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6/131)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긴,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낸 게 15년인데.”

그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그건 차츰 나아지지 않을까? 나는 네가 날 남자로 보게 할 자신 있어.”

그가 얕게 필터를 빨아들였다. 입술 사이로 연기가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깊은 음영 때문에 짙어 보이는 미소는 마치 사람을 작정하고 홀리는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에스퍼가 흡연하면 인상부터 찌푸렸는데 그의 담배 냄새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한결의 파장이 섞여서인지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굴수록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너 지금 시작도 안 했는데 겁먹은 표정이잖아. 내가 이러는 게 무서워?”

그의 말대로 한결의 고백이 설렘보다 무섭다는 감정이 더 컸다. 오래전에 묻어 두었던 감정은 작은 불씨만 붙으면 활활 타오를 정도로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안 돼요?”

나는 불편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도 좋잖아요. 저는 선배랑 변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아니야.”

한결은 내 말을 끊어 내듯 말했다.

“나는 이대로 안 좋아, 사월아.”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어조였다. 그가 난간 위로 팔로 기대며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다행히 바람에 휘날린 머리칼에 내 얼굴은 반쯤 가려진 상태였다.

“이제 지켜만 보는 거 싫어. 유건이 옆에 있는 너 보는 것도 불편하고, 너 보면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래.”

그저 말을 듣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내가 거절하면 벌어지지 않을 일인 걸 아는데도 마치 현실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많이 참았어.”

“저는 아니에요.”

“그래. 네게 일방적으로 받아 달라고 생떼를 부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계속해서 밀어붙일 것 같던 한결이 돌연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세 번만 만나자. 나랑 데이트 세 번만 해.”

“선배….”

“그때까지 나 남자로 안 보이면 포기할게.”

“…….”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데. 세 번이라니. 나는 답답해진 마음에 입 안쪽 살을 씹었다.

“그것도 안 돼?”

다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내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 그에게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내 얼굴에 닿아 있었다. 두꺼운 가면에 쩌적, 하고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저는 한번 결정한 건 안 바꿔요.”

“그럼 다행이네. 너 나 좋아했잖아.”

“우리 편한 관계로 못 돌아갈 수도 있어요.”

“그 정도 각오도 안 했을까.”

“오빠 동생 사이로도 못 지낼 수 있다고요.”

“걱정하지 마. 내가 그렇게 되게 안 해.”

한결은 내가 쥐어짜듯 변명하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밀리는 나와 달리, 한결의 얼굴엔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과 마주하자 완전히 패배한 기분이었다. 나는 억울해져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선배는 왜 이렇게 내가 넘어갈 거라고 자신만만해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맞잖아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처럼. 선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내 말에 웃긴다는 듯이 하하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시를 세우면 보통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그는 매번 나를 애처럼 여유롭게 대했다.

이렇게 구애하는 순간조차 여유로웠다. 보통 상대를 좋아하면 긴장하지 않나. 그래서 한결이 장난을 치는 것 같단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 눈동자 때문인가.”

“네?”

그가 내 눈을 세세히 살피며 말했다.

“에스퍼가 감정 동요를 일으키면 눈동자 색이 변하곤 하잖아. 가이드도 간혹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예시로 유건도 평소엔 갈색 눈이지만 흥분하면 노란빛을 띠곤 했으니까.

“제 눈이… 변해요? 어떻게요?”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원체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 아니지만, 만약 나도 그런 현상을 겪는다면 각성자가 되고 한 번쯤은 있었을 것 같은데.

“그건 비밀이야.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너한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아.”

“뭐야…. 거짓말이죠? 장난이죠?”

“거짓말 아닌데. 그럼 세 번 만나는 거지?”

그는 말을 돌려 버렸다. 나 또한 다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데이트라고 해 봤자 어제처럼 같이 식사하고 영화를 보거나. 그런 일들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이성적으로 대하는 한결이라니. 아직 낯설게만 느껴졌다. 상대가 한결이라서 그 세 번도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셋 셀 동안 대답 안 하면 입 맞춘다.”

“아니, 잠깐만요.”

“하나.”

내가 고민이 길어지자 그가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를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둘.”

그가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느긋한 표정은 진심인 건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둘 반.”

“장난치지 말아요, 진짜. 저 화낼 거예요.”

“그래. 장난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

선전포고 같은 말을 하며 내 어깨 옆 난간에 양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꼼짝없이 그의 품에 가둬졌고 그의 얼굴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머스크향과 미세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짙은 녹색을 띤 깊은 눈동자가 내 시선을 휘어잡았다. 그 안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세….”

“아, 알았어요!”

그가 셋을 세며 빠르게 입으로 다가오는 움직임에 내가 소리치며 말했다.

그와의 거리는 눈썹 한 올 한 올을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닿을 것 같은 긴장감에,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깝다. 입 맞출 수 있었는데.”

그는 정말 아쉽다는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계속 물러나지 않고, 진득하게 얽혀 오는 시선이 뜨거웠다. 내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자, 그가 버티지 않고 물러났다.

“이런 장난 치지 말아요.”

“왜 맨날 장난이래. 진심인데.”

“진심이든 뭐든. 내가 허락… 하면 하라고요.”

“그래.”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허락할 날이 기대된다고 중얼거리는 말에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그와 약속한 세 번의 데이트.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유건은 그날 이후 철석같이 나와 붙어 다니던 것을 그만두었다. 말도 걸지 않고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의 피를 쓰러질 때까지 마시고 그가 짓던 표정이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르곤 했다. 어딘가 포기하고 내려놓은 듯한 공허한 눈빛. 그리고 상처받은 듯이 떨리는 눈동자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붙어 다니던 것만 제외하면 평소처럼 훈련소에서 훈련하고, 게이트에 가고, 지금도 사람들과 잘 떠들며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의아했다.

‘오자마자 페어를 그만두자고 할 줄 알았는데.’

페어는 혼자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없었다. 요청했을 때처럼 두 사람의 동의가 필요했고, 페어를 한 지 한 달 이내라는 정정 기간에만 취소가 가능했다. 정정 기간이 지나면 아무리 싫어도 2년 동안 페어를 유지해야 했다. 무분별한 페어 관계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행히 아직 정정 기간이었다. 10일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날 그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한 것은 그가 겁을 먹고 도망가길 바라서였다. 가이딩에 미친 놈처럼 집착하는 걸 보면, 그가 쉽게 페어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일까지 들먹이며 밀어붙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선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지만 안색이 새하얘질 정도로 혈액을 마신 것은 아무리 에스퍼가 회복력이 좋아도 충분히 위협이 느껴질 정도의 압박이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페어를 그만두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지금 먼저 말을 꺼낸다면 유건은 일부러 페어를 파투 내려고 한 짓임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사월 양. 앞에 앉아도 될까요?”

내가 유건에게 시선을 거두고 식사를 이어가려는데 같은 팀 에스퍼 지한이 불쑥 나타났다.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식판을 놓았다. 지한은 한결과 동기로 나이도 같아서 그와 막역하게 지냈다. 그리고 한결이 어릴 때 센터에서 나를 돌봐 주던 걸 알고 있었다.

정신계 에스퍼답지 않게 식판엔 반찬이 산을 쌓고 있었다. 그는 입이 가볍고 능글맞지만, 악의는 없고 그저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 까칠한 태도 탓에 알파 팀원들은 대부분 나를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한결을 제외하고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건 지한 뿐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네 앞에 앉아도 안 달려오네.”

지한은 유건 쪽을 홱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유건이랑 싸웠어?”

“…….”

슬슬 사람들이 미심쩍게 바라볼 거란 예상은 했다. 아니, 아마 첫날부터 이상한 건 모두가 눈치챘겠지. 지한도 유건과 친하니 그는 이미 유건에게도 나에게 한 말을 그대로 물었을 것 같았다.

“왜요? 백유건이 말 안 해 줘요?”

그런데도 이렇게 날 떠보는 건 유건이 그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사월이는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

지한은 들켰다는 듯이 빙글 웃으며 얼굴에 꽃받침을 하며 물어 왔다.

“그제 피닉스팀 가이드가 너 한결 캡틴 숙소 따라갔다고 유건이한테 말했거든. 그거 듣고 유건이가 눈에 불을 켜고 뛰어가는 거 보고 무슨 일이 나도 나겠다 싶었는데, 진짜 크게 싸웠나 보네?”

그는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 생글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별로요.”

그를 무시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유건이한테 피 냄새 나던데?”

순간 생선 살을 집으려다 젓가락이 엇갈렸다.

‘젠장. 그 녀석 치료도 안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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