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8/131)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페어 정정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것 또한 수기로 작성을 해야 해서 프린트 후 자리에서 끄적이고 있는데, 뒤에서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사월아. 유건이랑 페어 취소하는 거야?”

알파 팀 에스퍼 한나였다. 그녀의 말에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월이 페어 취소해?”

“오래간다 했다.”

“둘이 싸워서 말도 안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더욱 정신이 사나워졌다.

나는 애써 무시하며 신청서를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취소 사유란에서 펜이 우뚝 멈추어 섰다.

“다른 에스퍼가 생겼다고 써.”

한나가 뒤에서 지켜보며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야. 미쳤어?”

“왜. 맞잖아. 사월이 유건이랑 페어 취소하고 캡틴이랑 할 거 아니야?”

한나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원래 말을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옆에서 그만하라며 팀원들이 한나를 말리는 걸 보니, 그들 모두 내가 한결의 숙소를 드나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캡틴이랑 페어 안 해요.”

“왜?”

경험상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소문은 끝도 없이 부피를 불릴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잘라 내듯 말했다.

“저 원래 한결 캡틴이랑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고, 그날은 따로 할 말 있어서 간 거예요.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캡틴이랑 저 이상하게 엮지 마세요.”

한결이 내게 마음이 있다고 했으니, 소문이 반쯤은 맞는 얘기지만 나는 그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유건과 페어를 취소하려는 건 한결과 조금도 연관이 없었다.

“그럼 왜 그동안 모른 척했어?”

“이렇게 오해할까 봐요. 뻔하잖아요.”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겸연쩍은 미소를 보내며 슬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나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다시 페어 정정 신청서에 시선을 돌렸다. 취소 사유. 취소 사유를 뭐라고 하지….

자연스레 그날 유건과 싸우면서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더 이상 너한테 휘둘리기 싫어. 애초에 너랑 엮이는 게 아니었어.”

그동안 약점이 잡힌 탓에 그가 억지를 부릴 때마다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네가 하는 짓이 너무 짜증 나서 더 이상 못 해 먹겠다고. 네가 아무렇지 않게 내 일상에 끼어드는 것도 싫고.”

그래. 짜증 나는 건 맞지. 도가 지나치게 사생활 침범한 건 맞잖아.

“네가 에스퍼인지 애인인지 구분도 못 하는 애새끼인 것도 싫어. 넌 첫인상부터 별로였어.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에스퍼가 된 지 얼마 안 됐고 페어를 한 지도 얼마 안 되어 감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유건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것까지 봐줬을까. 다른 에스퍼였다면 당장에 페어 취소 사유였다.

“위선 떨지 마, 백유건. 너한테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어. 도와 달라고도 안 했는데 나대는 걸 보통 오지랖이라고 해.”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잘해 주고 싶었다는 말이 마냥 선의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건 받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강요고 부담이었다.

이렇게 열거하자니 페어를 취소해야 하는 사유는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이 중 하나만 골라서 쓰면 되는데 볼펜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지….’

유건이 분명 싫었다. 분명 싫은 건 맞는데. 그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냥 잘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그게 그렇게 믿기 어려워?”

나에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있는 그대로 사람을 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쩌면 유건이 내게 비밀을 공유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내 끔찍한 과거를 다 듣고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캡슐에서 피를 주겠다고는 했으면서 가이딩은 받지 않겠다는 말은 뭐지? 내게 접근한 건 다 가이딩 때문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어? 유건아. 너 사월이랑 페어 취소한다며.”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데 마침 유건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원들이 아는 체를 하며 유건에게 다가왔다. 막 훈련을 마쳤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

유건은 단조롭게 대답하자 뒤에서 팀원들이 오오오, 하고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건은 뭐냐는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는 내게 걸어왔다.

“다 적었어?”

“거의 다.”

나는 사유란에서 막힌 것을 들키기 싫어서 종이를 살짝 가리며 말했다.

“그래. 다 쓰면 줘.”

“어.”

그는 그런 나를 잠시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파티션 너머로 타닥타닥 소리가 나더니 유건이 프린터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주기 전에 미리 자기가 써야 할 항목을 써 놓으려는 생각 같았다. 내가 주면 바로 써서 내려고. 하루빨리 페어를 취소하려고.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가 서두르는 만큼 다른 항목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사유란을 비워두다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져서 아무 말이나 적었다. ‘백유건이 귀찮아서’, ‘사생활을 침해해서’, ‘애새끼 같아서’, ‘내가 크….’ 마지막 말을 적을 때는 나도 모르게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결국 볼펜으로 모두 찍찍 그어 버리고는 ‘성격 차이’라고 휘갈겨 적은 다음 유건에게 정정서를 건넸다.

“자, 여기.”

그가 종이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정말 빠르게 정정서를 해치웠다.

시간은 아직 3시였다. 퇴근까지 한참 먼 시간이었다. 혹시 그 전에 제출하러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유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고?”

“어.”

“그래.”

나는 유건을 뒤따라갔다. 별거 아닌 일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분명 페어를 취소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내가 정신이 어떻게 돼버린 거라고, 심란해진 머릿속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넌 어디가?”

“정정서 내러 가는 거 아니야?”

“아닌데.”

그가 왼쪽에 찬 워치를 내가 보이게 들이밀었다.

[C13 구역 D급 게이트 발생. 알파 팀 출전 가능 에스퍼 확인 요망.]

게이트 경보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내 워치에도 경보가 떠 있었다.

“아. 잘 다녀와.”

나는 머쓱해져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게이트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지, 유건은 퇴근 시간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내내 긴장 상태였는데 결국 그날 정정 신청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문서는 다 작성했고, 다음 날에 하면 될 일이기에 조급하진 않았다. 그런데 유건은 다음 날 사무실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내가 이상하다고 느낄 무렵, 드디어 유건과 마주쳤다. 본관 카페테리아에 사람이 많아서 외곽에 있는 카페에 갔는데 유건이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백유건. 너 왜 훈련소 안 갔어?”

나는 주문대로 가려다 방향을 틀어 유건에게 다가갔다. 훈련소에 유건을 찾다가 그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내려온 참이었다.

유건의 테이블엔 샌드위치 봉투가 종류별로 널브러져 있었다. 내용물은 거의 비워진 상태였다.

‘얘는 왜 밥은 안 먹고 샌드위치를 먹지? 요새 구내식당에서도 안 보이더니, 다이어트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기엔 양이 많지 않나?’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건이 쓰레기를 두 손으로 주섬주섬 모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 해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야. 내 말 안 들려?”

“훈련 다 했어.”

“거짓말하지 마. 내가 방금 거기 있다 왔는데. 너 요새 훈련도 빠진다며.”

“…….”

“우리 정정 신청서 제출하러 가야지. 만난 김에 네 자리 들려서 서류 가지고 가자. 너 지금 할 일 없지?”

그는 말이 없었다. 붙잡힌 팔 또한 미동이 없었다. 유건이 다시 한 발짝 내디뎠다. 붙잡힌 팔이 뒤로 죽 늘어났다.

“정정 안 할 거야?”

내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재차 묻자, 다시 멈추어 섰다. 잔잔한 분위기의 재즈가 카페 안을 분위기 있게 퍼져 나갔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자연히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유건의 쥔 쓰레기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내가 붙잡고 있어서 줍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건 대신 내가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가 갑자기 강한 힘으로 내 손을 뿌리쳤다.

팍. 타다다닥.

“야, 백유….”

딸랑.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카페를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활짝 열렸다가 닫힌 문 위에 딸랑이는 종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그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때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백유건 이 새끼….’

통유리로 되어 있는 카페 창 너머로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신체 강화를 한 육체계 에스퍼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튀었네.’

정정 기간이 5일 남은 상황이었다. 5일만 버티면 2년 동안 꼼짝없이 저와 페어를 해야하니까 나를 피하던 거다. 그의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가이딩에 미친 놈이 순순히 알았다고 했을 때 의심했었어야 했다.

그는 애초에 페어를 취소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

유건이 사월을 피해 다닌 지 4일이 지났다.

그녀는 유건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는 페어를 하는 동안 훈련소 아니면 게이트, 게이트 아니면 구내식당이었으니 수사망을 좁히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녀를 몇 번 맞닥뜨려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쳐야 했으며, 이젠 센터엔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후로 유건은 모든 게이트를 스스로 나서서 출전했다. 식사 역시 현장에서 해치웠고, 훈련은 숙소에서 간단한 운동 기구로 해결했다.

어제는 사월이 집 앞에서 서 있는 걸 보고 잠까지 다른 에스퍼 숙소에서 잤다.

“이게 뭔 짓이냐.”

일어나서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오늘은 게이트 발령 알람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러면 꼼짝없이 센터로 향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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