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0/131)

“야! 너 보내면 죽어! 신고하지 마!”

“아저씨, 범죄자예요?”

“와아! 악당 죽어!”

아이들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양 갈래머리 아이의 주먹은 분명 보기엔 솜방망이 같은데 등을 두들기는 힘이 제법 매서웠다.

‘이 녀석 분명 가이드 아닐 거야.’

“꼼짝 마.”

“꺄아!”

“오오.”

유건은 손을 가로로 날을 세워 장난스럽게 아이의 목을 위협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만화 영화를 보는 듯 눈을 반짝였다.

“신지수. 동작 그만. 이 아이의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지수는 심드렁한 눈길로 유건을 바라볼 뿐이었다.

“쇼하지 마, 백유건.”

그녀는 사월에게 보낼 메시지를 완성하고, 유건에게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까딱하다가는 당장이라도 보내기 버튼을 누를 것만 같았다.

“워, 원하는 게 뭐야!”

“그렇게 나왔어야지.”

“몸으로 갚는 건 못해!”

유건이 셔츠 앞섶을 그러쥐며 말했다.

“애들 있는데 뭔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나 네 몸에 관심 없거든?”

“그래? 그럼 뭔데. 나 지금 현금 없어.”

지수는 유건의 곁으로 다가와 그가 안고 있던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는 유건에게 안겨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한 자세로 지수에게 폭삭 안겼다.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그녀가 툭툭 치자 아이가 폴짝 일어나 멀어져갔다.

“사월이랑 왜 싸웠어?”

“조건이 뭐냐고.”

“내 조건이야. 싸운 이유.”

사월이 물질적인 걸 내건 만큼, 유건에게 더 큰 물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지수는 그것들에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말 그거면 돼?”

“대답하는 거 들어 보고 재밌으면 말 안 할 거고, 아니면 말할 거야.”

“…….”

유건은 순간 갈등했다. 이걸 그냥 밀치고 도망갈까.

하지만 J동에는 지수처럼 교육하러 온 에스퍼들이 있어서 이런 한낮에 돌아다녔다간 금방 잡힐 것이다.

염력을 쓰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그러면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주저하고 있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유건아.”

지수가 당장이라도 메시지를 보낼 것처럼 휴대폰을 흔들었다. 유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싸우긴. 걔랑 나랑 사이 원래 안 좋았잖아.”

“양념 제대로 묻혀서 자세히 말 안 해?”

“…….”

어쩜 지한도 지수도 이렇게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을까. 삶이 그렇게 재미없고 팍팍한가. 유건은 그들이 당최 이해가 안 됐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더 텐션을 끌어 올려서 말했다.

“내가 잘해 주는 거 못 믿겠대. 다 가이딩 독차지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맞잖아. 그게 뭐가 문제야? 사월이도 알고 한 거 아니야? 페어를 하려는 궁극적인 이유가 그거잖아.”

“그랬지….”

유건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반대로 지수는 눈동자를 서서히 빛을 냈다.

“그래서? 사월이가 가이딩 말고 자기를 제대로 봐 달래?”

“아니?”

유건은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세모눈으로 치켜떴다.

“뭔가 억울한가 봐. 자기도 얻어 가는 게 있어야겠대.”

“얻어 가는 거 뭐?”

이젠 지수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유건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피를 달라고 했단 건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적당히 비슷한 단어가….

“몸…?”

“몸?”

“응. 몸.”

“모옴? 손, 발, 다리. 그리고… 이거?”

지수의 눈동자가 유건의 다리 사이를 음험하게 훑고 지나갔다.

“야. 어딜 훑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거 절대 아니야.”

“와…. 등급과 크기가 비례한다는 속설이 사실이었구나.”

“그거 아니라고. 너 눈 안 떼?”

“확인해 봐도 돼?”

“뭘 확인해? 너 미쳤어?”

유건은 허벅지를 오므리며 지수의 시선에서 치부를 감췄다. 그가 기겁할수록 지수는 능글거리는 미소로 양손을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몸을 요구하는 게 어떻게 이상한 그런 게 아닌 건데. 미친. 그래서 아까 몸으로 갚기 싫다고 한 거야? 사월이가 너한테 몸을 요구했고, 너는 거절했고? 와, 대박이다. 와. 진짜 대박이다. 유건아. 성공했네.”

“아니! 아니라니까!”

한껏 흥분한 지수를 보며 유건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지수는 엄청난 걸 들었다는 듯 눈을 번뜩이다가 그를 다시 쳐다봤다.

“아니야? 그럼 네가 사월이한테 몸을 요구한 거야?”

“아니라고.”

“그럼 뭔데.”

유건은 말할수록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어쩌자고 이 얘길 꺼냈을까.

스스로도 아직 사월과 있었던 일이 정리가 안 됐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에게 키스하고, 가이딩 대신 피를 달라고 하고, 페어를 그만두자고 했는지.

그녀가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사월은 그동안 크리먼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고, 살아 있는 생물을 먹고 싶은 욕구는 있으나 딱 참을 수 있을 정도로만 섭취했다.

그리고 유건이 욕구를 못 참고 한결이나 다른 사람을 뜯어먹는 게 아니냐고 넘겨짚을 때마다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들은 사월이 그날 보여 준 행동들과 매치가 안 됐다. 그녀의 비밀을 알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사월이 진심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월이 크리먼이 되어서 부모님을 죽였을지도 모른단 얘기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끔찍했다.

그렇지만 그 끔찍하단 감상이 사월을 향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그런 일을 겪은 일 자체가 끔찍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크리먼이 처음 크리처에게 처음 물렸을 때, 잠깐 이성을 잃는다고 알고 있었다. 한결의 친모 역시 한결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했다. 분명 사월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겠지.

그 때문에 강박적으로 사람을 멀리한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면 또 짠하고 잘해 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홀로 그 외로움을 견뎌 내야 했을 텐데.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도록 견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싶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 사건으로 인해 크리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한결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면서도 한결은 간혹 이방인처럼 동떨어진 시선을 보낼 때가 있었다. 유건이 말을 걸어오면 금세 표정을 풀었지만, 그때뿐이었다. 한결 역시 사월처럼 누군가와 깊게 인간관계를 맺지 않았다.

유건은 한결의 그늘이 어릴 적의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그 일에 관해서 자세히 물으려 했지만, 어릴 때는 관련 주제만 꺼내면 차가워지는 얼굴 때문에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은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한결 역시 그렇게 굳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지도 않았다. 유건은 그럴 때마다 왠지 시기를 놓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릴 때 조금만 의젓했다면 한결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됐을까. 아니면 아직도 한결에게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더 나아가 한결이 사실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라면…. 이러한 자책감과 혼란은 유건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응어리진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사월의 비밀을 알았을 때 남 일 같지 않았다. 기회만 있다면 최대한 돕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의지했으면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마음을 사월은 가이딩 때문이라고 말하고 거짓으로 치부했다. 그는 답답하고 속이 상했다.

무엇보다 사월이 크리먼이라 할지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크리먼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유건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그 믿음은 사월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유건의 피를 빨아 마셨을 때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가이딩 대신 피를 달라는 그녀의 협상을 수락한 건, 정말 유건이 가이딩에 미쳐서가 아니었다. 사월이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으니 이것만으로 그녀를 옆에 둘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건은 이 감정이 이해가 안 갔다. 그녀에게 동정심이 든 건 한결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그녀에게 집착하는 정도가 과했다. 스스로가 미친 것 같았다.

“백유건 씨. 대답 안 하실 거예요? 저 보냅니다?”

상념에 잠긴 유건의 눈앞에 지수의 손바닥이 휙휙 지나갔다. 확실한 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유건은 페어만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모두 끝일 것 같아서.

사월의 입에서 키스를 피하면 끝이라고 말했을 때도 가이딩이 끝이라는 것보다 그녀와의 관계가 모두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너 내가 말한 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진짜.”

“당연하지. 이걸 왜 말해. 누구 좋아하라고.”

지수는 가십거리를 좋아해도 퍼뜨리는 쪽보다는 혼자만 알고 있다는 특별함을 즐기는 유형이었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었다.

“사월이가 가이딩을 해 주는 대신 몸을 요구했어. 안 주면 페어 깨겠대.”

“어, 어.”

“그래서 내가 승낙했어.”

“악! 아, 아니. 그래. 계속 말해 봐. 얘들아. 너희 다 나가 있을래? 그래서? 그래서?”

아이들은 우리 이야기에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저들끼리 뒹굴고 뛰어다니고 자유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근데 막상… 해 보니까 질렸나 봐. 그래서 페어 깨자네.”

“꺄하학.”

지수는 집중하며 듣다가 결국 크게 폭소하고 말았다. 캡슐 안을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유건은 얼굴이 절로 홧홧해졌다.

그녀는 한참이나 침대 위를 구르면서 웃더니 눈물 맺힌 눈을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잘해 주는 거 못 믿겠다고 말하다가, 억울하다고 몸을 요구해?”

“그러니까 내가 가이딩 때문에 그동안 구사월한테 잘해 줬는지 알아.”

“맞잖아.”

“근데 그것뿐만 아니라고. 나는 진심으로….”

유건이 말끝을 흐리는데 지수의 눈매가 서서히 좁아졌다. 별안간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너 사월이 좋아하냐?”

“아니?”

“사월이는 너 좋아해?”

“전혀.”

“사월이한테도 안 좋아한다고 말했어?”

“걔가 전에 물어 본 적 있어서 말했지.”

“근데 내가 보기엔 너 사월이 좋아하는 거로 보이거든?”

“매칭률 높아서 헷갈리는 거잖아. 구사월한테 들었어.”

이전에 그도 사월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었다. 처음 발단은 유건이 사월의 비밀을 눈감아 주려고 하자, 사월이 그럼 봐주는 거냐는 말을 했을 때. 순간 그녀가 귀엽다고 느껴진 바로 그때였다.

그 당시엔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했지만,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아침마다 멀쩡했던 곳이 시름시름 앓더니 완전히 힘을 잃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절망하며 언제부터 이런 건지 기억을 더듬어 보자, 시기는 사월과 첫 가이딩을 한 이후였다. 그래서 그때의 사월을 상상했더니 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친.”

처음 그 변화를 느꼈을 때 눈앞이 아찔해졌다. 진짜 내 인생이 망했구나, 끝없이 절망했다. 사월에게 다가오는 에스퍼들이 모두 적으로 느껴지고, 정말 내가 구사월을 좋아하게 된 건가 의심을 하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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