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와, 진짜 걔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곧 나라를 구할 위인이시지.”

“나도 폭주나 할까.”

“꿈 깨라. 우리는 2차 폭주까지 가도 그렇게 매칭 안 시켜 줘.”

“진짜 현타 온다.”

센터 각성자들은 모였다 하면 유건이 이번엔 몇 명의 가이드와 가이딩을 했는지, 그가 2단계 이상의 가이딩을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 어디를 가도 유건이 어떤 상황인지 귀에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힘들면 한 번쯤은 내게 받아도 될 텐데.’

원래는 유예 기간을 가지며 내가 관리하는 게 맞았다. 이런 상황이 온 것은 유건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내 가이딩을 한사코 거절한 탓이다.

메시지로 가이딩을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유건은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괜찮지 않은 건 소문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럼에도 정정서를 제출하던 날 이후로 껄끄러운 부분이 있어서, 나는 여러 번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아무리 나라도 이 수준까지 왔다면 2단계로 오랫동안 가이딩을 해야 안정기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분명 굉장히 어색하게 굴 것 같은데.’

이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물고 빨았으면서, 그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나로 이렇게 어색해지는 나 자신도 이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날 이후로 나는 유건을 확실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징계 위원회에 소환됐다. 다섯 명의 징계 위원이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질문을 쏟아 냈다.

“캡슐 강제 개방한 사유는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방사 가이딩을 허가 없이 사용한 사유는요?”

“그것 역시 개인적인 사유였습니다.”

“구사월 가이드, 이런 식이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센터 규율을 위반하고, A지부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걸 인지하고 있습니다. 처분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백유건 에스퍼는 그렇다고 쳐도, 아실 만한 분이 대체 왜 그러셨냐고요….”

내가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굴자, 되레 상대방이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등급이 높아서 강력한 징계를 못 내릴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구사월 가이드는 동료에게 폭언과 폭행도 문제가 되지만, 피해자의 합의로 사유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네? 백송이 가이드가 괜찮다고 했다고요?”

“예. 위원회에서 현장 자료로 검토하여 받아들인 사안이니, 구사월 가이드는 캡슐 강제 개방에 대한 권력 남용과 명예 훼손에 대한 3개월 감봉과 근신 처분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한 달간 말이나 행동을 삼가시고 조심하여 주십시오. 징계는 3개월 감봉 수준의 경징계로 내려지지만, 이번 사안은 가벼운 규정 위반이 아닌 만큼 센터장님께서도 앞으로 주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의 결말이었다. 봐줘도 너무 봐주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위원장이 말하길, 센터장님도 내가 백송이 가이드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단 걸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그 부분을 덮고 지나간 것이 가장 의문스러웠다. 그 의문은 얼마 안 가 백송이 가이드가 정식으로 A지부에 출근하고 풀리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구사월 가이드님!”

“내가 웬만하면 얼굴 보지 말자고 했을 텐데.”

“그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알파 팀에 배정되어 처음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사무실 한가운데서 내게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어떠한 설명 없이 얼토당토않은 행동에 인상을 구겼다. 저 말간 얼굴로 또 무슨 꿍꿍이속일지 미심쩍었다.

“그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문을 내세워 등급을 우습게 보고 지휘 체계를 어지럽힌 죄, 마땅히 반성하고 자숙하고 있습니다. 등급 위에 계급 없고, 각성자에겐 그 무엇보다 등급이 중요하단 지엄한 가르침 달게 받았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하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말은 청산유수였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 어이없을 만큼. 내가 피곤한 눈길로 그냥 지나치려 하자, 송이가 내 팔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이 행동이 더 무례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앗,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했습니다!”

허둥지둥대던 송이가 무릎을 탈탈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다시 지나쳐 갈까 말을 덧붙였다.

“용서해 주신다면 센터장님께 오해를 풀어 주시겠어요?”

“오해요?”

“사실 센터장님께서 그날 백유건이랑 페어를 취소한 것이 저 때문이라고 알고 계셔서….”

그러니까 그 고명한 백씨 가문 센터장님께 호통을 들어서 태도를 바꾼 거란 얘기였다.

“아, 그렇다고 억지로 사죄한 게 아닙니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저 자신도 잘못되었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표정이 싸늘해지자 송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근데 이상한 것이 아무리 내가 S급 가이드라도 송이는 가족이고 나는 남인데, 센터장이 내 편을 들어준단 사실이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고 내가 센터장님께 찾아가서 왜 그러셨냐고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 또한 물의를 일으킨 만큼 센터장님을 볼 면목이 없던 탓이다.

“기회가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송이는 당장 내가 오해를 풀지 않자, 풀 죽은 모습이었다.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너무 짜증스러운 티를 내서인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 좋았을 것을, 송이는 그 후로도 내게 과하게 들러붙었다.

“구사월 가이드님, 제가 실수로 커피 두 잔 샀는데 받아 주시겠어요?”

“혹시 어떤 립스틱 쓰세요? 어디 브랜드 몇 호요?”

“렌즈 끼신 거예요? 이런 눈동자는 처음 봐요. 너무 예뻐요. 은하수 같아.”

“입맛이 없으세요? 저희 집사가 만든 특제 샐러드 있는데 드실래요?”

“에이, 저한테 말 놓으세요. 저도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저희 엄마가 팬이래요. 사인해 주실 수 있나요?”

“구사월 가이드님. 구사월 가이드님! 언니! 어디 가요!”

“따라오지 마세요.”

“저도 같이 가요!”

나는 그녀를 피해서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뒤에서 혹여라도 놓칠까 타닥타닥하고 부산스럽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망치듯 비상구 계단으로 숨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그 녀석도 이랬었지.’

백유건. 송이는 마치 여자 백유건 같았다. 지금 하는 행동은 유건이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 내게 보였던 행동과 똑 닮아 있었다. 백씨 가문은 지독하게 집착하는 유전자라도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한결 또한 오래전부터 내게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당사자에겐 몇 년 동안 말도 안 하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쯤 되면 그 가능성은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한 크리먼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렸다. 더 이상 항생제를 찾는 일을 에밀리에게만 맡길 순 없단 판단에 스스로 정보를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지역에서 사라진 연구원 정보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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