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1/131)

그런데 사월이 각성자가 된 지 얼마 안 됐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고 말해서 희망을 품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도 이렇게 극단적이고, 맹목적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감정이 사랑일 리 없다고 느껴졌다. 사랑보다 복종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처럼 유건은 처음부터 사월만 보면 뻣뻣하게 굳고, 심장이 뛰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심한 감정 동요를 일으켰다. 이건 확실히 상태가 이상했다.

“사월이가 가이딩 대신 몸 요구할 때 승낙했다며. 너 처음 본 사람이랑 절대 3단계 가이딩도 안 하는 앤데, 왜 사월이한텐 그렇게 쉽게 줘?”

“그거야 매칭률 때문에….”

“정말 그 결정에 매칭률만 영향이 있었어? 너 사월이한테 가이딩 때문만 아니더라도 잘해 줬다며. 그땐 무슨 마음이었는데.”

“친해지고 싶어서. 내가 걔를 지켜야 하니까.”

“사월이가 게이트를 들어가니? 네가 걔를 왜 지켜?”

지수는 점점 그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사월이 크리먼이란 사실은 말할 수 없다 보니 앞뒤 설명이 안 맞았고, 그는 무척 이상한 사람이 됐다.

“삽질 오지게 한다. 가이딩이 좋은 거랑 호감이랑 헷갈리면 안 돼.”

“그러니까 안 하려고 내가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너는 애초에 사월이한테 호감으로 다가간 거야.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고. 너 구사월 좋아하는 거야, 멍청아.”

지수는 유건이 아니라는 데도 그가 사월을 좋아한다고 단정 지었다. 유건은 반발하듯 말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설명이 안 된다니까? 나도 이전에 연애해 봤는데 이런 감정은 아니었어.”

“이전이랑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거일 수도 있지.”

“내가 구사월을? 미쳤어?”

“아!”

한창 대화에 열을 내고 있는데 지수가 뭔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부딪쳤다.

“둘 다니까 그런 거 아닐까?”

“뭐?”

유건이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인상을 굳혔다.

“가이드로서도 좋고 이성적으로도 좋고. 꼭 하나만 좋으란 법은 없잖아.”

“…….”

유건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가이드한테 집착하는 유형 중 두 가지 있잖아.”

“그런 게 있어?”

“어.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닌데, 가이드들끼리 얘기하는 거 있어.”

“구사월은 그런 말 안 했는데.”

사월은 유건이 페어를 분간 못 하고 도를 넘게 집착할 때마다 서서히 나아질 거라고만 말했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둘 다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래서 그게 뭔데.”

유건은 지수가 수상했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는 것처럼 대화를 부추겼다.

“하나는 다 가져야 하는 이기주의자.”

지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기엔 넌 평소에도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아.”

지수 말대로였다. 유건은 사월과 관련된 일 말고는 인생에서 이렇게 욕심 부려 본 일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항상 원하는 것이 손에 쥐여 있는 삶이었다. 그런 환경 덕에 그는 별 욕심 없이 자라 왔다.

“나머지는 가이드를 이성적으로도 사랑하는 경우거든. 그럼 이렇게 집착이 심해지기도 해.”

“…….”

유건은 순간 온몸에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척추부터 타고 올라오는 그 싸한 느낌이 머리끝까지 올라가 쩌적, 하고 정신을 얼어붙게 했다.

“그러니까 둘 다인 거야. 사월이를 가이드로서도 좋아하고 인간적으로도 좋아하고. 꼭 나눌 필요는 없잖아.”

지수는 이게 맞는 거 같다며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에스퍼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되게 강렬하게 표현되지.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소재로 쓰이고. 네가 그동안 일반인으로 살아와서 계속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

“어때? 맞는 거 같지?”

“…….”

“백유건. 내 말 안 들려?”

“…….”

“야. 백유건.”

“안 돼.”

유건은 그대로 굳어 있다가 무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뭐?”

“안된다고.”

“왜?”

사월을 왜 자신이 좋아하면 안 될까. 유건은 스스로 질문했다.

그녀가 크리먼이어서? 아니면….

“으으.”

유건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과거에 자기 입으로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다.

한결과 본가에서 사월에 대해 서로의 영역을 나눴을 때의 대화 말이다.

“그래. 형 말대로 해.”

젠장.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근데 그 말 꼭 지켜. 구사월 이성적으로 안 볼 테니까, 형도 구사월 가이딩 절대 넘보지 마.”

그냥도 아니고 앞에 ‘절대’란 말을 붙였다.

그 당시 가이딩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 그를 지배했다.

한결에게 사월을 완전히 잃을 거란 공포감으로 그녀의 가이딩에 비틀린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사월은 그를 더 오해했고,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이걸 어떡하냐.”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가 정말, 구사월을….

“뭘 어떡해. 사월이 네 몸에 관심 있다며. 뭐 질렸다고 하긴 했지만, 그나마 어필할 수 있는 게 몸뿐 아니야? 그럼 그걸로 들이밀어야지.”

지수는 아예 자신이 사월을 좋아하는 것으로 못 박았는지 계속해서 이상한 조언을 이어 나갔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너 객관적으로 봐도 존나 잘생겼어. 등급도 S급이잖아. 우리 지부에 S급 너랑 네 형, 둘밖에 없는 거 몰라? 다른 가이드들이 백씨 형제 얼마나 침 흘리고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 형도 S급이잖아.”

“여기서 캡틴 얘기가 왜 나와? 아, 맞다. 사월이 캡틴 숙소 드나든다며. 둘이 뭐야?”

“하, 씨. 모르겠다.”

자신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점점 흙빛이 되는 유건을 지수는 알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참 껍데기는 괜찮은데, 너도 참 너다.”

고백할 용기가 없는 건가.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못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면 사월이랑 캡틴이랑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건가.

지수는 유건이 무슨 생각을 하든 앞으로 재밌어질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름대로 재밌었으니까 사월이한테 위치는 안 불게. 너 여기 내일까지 있는 거지?”

“어….”

유건은 영혼이 나가 보였다. 좀 더 재밌어지려면 둘이 페어를 그만두면 안 됐다. 계속 부딪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되겠지.

“먹을 거 가져다줄까?”

“그래 줄래?”

유건은 갑자기 협조적으로 구는 지수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허기가 진 건 사실이기에 냉큼 받아들였다.

“어, 이게 뭐야?”

“왜?”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지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였는데 센터 사무실에서 사월이 불편한 표정으로 어떤 여자와 대치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양지수 올 때 팝콘 들고 와. 개싸움각.」

“사월이 싸움 붙었다는데?”

“뭐? 어디.”

유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지수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곤 조금도 고민 없이 캡슐을 박차고 나갔다.

“야, 백유건! 너 거기 가면 사월이한테 잡혀!”

“아무튼 아니야. 나 구사월 좋아하는 거 절대 아니야! 아니라고!”

지수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지, 그는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달려갔다. 절대 아니라며 강조하는 게 왠지 열렬히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쯧쯧.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수는 이 재밌는 광경을 놓칠까, 황급히 그를 뒤따라갔다.

***

하루 전.

“어제는 집 앞에 찾아갔는데, 집으로 안 돌아오더라고요. 어떻게 안 거지? 혹시 선배가 말했어요?”

“아니. CCTV 확인하고 갔나?”

“그 녀석이 그렇게 철두철미할 리가 없는데.”

한결과 퇴근 후 각성자 호텔 라운지 바에서 가볍게 한잔하는 중이었다. 요새 유건을 쫓느라 정신이 없는데, 한결이 첫 번째 데이트부터 거절하냐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상황이었다.

막상 오긴 했는데 정신이 온통 유건을 향해 있어서 우리의 대화는 식사 때부터 유건 이야기를 빙빙 돌고 있었다.

“오늘은 잡을 수 있었는데.”

“유건이 진짜 안 잡히려고 작정했나 보다.”

“내일은 선배가 백유건 좀 붙들어 놓으면 안 돼요? 저 내일은 꼭 페어 취소해야 해요.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고요.”

“글쎄. 별로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저 이런 부탁 안 하는 거 알잖아요.”

“음.”

그렇다고 한결은 지루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협조적으로 굴지도 않았지만.

사실 한결이 내게 마음이 있다고 한 후로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고 느껴졌는데,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결이 도와준다면 유건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너는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가이딩?”

“아직 페어 취소한 거 아닌데 그래도 돼?”

“알 바인가요? 그 자식도 제멋대로 구는데.”

“가이딩은 됐고.”

그는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무알코올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체리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가이딩 말고 그가 내게 원하는 게 뭐가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한결이 산뜻한 어조로 말했다.

“뽀뽀해 주라.”

“네?”

“볼 뽀뽀. 어릴 때 자주 했잖아.”

전혀 예상치 못한 조건이어서 나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피하지 않는 시선이 그저 장난으로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어릴 때고….”

그래서 결국 내가 시선을 피했다. 당황스러워서 괜히 칵테일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무알코올 먹고 취했나. 왜 이렇게 어지러운 것 같지.’

점점 몸이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정신이 몽롱하고 근육이 이완되는 게 정말 술에 취하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됐어요. 백유건이나 백한결이나 다 똑같아.”

“유건이도 뽀뽀해 달라고 했어?”

“아니요.”

유건이 처음 자신과 내건 조건은 한결과 가까이하지 않으면 내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거였다. 내 말대로 모른 척해 주겠다고.

“걔는 더 악질이에요.”

“우리 유건이, 다른 건 몰라도 착하긴 한데.”

“지금 동생이라고 편드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다시 협상했고, 이제 내가 가이딩 해 주는 대신 유건의 피를 받기로 했다. 겁을 먹으라고 한 소리를 그가 냉큼 받아 든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나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유건이 착한 건 나도 알았다. 그것과 별개로 걔는 너무 또라이 같았다.

아니 그게 다 연기라서 그런 건가. 사실 뭐가 진짜인지 모르게 된 것 같다.

유건의 그간 행동들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내 비밀을 지켜 준다던 백유건. 누굴 먹든 한결에겐 가까이하지 말라는 백유건.

위험하니까 따라가겠다던 백유건. 무리해서까지 크리처의 피를 마시던 백유건.

스스로 피를 내어 주던 백유건까지.

가이딩에 아무리 미쳐도 그럴 수 있나. 그의 행동을 되새겨 볼수록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쪽.

“네가 악질이라면 악질이겠지. 유건이가 잘못했네.”

순간 말캉한 감촉이 볼을 찍고 지나갔다. 불시에 습격처럼 당한 볼 뽀뽀에 머리를 어지럽히던 상념이 저 멀리 달아났다.

뒤늦게 찾아오는 찌르르한 감각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한결을 바라보자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 이건 뭐 어릴 때도 했던 거니까. 근데 어릴 때도 이런 느낌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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