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5/131)

나는 알파 팀 사무실에 들러 정정 신청서를 가지고 유건을 행정실로 연행하는 중이었다. 유건은 왠지 차분하게 내게 끌려오고 있었다.

그가 또 무슨 꿍꿍이속일지 불안해져서 그의 팔뚝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유건은 내가 붙든 자기 팔뚝을 지그시 바라봤다.

“나 도망 안 갈 건데.”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이미 그를 얕보다가 어이없이 여러 번 당해 왔다. 그가 S급 에스퍼인 만큼 조금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됐다.

“진짜 페어 그만둘 거야?”

“어.”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어.”

유건은 내 얼굴을 보며 걸었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시선이 느껴졌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근 며칠 동안 유건을 잡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고, 너무 고생한 탓에 이제는 그와 페어를 취소하려고 했던 이유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 지긋지긋하고 짜증이 났다. 페어만 취소하면 이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갈 것 같았다. 다시 내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행정실이 있는 B동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계속 쳐다보던 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랬나 보다.

“네가 익숙해진다고 했잖아. 내가 이러는 거 매칭률 높은 가이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잠시 유건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다 이전에 그가 에스퍼를 질투하고 경계한 것에 대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근데 페어 취소해도 안 변하면? 가이딩 안 해도 계속 이러면 뭐야?”

“그럴 일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우리 말곤 올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너는 뭐든 잘 아니까….”

그는 왠지 허망한 말투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6층을 눌렀다. 이제 몇 초만 지나면 페어를 취소하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몇 초만 기다리면 되는 데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층이 올라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을 잡아 뜯고 있는데, 유건이 예고 없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나 요새 너만 보면 떨려.”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인상을 구기고 그를 쳐다봤다.

“심장 두근거리고, 손만 닿아도 기분 이상해. 네가 나랑 끝이란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는….”

평소답지 않게 장난기가 빠진 목소리는 혼란스러움이 그득 묻어났다.

“오늘도 네가 싸운단 말에 이렇게 앞뒤 못 가리고 제 발로 찾아오게 되더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던데?”

그가 심란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반대로 나는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너한테 가이딩 안 받아도 너에 대한 마음이 안 바뀌면 말이야. 그땐….”

그가 이어질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다시 삼켜냈다. 자신이 이런 말을 내게 한다는 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지, 아직 그 정도의 마음은 아닌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제 페어도 아니고 가이딩도 안 받으면, 내가 너한테 잘해 줘도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 안 할 거잖아.”

생각을 마치고 나온 말은 이전에 유건이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와 말싸움을 할 때도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잘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었으니까.

그러나 나를 요새 보면 떨린다는 말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만 닿아도 기분이 이상하다는 말은 도저히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가 어떤 의중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든 페어를 유지하려고? 페어를 그만두면 널 좋아해 버리겠다? 지금 이런 뜻으로 말하는 건가?’

유건의 방에 갔던 날에는 분노로 인해 자세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유건이 오로지 가이딩 때문에 내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키스했을 때 보았던 뜨거운 눈빛, 내가 끝까지 유건의 말을 믿어 주지 않자 선뜻 몸을 내어 주면서도 가이딩을 거부하는 모습.

그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 뭉근하게 차오르는 이 감정이 뭔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었지만, 내가 그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역시 유건은 내가 방사 가이딩을 해서 날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찾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머리는 까치집에 한쪽은 슬리퍼, 한쪽은 맨발 상태였다.

걱정스레 살피는 눈동자는 자신이 오면 잡힐 거란 생각도 못 한 것처럼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런 행동들이 겹겹이 쌓여 안개처럼 흐릿했던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야, 나 좋아하지 마.”

나는 이것이 진심이건 장난이건 일단 잘라 내듯 말했다.

“아직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

“지금 나랑 장난해?”

어이없는 말장난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왜? 내가 한결 형 동생이라서?”

유건이 내게 눈을 맞추며 물어 왔다.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내가 널 왜 좋아하면 안 되는데?”

유건이 진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는 명쾌했다.

“나 크리먼이잖아.”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육중한 바위가 심장에 내려앉는 듯했다.

“…….”

“표정이 가관이네.”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당황스러움과 절망, 혼란, 의문, 떨림.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그는 그런 내가 웃긴다는 듯이 미소 짓고는 다시 바뀌는 층수를 주시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사이가 안 좋았기에 그가 의미심장한 짓을 해도 아니겠지, 하고 넘겼었다.

그때 그런 식으로 넘겨선 안 됐다. 의심하고 경계했어야 했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아니, 그것보다 이 녀석은 나를 왜 좋아하지? 정말 좋아하는 건 맞는 건가? 매일 싸우고 다투고 화만 냈는데 나 같은 애를 대체 왜?

속으로 자조하며 여러 생각이 오가는데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도착했다. 유건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안 내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행정실 문을 열고 페어를 취소할 수 있었다.

이대로 페어를 취소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이제 나와 가이딩도 하지 않고 페어도 아니니, 더욱 부딪쳐 올지도 몰랐다.

그간 보았던 유건의 성격으로는 몰랐으면 몰랐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인지했다면 무식하게 돌진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페어를 유지하는 것 또한 유건과 부딪치는 일이 많아질 테다.

사방이 단단한 벽으로 가로막힌 기분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막막했다.

내가 내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유건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어떻게 하면 날 떨쳐 낼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거지?”

그는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이렇게 고장 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왜 말했는데. 너 지금 나 엿 먹이는 거야?”

“누가 이런 걸로 엿을 먹여. 또 속상하게 말하지.”

그의 말을 듣자, 또 가슴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빠듯하게 짓눌려 오는 답답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건이 정말 날 좋아하는 게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지 마. 뭘 선택하든 상관없어.”

그가 의아한 말을 하며 다시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나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듯한 말에 나는 인상을 설핏 찡그렸다.

등 뒤로 문이 서서히 닫혔다. 아래에서 누가 버튼을 누른 건지,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건은 쯧 소리를 내더니 파장을 퍼트렸다. 엘리베이터가 철컹 소리를 내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순간 무게 중심을 잃어 휘청거리자 유건이 내 한쪽 팔을 붙잡았다.

강하고 안정적인 힘이었다. 나는 그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반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멈춰 서자 천장 모서리에 있던 CCTV가 파직 소리를 내더니 터져 버렸다.

전등이 순간 점멸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내부를 밝혔다. 사방이 조용했다.

주변을 메우는 파장으로 보아 유건이 염력으로 엘리베이터를 정지시킨 것 같았다. 그가 품에 안겨 있다시피 지탱하고 있는 내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페어든 페어가 아니든, 내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야.”

그 말은 내가 페어를 그만둬도 여전히 내게 집착하고, 내 사생활에 참견한다는 말이었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네가 곤란할 때 가끔 써먹어. 네 생각보다 내가 꽤 쓸 만한 놈이거든.”

자기 능력을 과시하려고 엘리베이터를 멈췄다는 건가?

“됐어. 네 도움 필요없….”

“너 밖에선 마음 놓고 대화도 못 하잖아.”

“…….”

확실히 나는 센터에서 그와 대화할 때마다 계속 마음을 졸였다. 유건이 페어를 취소해도 내게 태도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이건 평소 유건과 무언가 달랐다.

그러니까…. 유건은 원래 나의 불안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감정이 중요하고 가이딩에만 눈이 돌아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정 써먹을 용도가 없으면 바빠서 가끔 ‘식사’하러 가기 힘들 때 한 입 달라고 하던가.”

“무슨 말 같잖은 소리를….”

“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네 편인 거 알아 달라고.”

유건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다가 돌연 진지한 눈을 하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온도를 하고 있었다. 그 온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가 그 사실만으로 조금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너 곤란하게 만드는 짓 이제 절대 안 해.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었는데….”

동시에 뭔가 후련해 보였다. 그의 곁에서 내가 편하길 바란다니….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왠지 유건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바라만 보자, 그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봄날에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였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돌연 그가 서서히 내게서 몸을 떼어 냈다.

“딱 이 정도 거리가 좋겠다.”

그저 붙잡아 주려는 것뿐이지, 조금의 사심도 없다는 듯 담백한 태도였다.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리고 유건은 다시 16층 버튼을 눌렀다. 파장이 옅어지자, 엘리베이터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길로 우리는 행정실에 가서 페어 정정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유건과 나의 짧았던 페어 관계가 끝이 났다.

그는 가이딩이 필요하냐는 말에 그마저도 거절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닿았던 잠깐 사이에 가이딩이 됐다고. 하루 정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내일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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