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3/131)

“모를 수도 있죠. 저도 저 사람 몰랐는데.”

나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진짜 송이가 나를 몰라서 몰랐다고 말한 거라 믿진 않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느껴졌던 치기. 그녀는 나를 일부러 무시해서 모욕감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백송이 가이드는 작년에 재각성했잖아요. 원래 E등급이었어요. 그러니 모를 만하지. E등급 가이드를 누가 기억해.”

옆에 있던 수아가 빈정거리며 말을 보탰다.

‘아. 재각성했구나.’

안 그래도 의아하던 참이었다. A지부엔 A급 가이드가 10명 안팎이고, 센터 총합 30명이 안 됐다. A급인데 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쟤 A지부 오면 우리 팀으로 온대?”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요? 등급도 높고 여기에 가족들도 있고.”

“그거 낙하산 아니야? 나는 싫어.”

“A급이니까 낙하산은 아니죠.”

“아무튼.”

한나는 대놓고 송이를 적대했다. 수아가 웃긴다는 듯이 대꾸했다.

“언니 유건이 올 땐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유건이는 귀엽고 잘생겼잖아.”

“왜. 쟤도 생긴 건 귀여운데? 페어 있나?”

“넌 가이드면 다 좋아? 지금 사월이한테 하는 짓 못 봤어? 구사월. 너는 저걸 내버려 둬? 뭐라고 안 해?”

알파 팀 에스퍼 동료가 송이에게 흥미를 보이자 그녀의 적개심은 더욱 심해졌다. 한나는 친하든 친하지 않든 팀원을 건드리는 걸 무척 싫어했다.

방금 상황에서 송이의 행동이 등급이 낮거나 평소 우물쭈물하던 성격의 가이드를 향한 것이었다면 그녀가 끼어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리라 믿고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왜요? 귀여운데.”

“뭐?”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한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우와. 사월 언니 유건 오빠랑 페어 하더니 보살 다 됐네.”

수아조차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길을 보냈다.

“가이드가 기죽어 다니는 것보다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니는 게 훨씬 나아요. A급 정도면 그래도 되지.”

“언니는 S급이잖아요.”

수아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아무리 팀원들이 말도 놓고 가깝게 지낸다고 하나, 여긴 아무튼 센터였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공인된 무력 사용이 가능한 각성자로 구성된 국가 조직. 등급으로 신분을 나눠 일정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렇기에 수아와 나 사이에 유건과의 페어 때문에 불편한 일이 있었는데도, 수아는 내게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선이 분명했다.

“그러게. C지부는 위계가 개판인가 보지, 뭐.”

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거친 어휘를 사용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조금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가 보안 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었다. 곧이어 센터 CCTV 화면을 모니터 가득 떠올랐다.

지능계 에스퍼를 꾀어내 해킹해서 얻어 낸 정보였다. 영화를 감상하듯 여유롭게 화면을 살폈다.

“얘네 사귀나 보네. 진짜 웃긴다.”

그러다 비상문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던 가이드와 에스퍼가 키스하는 걸 발견했다.

내가 평소답지 않게 사무실에서 소리 내 웃으며 즐거워하자, 팀원들이 뒤에서 웅성거렸다.

“백송이 가이드 아무래도 곧 X 될 것 같은데?”

***

오전에 센터 CCTV를 모두 확인했는데, 유건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CCTV를 보고 있는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단 생각에 CCTV가 닿지 않는 장소를 둘러봤다.

첫 번째론 화장실. 여자 화장실은 물론 남자 화장실도 주변에 남자 각성자의 도움을 받아 확인했다. 그곳에 유건은 없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는 비품실이나 자료열람실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유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캡슐이었다. 캡슐은 가이딩 중일 경우 문 옆에 빨간 불이 들어오며 잠금 설정이 된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질지 모를 가이딩을 모두 기다릴 수는 없어서, 내 정보가 담겨 있는 센터 출입증 카드로 강제 개방시켜서 일일이 확인했다.

“아, 뭐 하는 거예요!”

“실례했습니다.”

캡슐 내부 상황은 예상했지만, 태반이 남사스러운 짓을 하는 중이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피부색의 향연에 나는 흐린 눈을 하며 유건이 없는 것만 확인하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센터가 S급 가이드에게 강제 개방을 허용한 건, 적절치 않은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면 중지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가이딩을 하다 보면 가이드가 에스퍼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낮다 보니 강제로 가이딩을 취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A지부에서 S급 가이드는 나 혼자여서 계급을 따지면 가이드 중에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내 사적인 일로 권력을 남용해서 내가 S급이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오늘 꼭 유건을 찾고 싶었다.

“꺄악!”

“여기도 없네.”

그렇게 마지막 캡슐까지 확인했지만, 유건을 찾지 못했다.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서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캡슐 대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긴 캡슐을 아무렇게나 열어도 되나 봐요? 되게 신기하다. 이런 거 봤어요?”

송이였다. 그녀는 시선은 내게 향하면서 옆 사람에게 질문하듯 말했다. 누가 들어도 시비조의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여기 오기 전부터 송이와는 여러 번 마주쳤다. 화장실 앞에서 남자 에스퍼가 남자 화장실을 확인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스쳐 가면서 별짓을 다 한다고 말했던 걸 분명 들었다. 아마 일부러 내게 들리게 말했을 것이다.

이곳에 온 것도 내가 캡슐을 들쑤시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왔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그녀의 행동이 무척 귀찮게 느껴졌다.

“A지부는 체계가 엉망이네요. 센터장님은 이 사실을 모르실 것 같은데. 제가 센터장님께 건의해도 될까요?”

“아무렴요. 백송이 가이드님이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그 옆에 총괄 사무장이 그녀의 말이라면 돌이라도 씹어 먹을 것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는 그들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치려 했다.

“구사월 가이드.”

“저요?”

송이가 이번엔 나를 직접적으로 불러세웠다.

“네. 제가 지금 본 상황, 회장님께 전달해 드려도 진짜 상관없는 거죠?”

사무장이 아니라 나한테 말했던 건가. 그럼 말을 하지.

“예, 뭐. 알아서 하세요.”

그러나 내게 직접적으로 말한들 그녀의 행동을 저지할 생각은 없었다. 건성으로 대꾸하며 다시 나가려는데, 그녀가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 붙잡힌 팔을 내려다보다 다시 눈을 치켜떴다.

“뭔가요?”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요?”

“항상 이런 건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나는 송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도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필 송이가 정정 기간 마지막 날에 A지부에 게스트로 와서 못 볼 꼴을 보여 준 건 사실이었다.

어제 유건이 에스퍼들에게 도망치면서 기념 동상을 파괴한 것이나 내가 함부로 캡슐을 개방한 일은, 분명 중앙 본부라고도 불리는 A지부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알고도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급하고 간절한 상황이었다.

나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곧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가이딩을 하던 각성자들도 하나둘 캡슐에서 나와 있었다.

아니면 내가 캡슐을 강제 개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왔을 수도 있고.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말싸움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에 우리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사월 가이드.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사적인 이유로 강제 개방을 하는 것은 엄연히 규율 위반입니다. 강제 개방 권한을 이럴 때 사용하라고 부여한 게 아닐 텐데요!”

총괄 사무장이 나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말을 끝마친 후 송이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 같았다.

“이후에 징계는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길 좀 비켜 주시죠.”

“아니, 이 사람이!”

사무장은 내가 별 타격 없는 얼굴로 무시하며 지나치려 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 그를 싫어하는 각성자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관객들의 조롱 섞인 시선에 얼굴까지 새빨개져서 내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이게 단순 징계로 끝날 일일 것 같아요? 구사월 가이드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됩니까?”

“그러니까 징계 위원회를 소집해서 적절히 따져 주셨으면 합니다. 비켜 주세요.”

“안됩니다! 못 갑니다!”

총괄 사무장이 절대 길을 비켜 주지 않을 것처럼 양손을 허리에 짚고선 내 앞을 막아섰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행정실 직원들도 퇴근을 하기 때문에 무조건 그 시간 안에는 유건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지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돌연 우리 사이에 송이가 끼어들었다.

“백유건 찾는 거죠?”

나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백유건 센터 못 오는 거 다 그쪽 때문이라던데. 페어 취소하기 싫어서 도망치고 있다고. 한결 오빠랑 사귀자마자 팽하다니. 불쌍하지도 않아요?”

송이의 말에 주위의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어떤 사람은 휴대폰을 들어 촬영하는 등 재밌는 구경거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제대로 알고 말하세요. 저 캡틴이랑 안 사귀어요.”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실이 아닌 말까지 지어내는 그녀의 태도는 이젠 적당히 묻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거짓말 말아요. 둘이 숙소 같이 들어가는 거 봤다고 A지부 각성자들이 말하던데요? 페어 중 다른 에스퍼랑 가까이하는 게 비매너인 건 몰라요?”

“백유건도 허락한 일이에요.”

“그랬겠지. 한결 오빠가 연애만 자기랑 하면 된다고 몰아붙였다던데. 그 녀석이 허락을 안 하면 어쩔 건데.”

이게 무슨 소리지? 생전 처음 듣는 내용에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건 어디에서 들었어요?”

“큰어머니한테 직접 들었어요. 한결 오빠가 가족들에게까지 말한 거 몰랐어요?”

나는 전혀 듣지 못한 사실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한결이 내게 말도 안 하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최근에 내게 마음이 있다고 전했다. 연애를 거론하기엔 한참 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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