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4/131)

“백유건 매칭률이 당신밖에 안 맞는다면서요. 사람 목숨 가지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니면 이런 식으로 몸값 올리는 건가? 이 에스퍼, 저 에스퍼 갈아 치우면서?”

내가 생각에 잠기는 사이 송이는 자신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열심히 입을 놀렸다.

“가이드면 가이드답게 가이딩으로 능력 입증하세요. 이 남자 저 남자 건드려서 백씨 가문 이미지 더 이상 더럽히지 마시고요.”

마지막 쐐기를 박듯 말하곤 스스로 자신감에 차서 우쭐거렸다.

‘되게 내가 못마땅하나 보네.’

몇 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참 어려 보이는 애가 이렇게 독기에 차서 내게 대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신선한 감상에 빠졌다.

확실히 누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싸움을 거는 건 내가 각성자가 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등급이 A라고 했던가. B등급도 A등급과 별 차이가 안 나니, S급인 저한테 지금 맞먹으려는 거죠?”

“고작 한 단계 차이 가지고 유세는.”

그녀는 등급을 운운해도 물러서지 않았다.

“고작? 얘 진짜 웃기네.”

그 방만한 태도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적당히 장단만 맞출 생각이었는데, 정말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보는 사람마저도 목덜미가 쭈뼛한 상황에 내가 돌연 소리 내 웃자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건데, 아래 등급 5배, 10배 이런 수준이 아니라고. A급이랑 S급은 파장량이 100배 이상 차이가 나.”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요? 유치하게 등급 가지고… 큭. …허억, 윽.”

송이가 말하던 도중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치해?”

주변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스산한 공기가 점점 무게를 더해 갔다. 파장을 송이에게만 향하게 해서 다른 각성자들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겠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지금 내가 뭘 하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이윽고 각성자들의 수많은 시선이 나에게 맹렬히 쏟아졌다.

“너는 이게 유치하니?”

나는 고개를 숙여 송이의 눈높이를 맞추며 되물었다. 입매엔 잔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지배를 담은 방사 가이딩을 퍼뜨리고 있었다. 등급의 차이가 심할수록 가이드에겐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백씨 가문 이미지를 더럽힌다고? 백씨 가문 이미지는 네가 망치고 있는 거겠지.”

“저는, 윽. 백씨… 가문 일원으로서…”

“얘가 아직도 말할 기운이 남았네?”

“흐윽!”

좀 더 강하게 파장을 쏟아 내자, 송이가 헉헉거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곱게 차려입은 옷은 잔뜩 구겨지고, 침을 삼키지도 못해 바닥에 질질 흘리고 있었다.

“송 씨든 김 씨든 백 씨든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이자, 불편했던 심기가 조금 나아졌다.

“네 등급이 내 발톱 때만도 못한 A급인데 위아래 모르고 훈계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주제도 모르고 뻣뻣하게 쳐든 얼굴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가 C지부에 있었다면, S급 가이드는 처음 만나 본 것일 터였다. 그러니 이런 식의 압박을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겠지.

“네가 그렇게 자부심 넘치는 백씨 집안 에스퍼들 백한결, 백유건. 너 지금 그 사람들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거지?”

그리고 내내 말끝마다 그놈의 백씨 가문, 백씨 가문.

“끄윽… 윽. 사, 살려.”

“그런데 어떡하니? 네 말대로면 한 명은 내 애인이고, 한 명은 내 페어인데. 누구 말을 들을까, 꼬마야.”

아무리 송이가 C지부 소속이라도 계급으로 따지면 내가 위였다.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등급으로 계급을 나눈 건 그가 그렇게 입에 달고 살던 ‘백씨 가문’의 선대 에스퍼가 세운 체계였다. 그런데 과연 이 하극상을 센터장님에게 말한들 그가 들어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체계를 논하지 않더라도 센터에서 S급 가이드는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가문을 내세워 하극상을 한 것이 언론에 밝혀진다면 과연 언론은 누구 편을 들어줄까. 더 나아가 내가 이 때문에 센터에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꾀를 부려서 질병 퇴직을 한다면 과연 누가 손해를 볼까.

실제로 현재 S급 가이드 2명이 질병 퇴직을 했다. 국내에 S급 가이드가 단 3명뿐이니, 센터에는 실질적으로 나 하나만 남았다는 소리였다. 내 가치는 현재 천정부지로 치솟아 값을 매길 수조차 없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A지부의 지부장과 센터장을 모두 백씨 가문 사람이 역임하는 만큼, 그 둘 중 하나는 사임을 해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막 나가는 건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점점 숨이 끊어질 듯이 충혈된 눈을 하는 송이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고작 한 단계 차이 나니까 어디 한번 풀어 봐. 이 정도 파장은 풀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끝까지 몰아세워진 그녀를 봐주지 않고, 더욱 세기를 높였다.

“그렇게 나불나불 잘도 떠들어 대더니, 갑자기 왜 말을 못 해?”

그녀는 이제 내게 말로 빌 수조차 없었다. 이 공간의 공기가 모두 사라진 것처럼 그저 끅끅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 모습은 순식간에 저 밑으로 추락한 몰락 귀족처럼 기묘한 위화감을 일으켰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말려. 가까이도 못 가겠는데.”

뒤에서 지켜만 보던 에스퍼들이 심각성을 느끼고 수군거렸다. 파장을 그들에게는 피해가 안 가게 컨트롤 했지만, 뒤에 있던 가이드들은 이미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사월아. 그만둬.”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한이었다.

“놓으세요.”

“그만, 두라고.”

“끼어들지 마세요.”

“여기서 더 이상 방사 가이딩 하면 위험해.”

그가 참기 힘든 듯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파장을 조절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한이 가까이 다가온 탓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이 정도 농도의 방사 가이딩은 에스퍼에게도 무리가 갔다. 당연히 가이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한이 내게 가까이 오자, 다른 에스퍼도 한 걸음씩 다가왔다.

“구사월 파장 장난 아니네. 백유건이 목맬 만하잖아?”

“센터 한복판에서 방사 가이딩을 하다니. 겁도 없네.”

“솔직히 여기서 사고 나도 저 가이드 탓도 있는 거 아니야?”

“아, 씨. 한 번만 맛보고 싶다. 존나 맛있을 것 같은데.”

파장의 영역까지 들어와 끓어오르는 성감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한번 훑어보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돼요.”

“그만하라고. 너, 백송이 죽일 생각이야?”

지한이 다시 한번 나를 막아섰다.

“그래도 돼요?”

내 한가로운 대답에 지한의 눈동자가 커졌다. 싸늘한 공기가 우리 사이를 휘감았다.

“장난이에요. 진짜 잠깐이면 돼요.”

나는 싱긋 눈웃음치며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파장 농도를 낮췄다.

“허억, 헉, 헉.”

딱 숨만 쉴 수 있는 정도로.

얼마나 버티려나.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백송이 가이드가 말이 심한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에스퍼가 내게 다가왔다. 송이가 C지부에서 데려왔다던 에스퍼 중 하나였다.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가왔지만 다가온 목적은 뻔했다. 내가 불쾌하단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나와 다른 속성의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전부 멈춰.”

정제되지 않아 따끔하게 느껴질 정도의 에스퍼 파장이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한결이었다.

“오빠….”

“괜찮아?”

그는 그 에스퍼를 나에게서 떨어뜨리고는 곧바로 송이를 부축했다. 송이가 한결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바라봤다.

“구경났습니까? 각자 위치로 돌아가세요.”

주변의 각성자들에게 지시하자,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자리를 이동했다.

S급 에스퍼의 파장이 흉흉한 기세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저 가이드가….”

“게스트로 왔으면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 너 이러려고 온다고 했어?”

“왜 나한테만 그래!”

송이가 한결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려는 듯 칭얼거리자, 그가 다그치듯 말했다. 송이는 결국 왕방울만 한 눈에서 눈물을 퐁퐁 쏟기 시작했다.

너무 심했나.

근데 얘는 안 올 작정인가?

“구사월!”

어쩔 수 없이 이 연극을 끝내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건강한 목소리였다. 파장도 부족할 텐데 우렁차기도 하다.

“너 괜찮아?”

백유건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에 까치집을 하고 나타나서 오자마자 내 몸 구석구석을 급하게 살폈다. 눈으로 상처가 없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손을 올려 내 몸을 더듬듯이 훑어 내렸다.

“구사월, 넌 안 다쳤어?”

“내가 왜 다쳐.”

“치고받고 싸운 거 아니었어? 너답지 않게 저런 걸 왜 상대해! 평소엔 무시도 잘하면서!”

“야, 백유건. 너 나는 안 보여? 쟤 말고 내가 다쳤다고!”

송이가 빼액 소릴 지르며 유건을 향해 말했다. 유건은 그제야 송이를 내려다봤다. 송이의 고운 머릿결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고통으로 기어 다니느라 쓸린 무릎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긁은 목에도 붉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상처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가해자고 송이가 피해자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어…. 아프겠네.”

유건은 뒤늦게 멋쩍은 듯 말했다.

“가서 약 발라라.”

그러곤 머리를 긁적이더니 슬슬 뒷걸음질 쳤다.

“저…. 그럼 나는 이만.”

“가긴 어딜 가.”

나는 곧바로 유건의 팔을 잡아챘다. 보아하니 상황 파악은 끝났고, 다시 튀려는 작정인 것 같았다. 유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힘쓰면 크리처화 개방해서라도 너 잡을 거야.”

유건이 곁눈질로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 개방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유건이 쉽게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고삐를 단단히 붙든 것뿐이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나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자리를 뜨려 했다.

“사월이 너.”

그런데 송이를 부축하던 한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 일 징계 피할 수 없을 거야.”

“어쩔 수 없죠.”

캡슐 이외의 곳에서 방사 가이딩을 하는 건 징계 사유가 됐다. 그것도 이렇게 가이드에게 위협할 의도로 사용하는 건 더더욱.

내가 까딱 조절을 잘못했다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가이드의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처음엔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이 내가 찾을 수 없게 꽁꽁 숨어 버렸고, 마침 별 시답잖은 애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 오고, 구경꾼들도 마련됐고.

내가 에스퍼가 우글거리는 센터 한복판에서 방사 가이딩을 하면, 가이딩에 미친 놈처럼 집착하는 유건이 제 발로 나타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내내 백씨 가문을 운운하는 송이의 태도에 화가 나서 조금 심하게 한 감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습게도, 내 방사 가이딩은 막은 건 한결이었고, 유건은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저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만 알고 온 건지 오자마자 내 안색부터 살피지 않았던가. 이 녀석은 내가 방사 가이딩을 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캡틴이 백송이 가이드 좀 챙겨 주세요. 저 페어 정정 좀 하고 돌아올게요.”

“후…. 그래.”

“아 참.”

나는 뒷일을 한결에게 맡기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다 잊은 게 있어서 다시 송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백송이 가이드, 웬만하면 여기 있는 동안 내 눈에 띄지 마세요. C지부에 영원히 처박혀 있는 게 제일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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