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응?”
“취했죠.”
“에스퍼가 취하는 거 봤어?”
“내가 허락 없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당황한 걸 감추려고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취했나 보다.”
한결은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다. 되려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내 손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놀랍네요.”
“뭐가?”
“선배가 여자 만날 때 이렇게 끈덕지게 굴지 몰랐어요.”
어릴 적 그와 첫 데이트를 하거나, 내가 그의 여자 친구가 된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매너가 좋고 진중한 그는 분명 상대를 배려하고 부드럽게 다가갈 거라고. 이런 쪽으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었다. 플라토닉 러브, 뭐 그런 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완전 내 판타지일 뿐이고 예측은 한참 빗나갔다.
그는 마음이 있는 이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그가 머리에 손을 기대고 비스듬하게 올려다봤다. 그의 온 신경이 내게 몰두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눈빛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한결의 파장이 눅진하게 흘러나왔다.
“고백하고 나니까 더 예뻐 보여. 계속 수작 부리고 싶어져.”
한결의 시선이 내 이목구비를 세세히 훑고 내려갔다. 나는 그 시선에서 몸을 방어하듯 손으로 목 주변을 감쌌다.
“어떻게 참았나 몰라. 이렇게 예쁜데.”
“그만… 좀 말해요. 예쁘다고.”
“어릴 때부터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잖아. 유치원 때도 연극을 할 때 공주 역할만 했다던데. 즐기는 거 아니었어?”
“그거랑 그거랑 같냐고.”
그의 말대로 예쁘단 소리도 원래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다. 근데 오늘은 왠지 처음 듣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목을 감싸던 손을 내려 습관처럼 쇄골을 더듬었다. 한결의 시선이 내 손이 닿는 부위를 따라갔다. 몸 안쪽에서부터 점점 뭉근한 열기가 차올랐다.
아무래도 이 몽롱한 느낌은 한결의 파장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파장이 형체가 있는 것처럼 몸에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가 나에게 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선배 파장…. 어지러워요.”
“술은 내가 먹었는데 네가 취하면 어떡해.”
그의 욕망이 묻어난 파장이 내 정신을 어지럽혔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우리 이만 가요.”
“그럴까?”
“네.”
“그래.”
한결은 버티지 않고 순순히 내 뜻대로 움직였다. 몸 안의 파장을 퍼트려 신체 재생 능력을 강화했다. 정화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알코올은 순식간에 해독됐다. 처음 바에 들어왔을 때처럼 멀끔한 모습으로 차에 올라탔다.
나는 센터로 돌아가는 중간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잠이 들면 혹시 가이딩이 흘러 들어갈까 봐 꾹 참았다. 유건이 한결과 가이딩을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내심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내일 안 그래도 유건이 센터 올 일 있으니까, 만날 수도 있을 거야.”
한결은 GS동 기숙사에 나를 내려 주며 말했다.
“무슨 일이요?”
“친척 동생이 A지부로 잠깐 오기로 했거든.”
“각성자예요?”
“응. A급 가이드.”
등급이 꽤 높았다. 한결과 오래 알고 지냈는데,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등급이 높은 에스퍼가 태어나기로 유명했으니 특별할 일도 아닌가.
“친척 동생은 언제 도착한대요?”
“오전에 도착할걸.”
“백유건 안 올 것 같은데….”
“웬만하면 얼굴 비치러 오겠지. 안 오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도 확답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내 친척 동생이랑은 웬만하면 부딪치지 마.”
“왜요?”
내가 한결도 어쩔 수 없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돌연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직 어려서 철이 조금 없어.”
그가 이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유건이 처음 센터에 온다고 했었을 때. 하지만 그땐 부딪치지 말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아이이길래 이렇게까지 주의시키지?
“사월아, 잘 자고. 내일 센터에서 보자.”
그는 의문스러운 말을 남기고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는 원래 집안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나도 캐묻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숙소로 돌아갔다.
***
유건은 오늘도 역시 출근을 하지 않았다. 어제 마지막 제보가 후문 쪽이었는데, 그는 밖으로 나가려고 군용 화물 트럭에 몰래 잠입했다가 들켜서 센터 안쪽으로 도주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 센터에 있다는 소린데.
“사월이 안녕. 아직도 유건이 못 찾았어?”
“네.”
지한이 아침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정정 기간 오늘까지 아니야?”
“…….”
“문서함 보니까 유건이 어제오늘 휴식 연차 냈던데. 며칠 게이트 뛰어서 한결이가 반려도 못 한대. 이걸 어떡해?”
“선배. 저 놀리러 왔죠.”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지한은 사월을 마주칠 때마다 굳이 아는 걸 살살 약 올리는 것처럼 되새기듯 말했다.
“에이, 서운한 소리. 나는 안타까워서. 그러니까 페어 요청은 신중하게 했어야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안 그래도 지금 페어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비밀이 발각됐다는 불안감 때문에 분명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조금만 더 고민했더라면, 유건과 페어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녀석은 어차피 가이딩에 미쳐서 나를 고발 못 할 테니까. 내가 왜 이렇게 짧게 생각했을까.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엎어진 일. 어떻게든 유건을 찾아서 페어를 취소해야 했다.
오늘은 기필코 그를 잡아서 행정실로 끌고 갈 작정이었다.
“어차피 백유건 오늘 사무실 올 일 있다고 했어요.”
“유건이가 사무실 온대? 왜?”
“각성자인 친척 동생 온다고 해서요.”
“아, 하긴. 송이가 얼굴도 안 비치면 분명 노발대발할 테니까.”
“선배도 알아요?”
“누구? 송이?”
지한은 친척 동생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이름을 매우 친근하게 불렀다.
“네. 캡틴 친척 동생.”
“응. 알지. C지부에서 걔도 너 못지않게 한가락 하잖아.”
“무슨 소리예요?”
“사월이 하고는 좀 결이 다른가? 어? 저기 온다.”
지한이 한결의 친척 동생에 대해 설명하려는데, 사무실이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못 보던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어리게 보이는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이 알파 팀입니다. 센터장님께는 도착했다고 제가 전달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금방 제가 찾아갈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옆에 굽신거리는 남자 한 명.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A지부 총괄 사무장이었다.
저 사람이 왜 센터 안내를 하고 있지?
“어? 지한 오빠. 안녕하세요.”
“응, 안녕. 송이 잘 지냈어?”
“네. 한결 오빠는요?”
“한결이는 아직 출근 안 했는데.”
그 여자는 오자마자 한결을 찾았다. 키는 내 어깨 정도의 크기였고, 왕방울만 한 눈에 도톰한 입술. 말랑거릴 것 같은 볼과 곱슬곱슬한 긴 머리칼은 자연히 고급 단백질 인형이 연상됐다.
“A지부 구경시켜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한결이 없는 걸 알고 크게 상심했다.
“백유건은 있죠?”
“유건이도 오늘 연차라서 안 올걸. 연락 안 했어?”
“했어요. 내가 오늘 분명 A지부 온다고 했는데. 잘못 안 거 아니에요?”
유건까지 부재중인 걸 알아채자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친척이라더니 한결뿐 아니라 유건과도 막역한 사이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저 A지부로 발령받을지도 모르거든요.”
“정말?”
“네. 그래서 사전 조사 겸 놀러 왔죠.”
그녀는 상큼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아직 C지부 소속이란 건데 팀 사무실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들락거려도 되나?
원래는 각성자인 게스트라도 팀 사무실은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A지부에서만 진행되는 임무에 대한 말이 오가기 때문이다.
“아. 여기는 알파 팀 구사월 가이드. 알지?”
“안녕하세요. S급 가이드 구사월입니다.”
지한이 느지막히 옆에 서 있는 나를 소개했다. 의례상 손을 건네자 송이의 푸른 눈동자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수를 매기듯 까다롭게 훑어 내렸다.
“아니요?”
그러더니 생긋 웃으며 내 악수를 무시한 채 지한에게 말을 돌렸다.
“지한 오빠. 그럼 오빠들 오기 전에 저 구경 좀 시켜 줄래요?”
“내가?”
이것 봐라?
나는 그 상태 눈알만 굴려서 송이를 바라봤다.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못 본 척 지한에게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네. 잠깐만요. 혹시 몰라서 C지부 에스퍼들 데리고 오긴 했는데,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센터에서 위험할 일이 뭐 있어. 그리고 사월이가 인사하잖아. 우리 송이가 못 봤나 보다.”
지한은 우리 사이에 껴서 눈치를 보다가 송이의 손을 억지로 끌어와 내 손을 마주 잡게 했다. 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어울려 준다는 듯이 약간 불퉁한 표정으로 내 손을 쥐었다가 성의 없이 뗐다.
“하하. 가이드니까 사월이가 안내해 주는 게 어때? 가이드가 갈 만한 곳은 사월이가 더 잘 아니까.”
지한은 자리가 불편한지 내게 안내를 맡기려 했다.
“저, 오늘은….”
“싫어요. 저 낯선 사람 불편해요. 오빠가 해 줘요.”
내가 오늘은 바쁘다며 거절하려는데, 송이가 먼저 내 말을 잘라 냈다.
“그, 그래. 가자. 나가자.”
결국 지한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송이를 데리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송이와 닿았던 손을 털어 내고 뒤돌아섰다.
“아, 뭐예요?”
그런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파 팀 각성자들이 내게 바짝 붙으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송이가 나간 문을 레이저라도 나올 것처럼 강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음. 냄새가 나.”
“뭐가요?”
“조오오오오온나 구린 도라이 냄새.”
한나가 막대 사탕을 와작, 씹으며 말했다.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A지부 아니면 팀 사무실 못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들어왔대?”
“사무장님이 직접 데려오셨어요.”
“으. 그 백씨 가문 똥개 새끼.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충성충성 하는구나.”
그녀는 안 봐도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저거 일부러 너 모르는 척하는 거야. 각성자 중에 사월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일반인들도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